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

by 센터 posted Dec 26,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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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에서 머리로 
머리에서 손으로 나오지 못하는 답답함이
우울로 켜켜이 쌓여 가고
머리맡을 지키던 시어가
두려워졌다

하지만 너는 
누구에게도 전염되지 않게 내 품에 있어주렴
너의 몸을 베고 나는 깊고 깊은 
잠에 들고 싶어

꿈이 풀려 허기가 지면
나는 비로소 책을 뜯어 
단어로 배를 채우고  
우물 안에 웅크리고 있는 
시를 찾아 떠날 수 있을 것이다

시인에게 시가 있을까?
시에게는 진심이 있을까?
잠시, 
어떠한 질문을 시에게 할 수 있을까?

사흘을 굶고 앉아있어도
어제의 서글픈 나를 짓누르던 감정이
첫사랑처럼 지치지도 않고 
오늘 밤도 
심장을 누른다

사본 -김진.png 김진 시인
한국작가회의 회원, 경남작가회의 회원, 2007 경남작가 신인상

적벽에서

by 센터 posted Nov 01,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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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에 가려진들 달 아니겠느냐
바람에 흔들린들 나무 아니겠느냐
봄꽃도
되돌아보면
피멍 같은 아픔인 것을

이 가슴 무너진들 땅이야 꺼지겠느냐
애간장 타들어간들 매듭이야 없겠느냐
이 밤도
새우다 보면
적벽 쪼아대는 소리 들리는 것을

소한 대한 눈보라친들 새봄이야 없겠느냐
땡볕 더위 쏟아진들 그늘이야 없겠느냐
아픔도
깊어지다 보면
점멸하는 와등인 것을



최기종.jpg
최기종 시인
1956년 전북 부안 출생. 
1992년 교육문예창작회지 《대통령의 얼굴이 또 바뀌면》으로 작품 활동 시작. 
시집으로 《나무 위의 여자》《만다라화》《어머니 나라》《나쁜 사과》《학교에는 고래가 산다》《슬픔아 놀자》가 있다. 현재 한국작가회의 회원이며 전남민예총 이사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일몰의 기억

by 센터 posted Aug 28,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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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수교 위를 지나면 알 것 같다 하루가 왜 저무는지 깜깜한 밤 인생의 등불이 어떻게 켜지는지 검푸른 물 위에 어둠 풀어질 때 사람들은 깊은 속도의 그늘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노을 지면 산비탈에 내려와 조그만 집과 창틀을 그러안는 그리움의 색깔들

흘러가는 건 물결만이 아니다 
풍경도 세월도 
사람과 더불어 흘러간다

한때 가슴을 불 인두로 지지던 젊은 날의 생채기도 쓰라린 눈물 훔치며 인파를 헤치던 열정의 숲도 이젠 더 이상 넘실거리지 않는다 다만 그것들은 이 세상 어딘가에 간직되어 있을 뿐 두꺼운 얼음 속 실개천이 흐르듯 살갗 아래 실핏줄이 흐르듯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 해도 저 혼자 흐르고 또 흐를 것이다


.박선욱.jpg
박선욱 시인
제1회 실천문학 신인 공모에 시가 당선되며 등단했다. 
시집으로 《그때 이후》 《다시 불러보는 벗들》 《세상의 출구》 《회색빛 베어지다》 등이 있고, 
편저로 《한국민중문학선Ⅰ 노동시편》 《한국민중문학선Ⅱ 농민시편》, 
청소년 평전 《채광석 : 사랑은 어느 구비에서》 《윤이상 : 세계 현대음악의 거장》, 
본격 평전으로 《윤이상 : 거장의 귀환》 등이 다수 있다.





폭설

by 센터 posted Jul 02,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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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내린다 실비식당 뒷마당 
개밥그릇 덮으며 눈 내린다

인천역 화물열차의 
검은 지붕 위에 하얀 눈 내린다 

바다로 나가는 북성포구길 
마저 지우며 인천항 8부두에
함박눈 내린다

하늘과 땅 사이 너와 나 사이 
모든 경계를 지우며 온종일 눈 내린다

사람이 길을 버리고 
길이 사람을 버리는 저녁

흰 눈을 고봉으로 퍼먹은 저녁이 
하얗게 어두워지고 있다

이권.jpg
이권 시인
2014년 《시에티카》로 등단. 철도 노동자였으며 현재 한국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시집으로 《아버지의 마술》, 《꽃꿈을 꾸다》가 있다.

