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by 센터 posted Jun 29,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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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는 멀어지고 그 사이 맨 얼굴로 여름을 보내고 있었다 

방에선 선풍기가 돌아가고 두루마리 화장지로 가끔 콧물을 닦으며 지나간 사람을 지나온 사람처
럼 불렀다

뒤돌아보는 사람은 모두 지나온 사람

애써 웃어주는 사람과 그 웃음 뒤의 막막함에 숨는 일로 잠시 웃어 보였으나

여름은 발에 걸리지 않아 부를 이름이 없고 수제비 같은 맨 얼굴은 수시로 뚝뚝 끊어졌다

간밤엔 기억에도 없는 일을 하였다가 기억에서 사라진 건 아닐까 마신 술에 속아 울면서

수용하였다 

간신히 입 다문 정든 수용소와 그 너머 안부까지

한밤중에 일어나 물을 마시며 여름을 보았다는 사람도 있지만 그도 속았다는 걸 모르는 거다 

빌려온 슬픔을 되돌려 보낼 수 있어 한여름은 없었다 

그래서 안녕

이돈형.jpg 이돈형 시인
2012년 《애지》로 작품 활동 시작. 제9회 김만중문학상 수상. 
시집으로 《우리는 낄낄거리다가》가 있다.

해고

by 센터 posted Apr 29,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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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연 시인

우리는 철탑의 시간을 가지고 있습니다
날개 없이도 하늘을 밟고 살아요
등을 돌리면 아무나 와서 내 등을 밀어버릴 것 같습니다
엉겁결에 그어진 하늘선을 밟고 죽을 것 같습니다

퇴근길 창문에서 서녘의 새떼를 자주 봅니다
작은 머리통들이 느닷없이 날아가 나란히 사라지는 걸
왜 자꾸 보게 되는 걸까요?

지평선에서 새들이 멀어지면 깃털이 빠진다고 해요
아주 사라지지 못하는 거죠

내 몸으로 새가 들어온 날
영하의 날씨에도 창문을 반쯤 열어둡니다
하늘 한쪽 해고당한 새들만 모여 사는 곳이 있다지요?
고공농성 간호사가 복직을 약속 받고 털모자를 쓴 친구를 끌어안고 웁니다
기쁨은 아닙니다
몸 안의 새를 내보내는 일은 기쁨의 영역이 아니죠


송전탑과
크레인에서 사는 사람들
몸 안에 들어온 새를 내보내려고 애를 씁니다
중력을 얻으려고 환약을 삼킵니다
경험 많고 침묵이 깊은 새들입니다

갓 날개 달은 새들에게 자리를 내어준 날
별자리는 어둠에게 눈멀지 말라고 촛불 하나씩 쥐어 줬다지요
우리 언제쯤 상공에 맺히는 아침이 다시 오겠습니까?


이소연2.jpg


너무 늦지 않기로 해요

by 센터 posted Feb 27,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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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이 시인

두통 없는 하루가 지나가요
멀미 나지 않는 하루가 저물어요
몸살 없이 무사한 오늘이에요

오늘이 지나면 내일이라 믿었어요
오늘이 지나도 내일은 아니었어요
오늘 하루만큼 죽어간 나의 오늘이었어요
나를 죽이면서 날름 삼킨 오늘이에요

농담이라고 하니 몸살이 났어요
별것도 아닌데 예민해서 더 예민해졌어요
오늘이 잘릴까 봐 두려웠어요

나 없는 나의 하루하루 일상이에요
야금야금 파먹는 미세먼지처럼 달라붙었어요

억누르고 침묵했던 오늘이 길이 되었어요
냄새 난다고 버리지 못하게 한 생리대를 다시 가방에 쌌어요 
거식과 폭식이 앞뒤로 치고받으며 슬픔을 외면해요
수행하듯 삭였던 침묵은 진짜 인형이 되었어요
오늘이 쌓은 그 인형의 길을 소리 없이 뒤따르고 있어요
그래요 중독된 날들이에요

나를 찾아오는 기억이 너무 늦지 않기로 해요
나는 지하방 너머 어슴푸레한 달빛처럼 희미해지고 있어요

-------------------------------------------------------------------------------------------------
* 김사이 시인_2002년 계간 《시평》으로 등단. 시집으로 《반성하다 그만둔 날》, 《나는 아무것도 안하고 있다고 한다》가 있음.

