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 理事

by 센터 posted Mar 14,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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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 理事

 

이송우 시인

 

이사했다

스무 해 직장 생활은

서명하고 나니

종이 몇 장 무게만큼 가벼웠다

 

아내의 말처럼

한창 일할 때

은퇴는 없어야 해서

프리랜서로

 

이사했다

새로 나온 명함에 담긴

오래 기다렸던 이름

 

어디에도

몸 숨길 곳 없는 벌판에

낮이면 햇살에

밤이면 달빛에 벌거숭이로 나서기 위해

이사했다

 

이송우.png

 

 

2018년 《시작》 등단.

시집 『나는 노란 꽃들을 모릅니다』,

『신세기 타이밍』,

미얀마 혁명시 모음인 공편 시집 『나의 투쟁 보고서』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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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쓸쓸한 주점에서

by 센터 posted Jan 17,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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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쓸쓸한 주점에서

 

박영선

 

 

노가다라 했다

빈 소주병 움켜쥔 사내의

벌건 눈에서 섬광이 번뜩인다

어른 대접을 받고 싶었던 늙은 노동자는

청년들을 향하여 거친

욕설을 내뱉는다

지금은 노가다를 하고 있지만

xx 나도 한때는 운동권이었다고 이 새끼들아!

너희들이 누구 덕에 학교 다니고 있는데

고래고래 지르는 목소리가 주점 유리창에 부딪친다

어디에도 토해내지 못한 말들이

보이는 출구마다 연처럼 걸린다

중심을 잃고 쓰러진 술잔들은 이미 늙어버렸다

차가운 길바닥

떠밀려 나간 몸뚱이가

검은 포대자루처럼 웅크린다

한없이 누추하다

 

다시 허공이다

 

사진.jpg

 

전북 김제에서 태어나 광명에 살고 있다

시집 조금 더 사소해지는 사이분홍달이 떠오릅니다가 있다

시락’ 동인에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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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게 허밍으로

by 센터 posted Dec 01,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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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게 허밍으로

 

고명자

 

먼 들판으로 넘어진 포플러나무

뿌리째 뽑혀 말라 가며 앓는 시늉을 해

어찌나 가만히 살랑이던지

더러는 진짜 죽고

더러는 새잎이 돋고

 

노래가 새어 나와

죽은 뿌리에서 병든 기억이 흘러나와

흉흉한 소문이 흥얼흥얼 흘러나와

그래서 집 안에는 포플러를 심으려 하지 않나 봐

 

사람의 목소리가 아닐 거야, 아닐 거야

열여덟 시름도 다 풀려 버렸지

누가 나무에 들어앉아 날 불러낸다고

포플러 잎사귀를 타고 꼭대기까지 오르려 했어

 

음악대학과 봉제공장 갈림길에

포플러 잎사귀의 정령들

내 손목 끌어당기네

저 많은 실밥들 언제 다 따내라고

푸른 정령들은 손뼉 치며 노래하며 따라오라 하고

나는 목젖 다 내놓고 울기만 하고

 

어느 날 문틈으로 보니 그때의 포플러들이 나를 찾으러 들판을 걸어가고 있는 거야

 

음악대학 담벼락을 돌고, 돌고, 돌고

내가 부른 노래는 노래라 말해질 수 없어

일손을 놔버리고 나무에 기대앉아 석 달 열흘 흘러가 본 적 있어

포플러는 까마득히 넓어지고 높아지고 멀어지다

내 손아귀를 벗어나 버렸어

 

길 위의 시_고명자.jpg

 

 

고명자 프로필

2005년 문예지 시와 정신 등단

시집 술병들의 묘지』, 『그 밖은 참, 심심한 봄날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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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어

by 센터 posted Sep 11,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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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나라면 어땠을 거 같아?