굴뚝

by 센터 posted Apr 26,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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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업이 시작되고 몇 명은 굴뚝으로 올라가고 
굴뚝 위에서는 모든 것이 훤히 보이지요
굴뚝 위에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당신이 없다면 우리 모두 흩어져 울었을 거예요
파업을 지지하러 몰려온 사람들도 
이제 지쳤어, 안 되겠어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도 
누군가를 기다리며 자기만의 굴뚝에서 연기를 피우는 사람
굴뚝 속이라도 들어가 손바닥을 쬐고 싶은 사람도
내려오면 안 돼요 끝까지 버텨 보세요
얼어붙은 눈물 목걸이를 목에 걸어주는 사람도
내려오라 목이 쉬어 소리 지르는 가족들도
굴뚝에서 내려오기 전까지는 모든 것이 보이지요
하얀 구름을 찍어내는 굴뚝도 이젠 좀 쉬어야지
모두가 굴뚝 주변에서 뭉게뭉게 이야기를 피울 때
이야기가 사방으로 흩어져 구름이 될 때
지나가던 구름이 굴뚝 위에서 쉬다 
근심 많은 사람들 이마 위로 쏟아질 때
드디어 굴뚝에서 연기가 멈추고 공장도 지쳐 쓰러졌어
이제 모두 집으로 돌아가 밀린 잠을 자야지
언제 우리가 굴뚝 위로 올라왔지 
굴뚝 위의 사람들은 언제 내려가야 하는지 모르고
내려가야 할 사다리마저 치워지면
굴뚝 위의 사람이 종일 뱉어내는 한숨으로 안개가 끼고
지상의 인간들은 가끔 이야기 한다
모든 것이 보이지 않아 눈이 멀어버렸나봐
굴뚝 위로 올라간 사람들은 먼 곳을 보며 노래하네 
파업이 시작되고 몇 명은 굴뚝으로 올라가고

김성규.jpg

김성규 시인
200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등단. 시집 《너는 잘못 날아왔다》, 《천국은 언제쯤 망가진 자들을 수거해가나》가 있다.

환희

by 센터 posted Feb 28,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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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가고
눈이 내렸다

저녁에 공장으로 들어가 
아침이면 나오는 사람이

모두 똑같이 
생긴 얼굴로 포장된 
개체를 떠나보냈다

사람이라고 부르지 말 것
경고를 받았으나 
저녁에 공장으로 들어가 
아침이면 나오는 사람은 
사람들 몰래 
개체의 이목구비에 점을 찍었다
축복을 내렸다 

겨울새는 흰 잎을 물고와
공장의 굴뚝으로 수북수북 떨어뜨리
밤새

죽은 사람처럼 
흰 연기가  
옥상에서
사람과 똑같은 것을 대량생산하고도
저녁마다 맴도는 
세계적인 사람이
연기를 내뿜으며 올려다보는 곳에서
해가 떠오르고 

저녁에 공장으로 들어가 
아침이면 나오는 사람이 
나왔다 

김현.jpg

김현 시인
일하며 쓰는 사람.
시집으로 《글로리홀》, 《입술을 열면》 
산문집으로 《걱정 말고 다녀와》, 《아무튼, 스웨터》, 《질문 있습니다》가 있다.