공장

by 센터 posted Jan 02,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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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는 감귤밭에서 일하다 손가락 하나를 잃었지요 하지만 울지는 않았어요 작은언니 중학교 졸업식날 우리 집에서 가장 먼저 중학교를 졸업한 사람이구나, 말하며 울었지만요 
  아버지는 내일도 다시 입을 작업복을 공장에 걸라고 하셨지요 새 옷과 겹치지 말아야 하는 먼지 묻은 옷이 걸려 있던, 공장은 벽에 못 하나를 박아 만든 아버지 혼자만의 장롱이었지요

  바람이 지나가는 구멍을 가진 제주 돌담은 태풍에도 무너지지 않아요 하지만 우리들은 허기진 구멍을 가지고 있어요 굶주리면 흙이라도 풀이라도 입 속에 넣어야지요 허기처럼 쉽게 사라지는 우리들은 새 달력에 죽음을 먼저 기록하지요

  새 달력을 앞에 두고 투명한 못 두 개를 박습니다 새 달력에 나의 공장이 두 개, 심장처럼 두 개, 심장에 박힌 못에 걸어 둘 민호와 고래,

  민호는 음료수 공장에서 사라진 학생, 태평양 고래들도 해파리 대신 비닐을 삼키며 사라져 갑니다 무릎을 꿇고 투명한 못 두 개를 박습니다 열아홉 민호는 젊기도 전에 사라졌고, 문자를 읽을 수 없는 고래들도 텅 빈 뱃속 채우다 사라져 갑니다 

  민호가 없는 텅 빈 하루를, 허기로 가득 찬 고래 배를, 손가락 하나 없는 손으로 단추를 채워 나갔을 아버지는 몇 번이나 울었을까요 이제 우리는 다시 새 달력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두 개의 울음을 공장에 겁니다 

  새 달력에는 이미 무릎을 꿇고 박은 투명한 두 개의 못이 박혀 있으니까요


*선반 같은 것이 없는 작은 벽에 못을 박아 옷을 걸어두게 한 자리를 제주에서 나고 자란      아버지는 공장이라 불렀다. 그것은 허공에 둔 장롱이라는 뜻일지도 모른다.

김신숙.jpg 김신숙 시인
2012년 《제주작가》, 2015년 《발견》으로 등단. 시집 《우리는 한쪽 밤에서 잠을 자고》 발간.

근로하는 엄마 노동하는 삼촌

by 센터 posted Oct 30,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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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촌은 근로자의 날이라서 쉬고
엄마는 노동자의 날이라서 쉬고


삼촌은 회사 안 가서 좋다고 하고
엄마는 회사 잘릴 것 같다고 하고


삼촌은 굴뚝이 있었다는 옛날 목욕탕 이야기를 하고
엄마는 굴뚝에 여전히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삼촌은 누나 일 아니니까 그런 일에 신경 쓰지 말라 하고
엄마는 내 일 될 수 있으니까 관심 가져야 한다고 하고


난 5월 1일이 근로자의 날이나 노동자의 날이나 상관없다
엄마나 삼촌이나 저런 소리 안 하고
삼촌이나 엄마나 잘릴 걱정 없이
편안히 쉬는 날이었으면 좋겠다


시끄러워 죽겠다


유현아.jpg 유현아 시인

2006년 제15회 ‘전태일문학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 시작.
시집으로 《아무나 회사원, 그밖에 여러분》이 있다.



