기간제 노동이 끝난 후

by 센터 posted Jan 17,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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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간제 노동이 끝난 후

 

이종명 시골에서 이것저것 하는 사람

 

1130, 기간제 노동의 계약이 종료되었다. 봄이 되면 비정규직 기간제 노동일을 시작하고 매년 말이면 계약종료로 보따리를 싼다. 하지만, 난계약종료일을 학수고대하며 기다려왔다. 어차피 퇴직금이나 연말정산 수당 이나 상여금 따위는 애초에 기대한 것이 아니다 보니 계약종료라고 해서 슬프거나 생계 걱정 따위는 없다. 그냥 추운 겨울에 실업급여를 받으며 내 하고 싶은 일을 맘껏 할 수 있으니 다행인데, 윤정부가 시럽급여라고 왜곡하고 도끼눈으로 쳐다보니 열받는다.

 

마지막 날이라서 오전 근무만 하고 퇴근했다. 평소에 하던 일은 전날까지 마무리 지었고, 마지막으로 그동안 사용했던 기계들을 점검하고 기름칠을 해 두었다. 보유기기 목록을 만들어서 창고 및 대기소 열쇠와 함께 담당 공무원에게 건네주면서 모든 일이 끝났다. 함께 일했던 동료들과 당구장에 가서 당구 한 게임 치고 내년 운 좋으면 다시 만나자고 한마디씩 건네고 헤어졌다. 4시경, 집에 와서 가장 먼저 한 일은 달리기였다. 그동안 그렇게 달리고 싶었지만, 주말에도 특근하거나 농사를 할 수밖에 없었기에 제대로 운동을 하지 못했었다. 이제부터 무조건 이틀에 한 번씩은 서구이재까지 왕복 11키로미터를 달리기로 맘먹었다.

 

12월 첫날, 출근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다 보니 전날 밤에 제대로 잠을 자질 못했다. 드러누워 유튜브 동영상을 보면서 새벽녘까지 눈에 불을 켰다. 아침에 졸린 눈을 비비며 일어나 출근하는 아내의 도시락을 싸주고, 오전에 청소와 빨래 같은 집안일을 했다. 이제 쉬는 동안 이런 집안일은 내 몫이겠지. 오후에는 전북대에서 진행하는 생활권 수목 관련 세미나에 참석했다. 봄에 나무의사 자격증을 따고 나서 제대로 공부를 하지 못해 점점 까먹는 게 아까워 되새김하는 기분으로 6시간 강의를 들었다. 강의를 들으며, 산림이나 나무 관련해서 내년에는 조경 관련한 공부를 좀 더 해보아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년 다시 기간제로 취업하기까지는 어차피 시간부자라는 생각에 이것저것 해보고 싶은 일들을 머릿속에 떠올려본다. 달리기, 조경공부, 여행.

 

늦게 잠들고 아침에는 겨우 일어나 아내 도시락을 싸주는 루틴이 생겼고, 이틀에 한 번씩 달리기를 하는 일정을 잡아 운동하고 있다. 또 격일로 산서밭에 가서 원두막을 짓고, 과일나무를 전정하고, 무너진 밭둑을 쌓고 밭두렁 부근의 풀도 정리하면서 2019년 첫해 귀촌했을 때와 같은 시골살이를 맘껏 즐기고 있다. 요새 날이 따뜻해 지면서 가을 냉이를 비롯해 광대나물이나 봄나물들도 많이 올라왔다. 그 녀석들을 뽑고 뜯고, 울타리 주변 표고목에서 버섯도 따다가 국도 끓여 먹고 전도 부쳐 먹고 봄도 아닌데 나물잔치를 하고 있다. 산에서 칡을 캐고, 들판에서 우슬을 캐고, 은행나무 아래에서 은행을 주워 말리면서 풍성한 겨울준비를 마쳤다.

 

20241, 농사일로 딱히 할 일이 없다. 12월과 같이 이틀에 한 번 달리고, 이틀에 한 번 도시락 하나 싸들고, 막걸리 한 병 챙겨서 산서 밭으로 간다. 작은 모닥불을 피워 군고구마를 구워서 먹고 3년째 만들고 있는 원두막을 짓는다. 이번만큼은 지붕을 얹고 반드시 마루를 놓아야지.

 

20242, 깊은 산은 여전히 눈에 뒤덮여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해 잘 드는 밭 두둑이나 논둑에는 달래와 냉이가 파릇파릇 얼굴을 내밀고 봄이 오고 있음을 알릴 것이다. 나는 또 작은 호미를 들고 봄 냉이가 풍기는 특유의 향을 맡으며 냉이무침, 냉이전, 냉이 된장국 3종세트를 즐길 것이다. 이제 슬슬 농사 준비를 해야 하니 도라지밭의 두둑을 긁어 세우고, 고랑에는 낙엽을 덮어주고 이랑에는 퇴비를 뿌려 줄 것이다.

 

20243, 봄농사를 시작할 시기이다. 퇴비를 뿌려서 흙을 섞어주고 섞은 흙은 삽과 괭이로 두둑을 만든다. 두둑에 비닐 멀칭을 하고 창고에 보관했던 씨감자를 잘라서 감자를 심는다. 무 배추 상추 당근을 씨 뿌리고 늦서리 피해를 방지하기 위해 활대를 꽂아 비닐을 덮어줄 것이다. 감자 심을 무렵, 양지바른 곳에는 고사리가 올라올 것이기에 고사리를 끊기 시작하고, 두릅순도 빼꼼하게 얼굴을 내밀 것이다. 내 밭에서 가장 환영을 받는 녀석은 명이나물인데 올핸 4년차이기에 넓고 굵은 새순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온갖 종류의 나물을 뜯으면서 봄에는 독초도 먹어도 된다고 호들갑을 떨겠지. 매일 더 늙어가면서도 새로운 봄기운에 더 건강해지고 더 젊어지지는 않을까 하는 기대감도 가지면서 말이다.

 

20244, 나물 천국의 시절이다. 고사리, 두릅과 취나물, 쑥이 제철일 것이다, 농사도 바빠지기 시작해서 옥수수 씨앗을 곳곳에 심고, 서랍에 넣어두었던 토마토 씨앗을 상토에 씨뿌려 모종을 키워낼 것이다. 햇살 잘 드는 곳에 호박씨도 심어놓고, 오이와 참외, 수박 씨앗도 싹틔워 모종을 만들어야 한다. 이번엔 지난해처럼 들깨 모종을 죽여서 밭을 놀리지 말아야 할 텐데.

 

20245, 씨앗을 싹틔워 모종을 만들었던 종자를 정식으로 옮겨심는다. 토마토, 고추, 오이, 참외, 수박, 땅콩, 늦옥수수, 당근을 심는다. 내년엔 이웃집에서 부치던 땅을 100평 더 받아서 1,200평 농사를 짓는 터라 많이 바빠질 것인데, 난 더 다양한 작물을 심어볼 것이다. 5월 하순, 봄 농사를 마치고 나면 군청의 기간제 공고에 서류를 넣고, 면접을 보고 또다시 기간제 노동과 농사를 병행하게 되겠지. 그때는 달리기도 끝나고 신서에서의 소풍도 끝나고 다시 기간제 노동과 농사일을 병행하는 시간가난뱅이의 일상이 되겠지.

 

그동안, 부족하고 재미없는 글을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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