 

소년이 철로를 베고 잠이 들었다

 

모 시사 프로그램 진행자는 초저가 제품의 시대가 끝나가는 것이 씁쓸하다고 했다 어떤 노동자가 적은 임금으로 일해야 하는가 부는 어디서 오는가

 

현실의 문제

인간성 회복

 

통학 버스 창가에 앉아 거리를 걷는 한 소년을 바라보았다

 

나는 힘이 없어요 내 손을 놓으세요

 

그 애는 암 병동에서 일했다 어제 돌봤던 이가 오늘 떠났는데 아무렇지 않다고 했다 어쩜 그럴 수 있니 토요일에는 사람들이 죽은 거리를 걸었다 산 사람은 살아야지 그 말이 싫었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죽음 타령을 했다 이제 그만해 불어난 강물에 돼지 축사가 잠겼다

 

그렇게 너하고

흘러가고 있다는 사실

 

모두가 될 수 있다는 건 아무도 아니라는 뜻이야 미래가 바라는 온전한 인간상이지

 

가상 현실이 모방하는 현실은 착취와 억압으로 이뤄져 있어

 

세상이 두려우세요?

 

나무 구멍 속에 똬리를 틀고

소년은

 

곰곰 생각하며

 

마른 가지에 눈동자 같은 싹이 트고

 

 

길 위의 시_최지인.jpg

 

최지인 시인

2013년 『세계의 문학』 신인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제10회 조영관 문학창작기금을 수혜하고 제40회 신동엽문학상을 수상했다. 시집 『나는 벽에 붙어 잤다』 『일 하고 일하고 사랑을 하고』 『당신의 죄는 내가 아닙니까』, 동인 시집 『한 줄도 너를 잊지 못했다』를 펴냈다. 창작동인 ‘뿔’과 창작집단 ‘unlook’에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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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카라

by 센터 posted Jul 03,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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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카라*

 

4500년 전의 문이 열리고 있어

죽은 자가 산 자를 방문하는 거지

 

해골을 보고 정중하게 

앗살라무 알라이쿰**

 

내 나이보다 4500살을 더 먹은

9살의 어린 주인 

 

죽음은 더 이상 나이를 먹지 않아도 되는 일

 

쾡한 두 눈으로 전하는 무언의 말들

무슨 인사를 하고 싶었던 걸까 

 

하고 싶은 말이 많을수록 

침묵의 무게는 무거워지지    

 

무릎 앞에 수북이 쌓이는 흙모래 

 

 

뼈만으로도 알 수 있다고 했어 

 

이 아이가 기뻤는지

아니면 슬펐는지 

그것도 아니면 어디가 아팠는지

어느 들판에서 뛰어 놀았는지

 

뼈에 사연만 있고

행복에 대한 기록은 없었어

그것은 슬픈 모래알

 

둥근 두개골 아래

크고 작은 어둠의 구멍들 

 

나의 앞날을 알고 있다는 듯이

깊은 눈이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지

 

* 이집트 나일강 연안에 있는 고분 마을  

** 아랍어로 ‘안녕하세요. 평화가 함께 하길’

 

황사라.jpg

 

 

 

 

 

 

 

 

 

 

 

 

 

 

 

 

 

황사라 시인 

2023년 전북일보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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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야 흘러 흘러 어디로 가니

by 센터 posted Apr 27,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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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날개와 지느러미를 달고

제일 높은 송전탑에 앉아 

평화를 외쳤다

 

용기를 버리고

고요하고 고요하게 

 

아주 작고 작은 일상들을 훔쳐 도망간 평화

내 안에 머물렀던 평화를 고발합니다

강물 같은 평화라 말하지 마라

바다 같은 평화라 말하지 마라

너의 더러운 유혹에 

나는 너에게 무릎을 꿇지 않을 거란다

 