밥은

by 센터 posted Aug 29,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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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냉장고에 호박 오이 무생채 무쳐놨으니까 대접에 넣고 비벼먹어 고추장은 베
란다에 있고 참기름은 가스레인지 찬장에 있어 맨날 빵 같은 거 먹지 말구 된장
국은 쉬었는지 확인 한 번 해보고 먹어 오늘은 어디 가니 일찍 들어와 엄만 새벽
에 나가


   시위대가 도로를 점거했다
   엄마는 집에 없고
   엄마가 차려놓은 밥상이 집에 있고
   시위대가 톨게이트 옥상을 점거 중이다

 

   뜨거운 아스팔트 위를 걸으며 퇴근했다
   올라간 지 한 달째라고 했다
   집에 가서 씻고 밥 먹고 잤다


이종민.jpg 이종민 시인

                                                                2015년 《문학사상》 등단


오후대책

by 센터 posted Jun 25,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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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는 버리고 누군가는 줍는 방식으로 
모처럼의 연휴가 가고 있다
택배 상자를 차곡차곡 접어 내면서
나보다 더 자주 집에 오는 누군가가 있었다는 사실과
감쪽같이 사라지는 상자들의 행방에 놀란다

노후대책을 세우려면 좀 아껴야지 않겠냐는 말을 주고
골목에는 당장 오후대책이 
더 급한 이가 있다는 대답을 돌려받는다 

아내는 큰그림을 그리는 사람 
소파와 리모컨과 홈쇼핑 채널이 
오후의 골목에 미치는 영향을 설파하며
끼니도 못 되는 책만 들이는 나를 방으로 돌려보낸다

구천 원을 주고 산 174그램의 시집들이 
빈 밥그릇처럼 가지런히 꽂힌 위에 또 엎어져 있는, 책장
먹지도 못하는 걸 자꾸 사온다는 아내의 핀잔을 
참 많이도 견뎠구나 위로 하다가
불현듯 오후를 견디고 있을 누군가에 생각이 간다 
 
파지가 키로에 백 원이면 시집 한 권은 17원
삼백 명의 시인이 
오후 난민의 밥 한 그릇 해결하기 벅차다는 사실에
시 쓰는 일 참 부질없다 싶어서
내 시집 몇 권을 섞어 삼백 권 쯤 노끈으로 묶는다
시 쓰는 일도 밥이 된다는 듯이  

다시 아내가 다시 전화를 건다
질세라, 어느 시인에게는 또 미안한 일이지만
서명된 페이지는 오려서 비닐 파일에 넣고
그 위에 내 책을 또 몇 권 보태보는 오후가 저물어 간다


권상진.jpg 권상진 시인
2013년 전태일문학상으로 작품 활동 시작. 복숭아문학상 대상, 경주문학상 수상.
2018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문학나눔 도서 선정 시집 《눈물 이후》 한국작가회의 회원, 문학동인 Volume 회원


빛의 탄생

by 센터 posted Apr 29,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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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이 쓰러지고 나면 밤이 찾아왔다. 미싱이 돌고 도는 동안 밤의 거리가 얼어붙었다.
여성들은 향수 대신 먼지를 뒤집어썼다. 마른기침 뱉는 꿈이 멈추지 않을 때가 있었다.
이 모든 걸 불과 함께 태워 올린 이가 있었다. 눈을 뜨면 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양안다.jpg 양안다 시인

1992년 충남 천안 출생. 2014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작은 미래의 책》,

《백야의 소문으로 영원히》. 창작동인 ‘뿔’로 활동 중.


제주 예멘

by 센터 posted Feb 25,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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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청년 고남도 씨는 1948년
바람 세찬 어느 날
배에 숨어 일본으로 밀항했다
폭도로 몰려 토벌대에 학살당한 이웃들이
어디에 묻혔는지 알 수 없는 제주에서
비탈밭을 일구기가 괴로웠던 그는
일본인 밑에서 허드렛일하며 겨우 먹고 살아남아
일본말을 터득하고
일본에 세금 내는 거주민이 되었으나
제주에 불던 바람이 잊히지 않아
나무들이 흔들리는 날이면 날마다
비탈밭을 떠올리다가 늙어 죽었다
예멘 청년 모하메드 씨는 2018년
바람 세찬 어느 날
비행기를 타고 제주로 입국했다
반군과 정부군이 이웃들을 사이에 두고 총질하고
동네에 폭탄 터뜨리는 예멘에서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들에 대해서도 가르치던
초등학교 교사였던 그는
농사일을 해본 적 없고
고기잡이배를 타본 적 없어
말이 통하지 않는 제주에서
난민 신청자에게 주는 생계비로 버티며 
우선 먹고 살아남을 일자리를 찾으러 다니다가
바람 부는 날이면 날마다
초등학교 교실을 떠올리며 살날을 헤아렸다