손님보다 알바생

by 센터 posted Jan 02,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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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는 가끔 야채곱창을 포장해오기도 했다
아빠는 가끔 나를 곱창집으로 불러내기도 했다

곱창집 사장님은 아주 멋진 어른이었다
곱창도 정말 잘 구워줬고 서비스로 사이다도 줬다
교복이 예쁘다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기도 했다

사장님은 아주 친절했으므로 
사장님은 아주 상냥했으므로 
사장님은 교복 입은 나를 아주 칭찬했으므로 
나의 첫 곱창집 서빙 알바는 슬프지 않았다

사장님은 손님 자리 못 찾는다고 소리를 질렀다
사장님은 주문 못 받는다고 소리를 질렀다
사장님은 ‘애가 멍청해가지고’라고 나의 교복을 무시했다
사장님은 ‘어서오세요’를 큰소리로 안 한다고 소리를 질렀다
사장님은 죽을 만큼 아파 잠깐 앉아있던 나의 생리통을 무시했다

나는 그대로 나인데 손님이 아닌 알바생이 되었을 뿐인데
사장님은 잘려나가는 곱창처럼 내 슬픔을 뭉텅뭉텅 잘랐다

실업자가 된 아빠는 다시 취직하면 곱창집에 가자고 했다
아빠는 아무것도 모르지 내가 곱창집 알바생이라는 것을

아빠 이제 곱창은 절대 먹지 않을 거야



유현아.jpg
유현아 시인
2006년 제15회 전태일문학상 
수상하며 작품 활동 시작. 
시집 《아무나 회사원, 그밖에 여러분》이 있다.


당신의 유통기간은 언제까지입니까?

by 센터 posted Oct 30,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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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유통기간이 끝나가는 동안 
거미줄같이 엉킨 골목을 걸으며 한숨을 쉬는 일
매일 다른 구인 전단지를 붙이는 일
안도의 시간을 타고 집으로 가는 일
그런 일들이 고요하게 흘러갔다  

밀폐된 시간 속에서 눈을 감으면 보이는 얼굴들이 있다 전단지 위에 덧붙여진 또 다른 전단지처럼 겹겹이 쌓이는 얼굴들 고향에 가서 감나무를 심자고 했던 이제는 떠나간 유통기간이 지난 얼굴들
얼굴들이 떠나도 새로운 날짜를 새긴 얼굴들이 금방 자리를 채웠다 몸이 익숙해지기도 전에 얼굴들은 나가고 들어왔다 모두가 흔들리는 외줄 위에서 한발 한발 내딛으며 하루를 열고 닫았다 

나의 기간도 연장전이 끝난 경기처럼 언제 울릴지 모를 호루라기 소리를 기다리며 고요하게 흐르는 일 속에서 채워져 간다  

또 하나의 얼굴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당신의 유통기간은 언제까지입니까?



김진.jpg
김진
한국작가회의 회원. 
경남작가회의 회원. 
2007 경남작가 신인상.

공장 빙하기

by 센터 posted Aug 28,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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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나무 한 그루 심어야겠네
공장 정문에다 심어야겠네
공장이 화석이 되어 지구 곳곳에서 발견될 때
새파랗게 잎을 틔우고 열매를 맺어
여기가 공장이 있던 자리라고 유일하게 증명해줄
은행나무 한 그루 심어야겠네
이 빙하기(氷河期)를 견디고 견뎌 
지구의 역사가 되는
버림받은 노동자들 가슴을 심어야겠네
은행나무 한 그루 심어야겠네
공장 정문에다 심어야겠네


표성배 시인
경남 의령에서 태어나 1995년 제 6회 ‘마창노련문학상’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아침 햇살이 그립다》, 《저 겨울산 너머에는》, 《개나리 꽃눈》, 《공장은 안녕하다》, 《기계라도 따뜻하게》, 《기찬 날》, 《은근히 즐거운》 등이 있고, 시산문집으로 《미안하다》가 있다.

마네킹의 오장육부

by 센터 posted Jul 03,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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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모니카 소리가 이상하다
곡은 없고 숨소리만 있다
도레인지 미파인지 
불고 들이마시는 소리에 뒤돌아보니
맹인이 아니다
두 눈 멀쩡하게 뜨고
바구니를 들고 있다
멀쩡함이 멀쩡함에게 구걸하는 증상
속이 곯은 거다
외상 없는 내상
전화번호부 같은 것으로 맞았을까
모르는 사람에게 암보험 상담 전화를 걸던 그녀는
말기암이었다
그 지경이 되도록 몰랐던 건
그녀의 오장육부가 위(胃)밖에 없었기 때문
배고픔이 모든 장기를 집어삼켰기 때문
합법적인 보이스피싱이라며
아는 사람에겐 권하지 않는다는 
일말의 양심이 악성종양이었을까
수술대에 오르기도 전에
그녀는 제거됐다
집도의는 그녀를 뽑은 사람이었다
회사는 멀쩡했다