내 안엔 우울한 비둘기 가족이 살고 있어 가족은 내 마음을 이리 옮기고 저리 옮겨가며 헤졌고 다니지 나는 간절하게 평화를 원했어 평화가 푸드득 날아왔지 그리고 나에게 용기라는 선물을 주었어 나는 용기를 가지고 사치스럽게 외면을 사들였지 외면이 풍족해지자 죄책감이 생겼어 죄책감이 싫어서 웅크려 자고 있던 죄책감을 업고 초록빛이 감도는 올리브 꽃이 핀 자리에 묻어 버렸지 꽃이 피는 나무에 꽃이 피지 않자 나무를 베어버렸어 헐거워진 향기들은 공중 바닥으로 토해내고 나뭇가지는 두꺼운 플라스틱이 되었지 썩지 않는 나무가 나를 지켜보는 것 같았어 나는 나무를 내 편으로 만들고 싶었지 절룩거리는 나무를 데리고 평화를 모집하는 학교로 갔어 꽃이 피면 아름다운 나무 평화가 열리는 나무라고 아이들에게 상냥한 목소리로 알려주었지 한 아이가 이 나무는 꽃이 피지 않는 가짜라고 외쳤어 아이 입을 틀어막고 나는 세상에서 가장 착한 예수처럼 미소 지었지 또 다른 아이가 외쳤어 착한 사람의 미소는 회색이 아니라고, 나의 평화를 깨버린 아이의 입속에서 파랑새가 빠져나와 내 등에 핀 회색 물고기 비늘을 찾아서 쪼아대고 날카로운 십자가로 쓱쓱 문질렀지 내 몸에서 검은 꽃물이 터졌어 도시로 흘러내린 검은 피, 도시는 온통 까만 비둘기들이 헤엄쳐 다니고 있어

 

지구는 온통 9시 뉴스입니다 

검사는 “사람이라면, 도시를 정상적으로 돌려놓으세요.” “아이들이 용서할 때까지 집 앞에

서 무릎을 꿇고 싹싹 비세요” 판사는 “당신은 자유입니까 민주입니까?” “당신은 사람이 될 자격이 없습니다” 변호사는 “자유와 민주를 믿고 평화를 원했다고 하세요. 그리고 무릎을 꿇고 당신의 평화를 증인으로 세우세요”

 

송전선에 흐르는 전류가 

내 몸에 탑을 쌓을 때 

나의 메아리는 죽었던 나와 

평화를 모집하는 학교로 흘러갑니다

 

[크기변환]한경숙.jpg 

한경숙 시인

2019년 《딩아돌하》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나는 다른 행성에 있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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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리사는 계속 모집되고

by 센터 posted Feb 27,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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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바닥에 온 지 7년쯤 됐을까

본점으로 지점으로 많은 동료들이 들어왔다

 

또 나가는 동안 지문이 사라져버렸다 

손에 물 닿고 불 닿고 하는 게 일이니 

 

손이 미끌거려 비닐을 펼칠 땐 검지에 물을 묻힌다

뭐든 묶어 냉동실에 쟁이는 게 일이다

 

코로나팬데믹이 절정일 땐 종일 서서 10시간을 비볐다 

화구의 매연과 전표와의 싸움은 묵은 때 청소로 대체된다

 

환갑을 앞두거나 지나거나 종이박스 위에 쭈그려 엎드려 

냉장고 안 성에를 깨는 여사님들 신세한탄을 듣자하면

 

십수 년 경력 다 소용없는 모두 최저시급 종사자로

나 같이 젊은 놈을 타박한다 자격증 따서 진급해라 

 

진급이란 평생 윗사람 뒤치다꺼리나 하는 일이니

턱 괴고 앉은 어린 점장 넋두리 또 듣노라면

 

쓸쓸한 뉴스를 보는 것 같아서 일이란 게 어차피

지문쯤은 없어도 될 서로 검지에 물이나 묻혀 하루를

 

때운다는 것이다 이 바닥이 그렇다는 것이다 

위에서 보면 그렇게 형편없다는 말씀

 

조회 때 종대로 모여 듣고 점심 때 횡대로 줄서 듣고

형편없는 반찬들 형편없는 살림들

 

누가 또 과일 좀 싸왔다고 둥글게 모여

시시콜콜한 뒷담화로 밥시간을 때운다

 

 

사본 -최명진.jpg

최명진 시인

2006년 리토피아 신인상 당선. 