하종오.jpg 하종오 시인

1954년 경북 의성 출생. 1975년 《현대문학》 추천으로 등단. 시집으로 《벼는 벼끼리 피는 피끼리》《사월에서 오월로》《넋이야 넋이로다》《분단동이 아비들하고 통일동이 아들들하고》《정》《깨끗한 그리움》《님 시편》《쥐똥나무 울타리》《사물의 운명》《님》《무언가 찾아올 적엔》《반대쪽 천국》《님 시집》《지옥처럼 낯선》《국경 없는 공장》《아시아계 한국인들》《베드타운》《입국자들》《제국(諸國 또는 帝國)》《남북상징어사전》《님 시학》《남북주민보고서》《세계의 시간》《신강화학파》《초저녁》《국경 없는 농장》《신강화학파 12분파》《웃음과 울음의 순서》《겨울 촛불집회 준비물에 관한 상상》《죽음에 다가가는 절차》《신강화학파 33인》 등이 있다.




시작

by 센터 posted Dec 26,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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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에서 머리로 
머리에서 손으로 나오지 못하는 답답함이
우울로 켜켜이 쌓여 가고
머리맡을 지키던 시어가
두려워졌다

하지만 너는 
누구에게도 전염되지 않게 내 품에 있어주렴
너의 몸을 베고 나는 깊고 깊은 
잠에 들고 싶어

꿈이 풀려 허기가 지면
나는 비로소 책을 뜯어 
단어로 배를 채우고  
우물 안에 웅크리고 있는 
시를 찾아 떠날 수 있을 것이다

시인에게 시가 있을까?
시에게는 진심이 있을까?
잠시, 
어떠한 질문을 시에게 할 수 있을까?

사흘을 굶고 앉아있어도
어제의 서글픈 나를 짓누르던 감정이
첫사랑처럼 지치지도 않고 
오늘 밤도 
심장을 누른다

사본 -김진.png 김진 시인
한국작가회의 회원, 경남작가회의 회원, 2007 경남작가 신인상

적벽에서

by 센터 posted Nov 01,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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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에 가려진들 달 아니겠느냐
바람에 흔들린들 나무 아니겠느냐
봄꽃도
되돌아보면
피멍 같은 아픔인 것을

이 가슴 무너진들 땅이야 꺼지겠느냐
애간장 타들어간들 매듭이야 없겠느냐
이 밤도
새우다 보면
적벽 쪼아대는 소리 들리는 것을

소한 대한 눈보라친들 새봄이야 없겠느냐
땡볕 더위 쏟아진들 그늘이야 없겠느냐
아픔도
깊어지다 보면
점멸하는 와등인 것을



최기종.jpg
최기종 시인
1956년 전북 부안 출생. 
1992년 교육문예창작회지 《대통령의 얼굴이 또 바뀌면》으로 작품 활동 시작. 
시집으로 《나무 위의 여자》《만다라화》《어머니 나라》《나쁜 사과》《학교에는 고래가 산다》《슬픔아 놀자》가 있다. 현재 한국작가회의 회원이며 전남민예총 이사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일몰의 기억

by 센터 posted Aug 28,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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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수교 위를 지나면 알 것 같다 하루가 왜 저무는지 깜깜한 밤 인생의 등불이 어떻게 켜지는지 검푸른 물 위에 어둠 풀어질 때 사람들은 깊은 속도의 그늘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노을 지면 산비탈에 내려와 조그만 집과 창틀을 그러안는 그리움의 색깔들