이장근.jpg
이장근 시인
1971년 경북 의성 출생.
200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시), 2010년 제8회 푸른문학상 새로운 시인상(동시)으로 등단.
시집《꿘투》, 동시집《바다는 왜 바다일까?》 《칠판 볶음밥》, 청소년 시집 《악어에게 물린 날》 《나는 지금 꽃이다》,
《파울볼은 없다》 등

천국의 경비원

by 센터 posted Apr 27,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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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눈 가짜인 아빠는

한 번도 진짜인 적 없었다고

어디에도 오래 있을 수 없었지

 

하나의 눈으로는 아무것도 오래할 수 없었대

그땐 그랬대

 

아빠가 하는 일은

입구와 출구를 지키는 것

입구와 출구에서 어디로도 가지 않는 것

입구와 출구가 겹쳐진 공간을 오래 보는 것

 

낙엽을 조금 늦게 쓸었다고

쫓겨났다 아빠는

술주정 받아주지 않았다고 부녀회장한테 인사하지 않았다고 점심을 너무 오래 먹었다고 세차를 대신 해주지 않았다고 택배를 알려주지 않았다고 휴가를 썼다고 함부로 몸이 아팠다고

쫓겨났다 아빠는

 

내겐 진짜였던 아빠는 어디선가 늘 가짜로 늙었다

다른 걸 지키다가 자신을 지키지 못했으므로

 

그러니까 당신들이 말해봐

천국의 입구와 출구를 지키는 사람은

천국이 허락한 사람인지 천국을 허락하는 사람인지

 

아빠의 왼쪽으로, 자꾸만 왼쪽으로 숨는

세계의 절반을 멀쩡한 당신들이 왜 볼 수가 없는 건지

 


최현우.jpg


최현우 시인

1989년 서울 출생

201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안개주의보

by 센터 posted Feb 27,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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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의 제국엔 국경선이 없다. 더 이상 도망칠 백성은 없으므로, 한번 갇히면 누구도 헤어나지 못하지만 그런 연유로 제국의 문은 열려 있고 천지간은 적막으로 가득 떠 있다. 어느 새벽 자전거를 탄 이국의 사내가 안개 속으로 빨려 들어간 적 있다. 비어 있으나 비어 있지 않고 차 있으나 차 있지 않은 그곳에서 꼼짝없이 여생을 갇혀 지내야 하는 일이 사람의 나라에선 외롭고 슬픈 일이지만 안개의 제국에선 흔하고 흔한 일, 아무도 자진 월경越境한 자의 행방은 수소문하지 않는다. 한번 삼키면 뱉을 줄 모르는 자본의 뱃속처럼 어둡고 컥컥한 길을 따라 그는 아직도 불 꺼진 공장 밖을 전전하고 있을까. 도道를 도라 말하면 도가 아니듯 무無를 무라 하면 무가 아니듯 죽음을 죽음이라 말하지 않는 사람들, 저 속절없이 자욱한 안개숲에는 더 이상 가지를 내밀 수 없는 나무들이 있다. 혼자인 듯 아닌 듯 아스라이 하늘을 괴고 서 있는 저것들을 사람들은 전신주라 부르지만, 안개의 제국에선 깃발 없는 만장輓章이라 부른다. 지난여름, 자전거를 타고 나가 돌아오지 않는 사내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란 말을 모른다.



이용헌.jpg

이용헌 시인은 광주(光州) 출생.

2007년 《내일을여는작가》로 등단.

시집 《점자로 기록한 천문서》가 있음.