시집으로 《슬픔의 불을 꺼야하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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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점 아래

by 센터 posted Dec 23,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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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방에 들어가는 것은 체온을 잃는 일이었다 시선이 닿는 

곳마다 살얼음이 끼었다 달력의 날짜들은 빙점 밑에서 동상을 

입었고 나는 그 방의 둘레를 상자라고 불렀다 언 뺨이 터지면 

불이 켜지는 어둠이었다 커튼 대신 쳐 놓은 런닝셔츠 사이에 

관을 그대로 세워 놓은 것 같은 냉장고가 있었다 빈 그릇들은 

더 차가워지고 있었다 그는 손을 떨었고 자주 주저앉았다 불을 

얼어붙게 만드는 둘레였다 없는 두부이고 숫자가 사라진 달력 

이었다 냉기가 차오르는 방이 사람 하나를 저장하고 있었다

 

 

 

최세라.jpg

최세라 시인

2011년 계간 《시와반시》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복화술사의 거리》, 《단 하나의 장면을 위해》, 《콜센터 유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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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화기록

by 센터 posted Oct 31,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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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뜨자마자 휴대전화의 통화 기록을 확인합니다

 

나의 배는 언제나 차가워서

분명 뜨겁지 않은 말들을 밤새

쏟았을 것입니다

 

소화되지 않는 언어들을

차마 시어로는 만들지 못하고

온몸이 가시로 가득 차지 않게

온몸이 꽁꽁 얼어

스치는 바람에도 부서지지 않도록

나를 지켜야 합니다

 

하지만 나는

누구에게 무슨 말을 했을까요

날이 선 말로 상처를 주진 않았을까요

 

휘청거리는 건물의 불빛을 등지고

누군가를 그리워하지 않게

배를 쓸며 집으로 가는 계단을 오릅니다

 

주름진 시간이 가득한 좁은 방에

조금은 따듯해진 배를 끌어안고 누워

오늘도 통화기록을 뒤집니다

 

안녕,

잘 지내고 있니.

 

발신이 금지된 휴대전화의 통화기록은

오래전 날짜에 멈춰있습니다

 

김진.jpg

김진 시인

2007년 《경남작가》 신인상으로 등단,

2019년 시집 《바다 고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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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라도 짖어보는 것이다

by 센터 posted Aug 29,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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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량리 산 중턱

빈집을 지키는 개 한 마리

목줄에 매여 있다

지난밤, 흩날렸던 참나무 이파리를 

잡초 무성한 마당에 던지며

비가 지나간 것인지

머리 젖은 개가 무너진 마루 밑에 엎드려있다

 

툇마루 삭아 귀퉁이마다 내려앉았고

가르랑거렸던 안방

바람벽은

흙이 털린 지 오래

햇살도 비껴간 곳

 

사그랑이 된 바구니는 굴러다니고

기스락물이 깍짓동에 떨어지고

잔잔해진 바람을 등지고

노루잠을 자던 개가 눈을 뜬다

돌담에 앉았던 산 그림자가

매가리 없이 컹컹 짖는 개 소리에 놀라

후딱 지나간다

 

밥그릇에 고인 물이

바람에 쓸려가는 것이 쓸쓸해서

개는, 그렇게라도 짖어보는 것이다 

 

[크기변환]박경희.jpg

박경희 시인

2001년 시안 신인상 수상, 제3회 조영관 창작기금 수혜. 