흘러가는 건 물결만이 아니다 
풍경도 세월도 
사람과 더불어 흘러간다

한때 가슴을 불 인두로 지지던 젊은 날의 생채기도 쓰라린 눈물 훔치며 인파를 헤치던 열정의 숲도 이젠 더 이상 넘실거리지 않는다 다만 그것들은 이 세상 어딘가에 간직되어 있을 뿐 두꺼운 얼음 속 실개천이 흐르듯 살갗 아래 실핏줄이 흐르듯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 해도 저 혼자 흐르고 또 흐를 것이다


.박선욱.jpg
박선욱 시인
제1회 실천문학 신인 공모에 시가 당선되며 등단했다. 
시집으로 《그때 이후》 《다시 불러보는 벗들》 《세상의 출구》 《회색빛 베어지다》 등이 있고, 
편저로 《한국민중문학선Ⅰ 노동시편》 《한국민중문학선Ⅱ 농민시편》, 
청소년 평전 《채광석 : 사랑은 어느 구비에서》 《윤이상 : 세계 현대음악의 거장》, 
본격 평전으로 《윤이상 : 거장의 귀환》 등이 다수 있다.





폭설

by 센터 posted Jul 02,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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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내린다 실비식당 뒷마당 
개밥그릇 덮으며 눈 내린다

인천역 화물열차의 
검은 지붕 위에 하얀 눈 내린다 

바다로 나가는 북성포구길 
마저 지우며 인천항 8부두에
함박눈 내린다

하늘과 땅 사이 너와 나 사이 
모든 경계를 지우며 온종일 눈 내린다

사람이 길을 버리고 
길이 사람을 버리는 저녁

흰 눈을 고봉으로 퍼먹은 저녁이 
하얗게 어두워지고 있다

이권.jpg
이권 시인
2014년 《시에티카》로 등단. 철도 노동자였으며 현재 한국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시집으로 《아버지의 마술》, 《꽃꿈을 꾸다》가 있다.

굴뚝

by 센터 posted Apr 26,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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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업이 시작되고 몇 명은 굴뚝으로 올라가고 
굴뚝 위에서는 모든 것이 훤히 보이지요
굴뚝 위에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당신이 없다면 우리 모두 흩어져 울었을 거예요
파업을 지지하러 몰려온 사람들도 
이제 지쳤어, 안 되겠어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도 
누군가를 기다리며 자기만의 굴뚝에서 연기를 피우는 사람
굴뚝 속이라도 들어가 손바닥을 쬐고 싶은 사람도
내려오면 안 돼요 끝까지 버텨 보세요
얼어붙은 눈물 목걸이를 목에 걸어주는 사람도
내려오라 목이 쉬어 소리 지르는 가족들도
굴뚝에서 내려오기 전까지는 모든 것이 보이지요
하얀 구름을 찍어내는 굴뚝도 이젠 좀 쉬어야지
모두가 굴뚝 주변에서 뭉게뭉게 이야기를 피울 때
이야기가 사방으로 흩어져 구름이 될 때
지나가던 구름이 굴뚝 위에서 쉬다 
근심 많은 사람들 이마 위로 쏟아질 때
드디어 굴뚝에서 연기가 멈추고 공장도 지쳐 쓰러졌어
이제 모두 집으로 돌아가 밀린 잠을 자야지
언제 우리가 굴뚝 위로 올라왔지 
굴뚝 위의 사람들은 언제 내려가야 하는지 모르고
내려가야 할 사다리마저 치워지면
굴뚝 위의 사람이 종일 뱉어내는 한숨으로 안개가 끼고
지상의 인간들은 가끔 이야기 한다
모든 것이 보이지 않아 눈이 멀어버렸나봐
굴뚝 위로 올라간 사람들은 먼 곳을 보며 노래하네 
파업이 시작되고 몇 명은 굴뚝으로 올라가고

김성규.jpg

김성규 시인
200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등단. 시집 《너는 잘못 날아왔다》, 《천국은 언제쯤 망가진 자들을 수거해가나》가 있다.