50년의 판타지

by 센터 posted Dec 27,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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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책 없던 아버지는 판타지를 꿈꿨다
상상력을 사줄 수호신을 기다렸다, 다만 집에서


엄마가 공장으로 일하러 나간 사이 하나뿐인 방을 판타지 소굴로 만들었다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부르고 방바닥에 배를 깔고 슬금슬금 시를 썼다
나는 그런 아버지의 낭만이 싫었다 하나뿐이었던 방도 싫었고 하나뿐이었던 마루도 싫었고 없는 사람처럼 일만 한 하나뿐인 엄마도 싫었다


나풀나풀 가벼운 아버지는 집밖으로 나가는 일이 거의 없었다 나가면 돈 나간다고 돈은 들어오게 해야 한다는 알 수 없는 신념에 가득 차 있었는데 1년 중 하루는 정성스레 양복을 다려 입고 밖으로 나가 저녁에 들어왔다 한 손엔 작은 비닐봉지가 들려있었는데 소고기 반근과 미역 한 움큼이었다 철야하는 어머니를 기다리는 동안 아버지는 쌀을 안치고 소고기 미역국을 끓였다 나는 그때가 가장판타지적인 공간에 있었다고 기억한다


철야를 하고 온 어머니는 하루도 빠짐없이 아버지를 욕했는데 1년의 그 하루만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밥상 위 소고기 미역국에 밥을 말아 코 박고 먹기만 했다
아버지는 옆에서 기타를 쳤고 나는 쌀밥의 냄새와 소고기 미역국의 향긋함에 미움이 사라지는 하루였다


팔순의 아버지는 여전히 일 년 중 하루는 소고기 반근과 미역을 샀으며

팔순의 어머니는 여전히 아버지 원망을 1년 중 단 하루만 빼고 주구장창 한다
아마,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 하루의 판타지를 50년 째 기억하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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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현아 시인
2006년 제15회 전태일문학상 수상
시집으로 《아무나 회사원 그밖에 여러분》이 있음



울타리 밖에서 바라보는 거리의 이편과 저편

by 센터 posted Oct 31,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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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의 무리가 폭풍처럼 거리를 휩쓸고 지나간다.
저 무리 속에 깃발을 흔드는 꿈
저 무리 속에서 팔뚝을 치켜드는 꿈


시새움의 눈빛이 아니라,
부러움의 눈빛이 아니라,


저들의 구호가 언젠가 우리들의 구호가 되고
저들의 파업 선언이
실업자들에게도 희망의 선언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6030의 꿈,
그 꿈의 현실마저도 여섯 시간으로 꺾이고,
다섯 시간으로 꺾이고,
10원짜리 동전 만 개로 내동댕이쳐지는 청춘의 꿈
꺾여진 청춘의 꿈이다.


한때의 무리가 폭풍처럼 거리를 휩쓸고 지나간다.
거리를 지나면서 가게 안으로 던져 넣어주는 전단지
가슴 뭉클하게 와 닿지 않는 낡은 구호들
감동으로 와 닿지 않는 저 낡은 구호들.


울타리 밖에서 바라보는 거리의 이편과 저편,
새벽 3시까지 마감을 치고,
손님들이 토해낸 화장실 청소까지 끝내놓고
편의점 앞에서 5천 원짜리 말라버린 족발 씹으며
소주 몇 잔에 흔들리는 눈빛으로
아침을 맞이하는 청춘들도 있으니,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갈라져 버린
울타리를 하나 사이에 두고, 갈라져 버린
새벽과 밤을 가르는 사이
무능과 자괴감으로 무너져 내리는 청춘도 있으니,


그 차가운 손을 잡아야 한다.
그 꺾인 꿈을 일으켜 세워야 한다.
4월의 꽃피는 봄,
7월의 불타는 거리에서
그 여윈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워야 한다.


손에서 공구를 내려놓는 순간,
도시빈민으로 전락하는 늙은 노동자 앞에
불쑥 전도지를 내밀며,
“불신지옥, 예수천당!”
그 미친 예수쟁이의 목쉰 소리가 들린다.
 
대열의 후미에서 생수병에 소주를 넣어 마시고
힘겹게 따라가는 늙은 노동자를 보라.
그 움푹 패인 불안한 하루를…….



-------------------------

조선남 시인
해방글터 동인, 작가회의 자유실천위원회 위원. 전태일문학상, 노동해방문학으로 작품 활동 시작.

시집 《희망수첩》, 《때로는 눈물도 희망》을 냈음.

푸른사상 건설노조 활동 이후 마을목수로 현장에서 살아감.