시집 《벚꽃 문신》, 《그늘을 걷어내던 사람》, 동시집 《도둑괭이 앞발 권법》, 산문집 《꽃 피는 것들은 죄다 년이여》, 《쌀 씻어서 밥 짓거라 했더니》, 《차라리 돈을 달랑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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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심

by 센터 posted Jun 27,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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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필심처럼 뭉툭한 철근을 한쪽 어깨에 인 사람

 

좀만 더 잘 휘어졌더라면

보다 높은 곳으로 도약할 수 있었을까

 

아시바에서 작업을 하다 건물 4층 높이에서 떨어진 인부

 

배는 터지기 직전까지 부풀어서 

엎어진 헬멧처럼 

언덕 하나를 만들어내고 

금세 빌딩만큼 높아진다

 

터지지는 않고 숨은 이내 꺼졌다

 

손에 쥔 만년필을 철근이라고 생각하겠습니다

언젠가 내가 사람들 앞에서 했던 말

 

미끌미끌한 종이에 기댄 만년필촉처럼

궂은일이라면 어떻게든 피해보려는 기질은

 

글을 쓰기로 마음먹으면서 생긴 것이다

 

나는 통유리에 비친 이와 나란히 걷는다

 

고층 빌딩에 매달린

낡은 옷가지가 만국기처럼 펄럭이는 

농성 현장은 작은 숨김에도 흩어져버리는

종잇조각처럼 보인다,

라고 메모장에 쓴다 

 

누가 죽어야만 잠깐 모이는 광장에서 

곧 끝난다는 사람들의 절망 예행연습은 

어느덧 진부한 생활로 자리를 잡고 

 

나의 눈망울은 그들이 

내려다본 점조직의 밤거리를 닮아간다

 

그 눈으로 본 세상엔 

건물의 밑바닥과 꼭대기를 잇댄 

투명한 철근이 있다 

 

온몸이 짓뭉개져 

숨을 헐떡이는 내가 있다

 

 

 

[크기변환][크기변환]문경수.jpg

문경수 시인

2019년 《내일을여는작가》로 등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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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의 시간

by 센터 posted Apr 25,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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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 달려온 기차가 서울역에 

도착하는 순간 어제가 오늘이 되어 

어둠 속에서 걸어 나왔다 

 

코로나바이러스가 들불처럼 번지고 

있다는 소식이 봄소식과 함께 전해왔다

 

무료급식소가 있었던 자리 

 

한 아버지가 말줄임표로 서 있다 

이틀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한 그림자도 함께 서 있다

 

무쇠 바퀴 굴러가는 

쇠 울음소리가 들리는 서울역

 

사금파리를 입에 문 그믐달이 오늘도 

염천교 다리 위에서 자가격리 중이다 

 

 

*제목은 이탈리아 루도비코 뒤 마르티노 감독의 영화 〈짐승의 시간〉에서 차용했다.

 

[크기변환]이권.jpg

이권 시인

전직 철도 노동자였으며 한국작가회의 회원이다. 민예총 회원으로도 활동 중이다. 

시집으로 《아버지의 마술》과 《꽃꿈을 꾸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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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맛

by 센터 posted Feb 24,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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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에서 불쑥 손을 내밀었을 때

하마터면 악수를 할 뻔 했다

 

지금 우리는 낯선데

내게 손을 내미는 저의는 무엇인가

 

거절에 대해서 생각한다

뒷맛을 남기는 씁쓸한 손들에 대해

 

일치한 적 없는 손금 때문에

아귀가 맞지 않던 생각의 틈들

 

앞뒤 잴 것 없이 먼저 흔들고 온 날은

기분이 명랑해질 때도 있었다

 

정산할 수 있다면 몸을 숙이며

손잡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출구에서 알았다

 

허리를 꼿꼿이 펴고 내민 빳빳한 지폐가

차단기를 들어 올린다

 

[크기변환]권상진.jpg

권상진 시인

2013년 전태일문학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눈물 이후》 합동시집 《시골시인-K》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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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어카를 구원하라

by 센터 posted Dec 23,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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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행과 헤어져 혼자 걸었다