환희

by 센터 posted Feb 28,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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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가고
눈이 내렸다

저녁에 공장으로 들어가 
아침이면 나오는 사람이

모두 똑같이 
생긴 얼굴로 포장된 
개체를 떠나보냈다

사람이라고 부르지 말 것
경고를 받았으나 
저녁에 공장으로 들어가 
아침이면 나오는 사람은 
사람들 몰래 
개체의 이목구비에 점을 찍었다
축복을 내렸다 

겨울새는 흰 잎을 물고와
공장의 굴뚝으로 수북수북 떨어뜨리
밤새

죽은 사람처럼 
흰 연기가  
옥상에서
사람과 똑같은 것을 대량생산하고도
저녁마다 맴도는 
세계적인 사람이
연기를 내뿜으며 올려다보는 곳에서
해가 떠오르고 

저녁에 공장으로 들어가 
아침이면 나오는 사람이 
나왔다 

김현.jpg

김현 시인
일하며 쓰는 사람.
시집으로 《글로리홀》, 《입술을 열면》 
산문집으로 《걱정 말고 다녀와》, 《아무튼, 스웨터》, 《질문 있습니다》가 있다.

손님보다 알바생

by 센터 posted Jan 02,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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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는 가끔 야채곱창을 포장해오기도 했다
아빠는 가끔 나를 곱창집으로 불러내기도 했다

곱창집 사장님은 아주 멋진 어른이었다
곱창도 정말 잘 구워줬고 서비스로 사이다도 줬다
교복이 예쁘다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기도 했다

사장님은 아주 친절했으므로 
사장님은 아주 상냥했으므로 
사장님은 교복 입은 나를 아주 칭찬했으므로 
나의 첫 곱창집 서빙 알바는 슬프지 않았다

사장님은 손님 자리 못 찾는다고 소리를 질렀다
사장님은 주문 못 받는다고 소리를 질렀다
사장님은 ‘애가 멍청해가지고’라고 나의 교복을 무시했다
사장님은 ‘어서오세요’를 큰소리로 안 한다고 소리를 질렀다
사장님은 죽을 만큼 아파 잠깐 앉아있던 나의 생리통을 무시했다

나는 그대로 나인데 손님이 아닌 알바생이 되었을 뿐인데
사장님은 잘려나가는 곱창처럼 내 슬픔을 뭉텅뭉텅 잘랐다

실업자가 된 아빠는 다시 취직하면 곱창집에 가자고 했다
아빠는 아무것도 모르지 내가 곱창집 알바생이라는 것을

아빠 이제 곱창은 절대 먹지 않을 거야



유현아.jpg
유현아 시인
2006년 제15회 전태일문학상 
수상하며 작품 활동 시작. 
시집 《아무나 회사원, 그밖에 여러분》이 있다.


당신의 유통기간은 언제까지입니까?

by 센터 posted Oct 30,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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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유통기간이 끝나가는 동안 
거미줄같이 엉킨 골목을 걸으며 한숨을 쉬는 일
매일 다른 구인 전단지를 붙이는 일
안도의 시간을 타고 집으로 가는 일
그런 일들이 고요하게 흘러갔다  

밀폐된 시간 속에서 눈을 감으면 보이는 얼굴들이 있다 전단지 위에 덧붙여진 또 다른 전단지처럼 겹겹이 쌓이는 얼굴들 고향에 가서 감나무를 심자고 했던 이제는 떠나간 유통기간이 지난 얼굴들
얼굴들이 떠나도 새로운 날짜를 새긴 얼굴들이 금방 자리를 채웠다 몸이 익숙해지기도 전에 얼굴들은 나가고 들어왔다 모두가 흔들리는 외줄 위에서 한발 한발 내딛으며 하루를 열고 닫았다 

나의 기간도 연장전이 끝난 경기처럼 언제 울릴지 모를 호루라기 소리를 기다리며 고요하게 흐르는 일 속에서 채워져 간다  

또 하나의 얼굴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당신의 유통기간은 언제까지입니까?