바닥은 쉽사리 바닥을 놓아주지 않는다

by 센터 posted Aug 24,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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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지하 계단
오르내리는 인파들 틈에서
걸레를 든 손
바닥이 가만히
발걸음소리를 새겨듣는다


이젠 바닥에도 정이 드는지
한몸이 되어버린 바닥이
주름을 비춰준다


엎드려 살았던 몸을 닦듯
수없이 바닥이 바닥을 끌어안는다


무릎을 구부릴 때
바닥의 눈과 귀가 숨을 받아낸다


지하철역 바닥을 닦는 늙은 손등 위로
전동차가 덜컹거리며 스쳐간다


이 바닥을 떠나면
올라가는 계단은 없다





정지윤.jpg 

정지윤 | 2015년 경상일보 신춘문예 시,

201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





보호는 좋은 것입니까?

by 센터 posted Jun 30,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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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호는 좋은 것입니까?*


노란빛이 숲을 이루었네
손톱만한 노란 꽃잎들이 관계처럼 촘촘하네
너는 어째서 그렇게 환하게 피어 있을까
다가서면 한순간에 사라질까 바라만 보네
망각과 기억 그 어디쯤이 따끔거리네


권력이 권력으로 안전장치를 강화했다네
사람들에게 보호의 단추를 달아주었다네
그물처럼 얽혀있어도 단추 하나로 이어지는
끝에 자유와 민주주의가 있네
열정적으로 보호하는 바람에 숨이 막히네
사육당한 삶이 부풀어 핏줄들이 터지네


기다려도 오지 않는 생명이여
무고하게 짓밟혀진 사랑이여
빛깔들이 색을 잃어가고 어두워지네
안과 밖이 다르지 않는 고장 난 시간
보호가 일상의 폭력을 재구성하고 있네



* 영화 <로봇, 소리>에서 로봇의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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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이 시인은
2002년 계간 《시평》으로 작품 활동 시작.
시집으로 《반성하다 그만둔 날》이 있음.


리어카의 무게

by 센터 posted Apr 28,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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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어카 바퀴가 주저앉았다
켜켜이 쌓인 주름살 같은 상자가
안간힘을 다해 도로 한복판에서 벗어나려 한다
늘 벗어나려 했던 것들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던 바퀴의 그늘
끌어도 끌어지지 않는 상자의 무게로
길바닥에 주저앉아 한나절 그늘을 받아낸다
푹 수그리고 앉았던 자리에
늙은 그림자는 꼼짝을 하지 않는데
홑겹의 낡은 옷이 휘청거리며
거리를 밀고 간다
묵묵히 바닥만 내려다보던
늙은 그림자가
스러지지 않고 어제도 오늘도
그 자리에 앉아 있다




박경희 시인.jpg

박경희|1974년 충남 보령 출생.
2001년 시안 신인상 수상. 제 3회 조영관 창작기금 수혜.
시집 《벚꽃 문신》, 동시집 《도둑괭이 앞발 권법》,

산문집 《꽃 피는 것들은 죄다 년이여》,

《쌀 씻어서 밥 짓거라 했더니》가 있음.


그리고 나는 저녁이 될 때까지 계속 걸었다

by 센터 posted Mar 14,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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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드라이어 소리에 아버지가 깨셨다 출근하니? 뜨거운 바람에 머리카락이 바싹 말랐다 오늘도 늦을 거 같아요 가는 내내 뒤를 돌아봤다 나는 반대편 출구로 나와서 골목을 쏘다녔다


아버지는 가양동 현장에서 일하셨다 오함마로 벽을 부수는 일 따위를 하셨다 그런 일 같은 건 늘 바닥을 보는 거나 마찬가지 세상에는 벽이 많았고 아버지는 쉴 틈이 없었다


아버지께 당신의 귀가 시간을 여쭤본 이유는 날이 추워진 탓이었다 골목은 언젠가 막다른 길로 이어졌고 나는 아버지보다 늦어야 했다 아버지는 내가 얼마나 버는지 궁금해 하셨다


배를 곯다 집에 들어가 현관문을 보며 밥을 먹었다 어쩐 일이니? 라고 물으시면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외근이라고 말씀드리면 믿으실까? 거짓말은 아니니까 나는 체하지 않도록 누런 밥알을 오래 씹었다


최지인.jpg 최지인 2013년 《세계의 문학》 신인상으로 등단.