영등포역 근처에서

복이 많아 보인다며 한 여자가 따라붙었다

빨리 걸으니 더 이상 따라오지 않았다

얼마 못 가서

행주에 아파트 분양 전단지를 끼워서 주는 여자를 만났다

행주 때문에 받았다

신호등이 없는 건널목 앞에서는

예수님 믿고 구원받으라는 남자를 만났다

눈을 맞추기도 전에

다른 사람한테 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주위를 살피며 건널목을 다 건넜을 때

뒤에서 비켜달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리어카를 끌고 오는 노인이었다

클랙슨 소리가 리어카 옆구리를 물어뜯고 있었다

복도 행주도 아파트 분양 전단지도 예수도 없었다, 리어카에는

빈 박스만 가득 실려 있었다

 

[크기변환]사본 -이장근.jpg

이장근 시인

200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시) 

2010년 제8회 푸른문학상 ‘새로운 시인상’(동시)으로 등단했다.

동시집 《바다는 왜 바다일까?》, 《칠판 볶음밥》

청소년시집 《악어에게 물린 날》, 《나는 지금 꽃이다》, 《파울볼은 없다》, 《불불 뿔》 

시집 《꿘투》, 《당신은 마술을 보여달라고 한다》, 그림책 《아기 그리기 ㄱㄴㄷ》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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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름의 노래

by 센터 posted Oct 27,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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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만 장의 웃음이 찍힌

봄이 되고 여름이 되면

몇 가지 작물이 자라고

가을걷이로 햇빛에 그을려도

접었다 펴면

한번쯤 하얗게 화장발을 곧추 세울 것 같은 너른 밭

 

어머니가 밭에서 김을 매고 있다

주름에서 떨어지는 땀

마을을 떠난 나는 주름에서 튀어 나간 것

자식들 다 빠져나가 점점 줄어드는 어머니의 부피

갈수록 비어지는 내부가 쭈굴쭈굴 해 진다

 

접혀져 있는 시간들이 펴질 것 같지 않은 

갈아 놓은 밭이랑 사이

주름의 긴 고랑이 여름을 지난다

연금술처럼 무엇이든 만들어 내는 어머니의 주름

주름위에서 자라는 것들

뛰어 놀던 발자국 문양 튕겨 나간 부분이 진하게 남아 있다

한번쯤 뽀얗게 화장시키면

수분을 받은 흙들이 쫙쫙 펴질 것 같은

 

어머니 주름진 얼굴에 화장 하고

도시의 딸집 간다

겨울에 펄럭펄럭 날리는 하얀 비닐처럼

쩍쩍 일어나는 화장기

주름진 부분만 고요하다

 

여름과 가을을 지난

밭이 주름에 잠겨있다

 

[크기변환]이지호.jpg

이지호 시인

2011년 제11회 창비신인 시인상 수상으로 등단했다.

시집 《말끝에 매달린 심장》, 《색색의 알약들을 모아 저울에 올려놓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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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범

by 센터 posted Aug 25,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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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착 이불 속으로

사라진 막내는

숨을 견디는 걸까

 

이불을 당기면

젖은 머리로

악몽을 쥔 사람처럼

숨을 몰아쉰다

 

나는 이불을 훔치고

엄마는 악몽을 태운다

끊어지지 않는

검은 연기를 쫓는다

 

벗어날 수 없는 어둠은 결속일까

 

별이 묻힌다 

별들의 무덤일까 생각한다 

생각 좀 그만할 수 없니,

 

생각을 빼앗길 수 있다  

 

 

 

[크기변환]김미소.jpg

김미소 시인

1989년 충남 서산에서 태어나 2019년 《시인수첩》으로 등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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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 그럼에도

by 센터 posted Jun 23,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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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늦기 전에

꽃 보러 가자 했더니

 

그 꽃 지면

다른 꽃 핀다고 했다

 

다시는 못 만날 인연일까봐

마음이 아팠다

 

텅 빈 귀를 열어둔 채  

지나간 봄, 

꽃무덤이 가득했다

 

흔들리는 것들은

흔들린 곳에서 

마음을 다 쏟고 말았나

 

붉은 꽃물이 흐르는 길 위에서

나는 또 하루를 더 살고

너에게서 하루 더 멀어진다 

 

박주하.jpg

박주하 시인

경남 합천에서 태어나 1996년 《불교문예》로 등단했다. 