김진.jpg
김진
한국작가회의 회원. 
경남작가회의 회원. 
2007 경남작가 신인상.

공장 빙하기

by 센터 posted Aug 28,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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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나무 한 그루 심어야겠네
공장 정문에다 심어야겠네
공장이 화석이 되어 지구 곳곳에서 발견될 때
새파랗게 잎을 틔우고 열매를 맺어
여기가 공장이 있던 자리라고 유일하게 증명해줄
은행나무 한 그루 심어야겠네
이 빙하기(氷河期)를 견디고 견뎌 
지구의 역사가 되는
버림받은 노동자들 가슴을 심어야겠네
은행나무 한 그루 심어야겠네
공장 정문에다 심어야겠네


표성배 시인
경남 의령에서 태어나 1995년 제 6회 ‘마창노련문학상’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아침 햇살이 그립다》, 《저 겨울산 너머에는》, 《개나리 꽃눈》, 《공장은 안녕하다》, 《기계라도 따뜻하게》, 《기찬 날》, 《은근히 즐거운》 등이 있고, 시산문집으로 《미안하다》가 있다.

마네킹의 오장육부

by 센터 posted Jul 03,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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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모니카 소리가 이상하다
곡은 없고 숨소리만 있다
도레인지 미파인지 
불고 들이마시는 소리에 뒤돌아보니
맹인이 아니다
두 눈 멀쩡하게 뜨고
바구니를 들고 있다
멀쩡함이 멀쩡함에게 구걸하는 증상
속이 곯은 거다
외상 없는 내상
전화번호부 같은 것으로 맞았을까
모르는 사람에게 암보험 상담 전화를 걸던 그녀는
말기암이었다
그 지경이 되도록 몰랐던 건
그녀의 오장육부가 위(胃)밖에 없었기 때문
배고픔이 모든 장기를 집어삼켰기 때문
합법적인 보이스피싱이라며
아는 사람에겐 권하지 않는다는 
일말의 양심이 악성종양이었을까
수술대에 오르기도 전에
그녀는 제거됐다
집도의는 그녀를 뽑은 사람이었다
회사는 멀쩡했다


이장근.jpg
이장근 시인
1971년 경북 의성 출생.
200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시), 2010년 제8회 푸른문학상 새로운 시인상(동시)으로 등단.
시집《꿘투》, 동시집《바다는 왜 바다일까?》 《칠판 볶음밥》, 청소년 시집 《악어에게 물린 날》 《나는 지금 꽃이다》,
《파울볼은 없다》 등

천국의 경비원

by 센터 posted Apr 27,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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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눈 가짜인 아빠는

한 번도 진짜인 적 없었다고

어디에도 오래 있을 수 없었지

 

하나의 눈으로는 아무것도 오래할 수 없었대

그땐 그랬대

 

아빠가 하는 일은

입구와 출구를 지키는 것

입구와 출구에서 어디로도 가지 않는 것

입구와 출구가 겹쳐진 공간을 오래 보는 것

 

낙엽을 조금 늦게 쓸었다고

쫓겨났다 아빠는

술주정 받아주지 않았다고 부녀회장한테 인사하지 않았다고 점심을 너무 오래 먹었다고 세차를 대신 해주지 않았다고 택배를 알려주지 않았다고 휴가를 썼다고 함부로 몸이 아팠다고

쫓겨났다 아빠는

 

내겐 진짜였던 아빠는 어디선가 늘 가짜로 늙었다

다른 걸 지키다가 자신을 지키지 못했으므로

 

그러니까 당신들이 말해봐

천국의 입구와 출구를 지키는 사람은

천국이 허락한 사람인지 천국을 허락하는 사람인지

 

아빠의 왼쪽으로, 자꾸만 왼쪽으로 숨는

세계의 절반을 멀쩡한 당신들이 왜 볼 수가 없는 건지

 


최현우.jpg


최현우 시인

1989년 서울 출생

201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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