이상한 집*

by 센터 posted Jan 26,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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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도 없이
하늘을 나는 사람들이 있다


까치조차 짓지 않는
30m, 40m 높이에 집을 짓는 사람들이 있다


땅 위에서 외치는 소리
높은 곳에 있는 사람들 들리지 않아
오르고 또 오른다


오르는 일이야 늘 이어지고 있지만
더 높이 오르면 소리 전할 수 있을까


오늘이 마지막이라며
날개도 없는 사람들
까치집 보다 높은 곳에
이상한 집을 짓는다



* 인권. 통권 78호 한금선 님의 시선에서 인용함.
* 2013년 1월 4일 전주종합운동장,  천일교통 해고노동자 김재주 분회장이 철탑 농성을 함.


축소이상호.jpg

이상호 | 창원 출생. 1999년 제11회 ‘들불문학상’을 수상했다.

2007년 시집 《개미집》이 문화관광부 우수도서로 선정되었고, 2015년 《깐다》 등을 펴냈다.
‘객토문학동인’, ‘경남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역사는 당신의 개인수첩이 아니다

by 센터 posted Dec 07,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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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은 4대강을 1열로 줄세우겠다더니
박근혜는 역사를 1열로 줄세우겠다는구나
이명박은 용산에서 철거민을 불태워 죽이더니
박근혜는 아예 역사를 분서갱유하겠다는구나
이명박은 자원외교랍시고 20억을 해먹더니
박근혜는 역사 자체를 꿀꺽하겠다는구나
도대체 우리는 날강도들을 뽑는 건지
대통령을 뽑는 것인지 모르겠구나


역사가 당신의 가족사인가
역사가 당신 가족의 족보책인가
역사가 고작 새누리당의 국정홍보책인가
역사쿠데타로 어제를 독점하고
노동법쿠데타로 2000만 노동자들의 미래를
한 줌도 안 되는 재벌집단들에게 헌납하겠다는구나


세월호에서
단 한 사람의 생명도 구해주지 못한 무능 정권이
1년 반이 지나도록
25m 아래 세월호 하나도 인양하지 못하는 정권이
진실규명이나 탄압하는 정권이
역사의 키를 잡겠다고 하는구나
역사의 항로를 밝히겠다는구나


도대체 당신은 어떤
역사의 정당성을 가지고 있는가
당신은 국정원 대선 개입으로
헌법을 유린하고
권력을 불법탈취한 집단의 수괴일 뿐
도대체 당신은 어떤
사회적 정당성을 가지고 있는가
당신은 모든 노동자민중 시민들의
권리를 뺏아 자본에 헌납하는
좀비들의 우두머리일 뿐


아무래도 되게 맞아야겠구나
역사의 물줄기가 얼마나 거센지를 당해봐야겠구나
역사의 소용돌이가 얼마나 숨가쁜 건지를 경험해봐야겠구나
역사의 갈래가 얼마나 많은지 그 미로 속에 던져져봐야겠구나
역사의 철퇴가 얼마나 무서운지를 맛봐야겠구나
역사의 평가가 얼마나 냉혹한 지를 맛봐야겠구나


아서라. 당신의 그 멍청한 수첩으로는
다 기록될 수 있는 역사가 아니다
아서라. 당신 같은 미성숙한 인격이
접근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아서라. 당신 같은 닭대가리가
해석할 수 있는 역사가 아니다
아서라. 당신 같은 시대의 죄인이
손댈 수 있는 역사가 아니다


역사는 끝내 꺾이지 않을 것이며
밟을수록 더욱 날카롭게 솟아올라
당신과 당신 주구들의
심장을 겨눌 것이다


송경동시인.jpg 송경동

2001년 《내일을 여는 작가》와 《실천문학》을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꿀잠》, 《사소한 물음들에 답함》, 《못난 시인》(공저), 산문집 《꿈꾸는 자 잡혀간다》, 《사람을 보라》(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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