시집 《항생제를 먹은 오후》 《숨은 연못》 《없는 꿈을 꾸지 않으려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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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너지 못하는 인사

by 센터 posted Apr 26,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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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줌씩 익힌 규칙이

어느 날 한 번도 꿈꾸지 않았던 내가 되었을 때

 

조금만 더 힘을 내서 뭉개졌어야 했어

 

뭉개진 것이 나인지 세상인지 구별할 수 없어서

하천을 따라 한강에 가듯이

 

한강에 도착해서 노을이 질 때까지

강물을 접는 리버 한을 부르듯이

 

내가 나에게 당신 언제 왔어?

힘이 빠진 인사를 건네듯이

 

봄이 어디에서 오는지 모르지만

봄이 도착해서 펼쳐놓고 있는 꽃들이

이름을 떨어뜨리며 시들어갈 때까지

 

봄은 온다

 

하지만 헤어질 때 하는 인사에는

이별이 스며들지 않는다

 

이상해 달라진 게 없는데

어느 날 너무 편한 생활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작은 일 하나도 해결하지 못할 때 찾아오는

두려움과 공포

 

반복이 되면 두려움과 공포는 사라진 것 같기도 해

 

내가 꿈꾸던 생활이 너무 시시한 것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 같아

나 아마도 시시하게 살다 죽을 것 같아

 

너는 잘 지내고 있니? 내가 나에게 건넨 인사가 되돌아올까

급하게 다시 걷기 시작했어

 

[크기변환][크기변환]안주철.jpg안주철 시인

2002년 《창작과 비평》으로 등단했다. 시집 《다음 생에 할 일들》 《불안할 때만 나는 살아 있다》 《느낌은 멈추지 않는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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흘역吃逆

by 센터 posted Feb 26,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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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만날 때마다 비가 오네

당신의 말이 도시 틈새로 스며들어 비구름을 만들었다

 

붉은 육개장 국물을 삼키는데

왜 하필 고사리가 왜 하필 토란대가

비 오는 날은 억울한 일 천지 

 

우기도 아닌데 비는 계속 내린다 저녁에도 새벽에도

설거지통에 밀린 그릇들이 쌀통의 벌레들이

스멀스멀 빗방울처럼 기어나와

뒤통수가 가렵다

 

온몸이 물로 꽉 찬 다육식물처럼

시치미 뚝 떼고 살아가는 게 생이란다,

꿈에 목소리를 들은 것도 같다

 

다시 쌀을 씻어 안친다 

고등어를 구워도 가시를 삼켜도 딸꾹질이 

 

그치지 않는다

 

김은경.png

김은경 시인

2000년 실천문학 신인상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불량 젤리》, 《우리는 매일 헤어지는 중입니다》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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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기의 나라

by 센터 posted Oct 22,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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꿀처럼 비가 흐를 때

사람들이 손등에 떨어진 빗방울을

핥고 서로에게 키스하던

때, 덩굴풀이 무성하게

담장을 허물던 날들에


빗방울을 모아 접시에 두고

여름의 짧은 밤을

춤추며 보내던 시절에


비를 말려 얻은 색으로

연인의 이마에

혈관의 무늬를 탁본하던 꿈결에


잡아먹힌 빛들이 흐르고

어둡다 여전히 비는 가볍게

빛나며 나는데


목덜미의 흰빛을 물고 비가 툭,


사라지는 비

깔깔 웃으며 가버리는 비


사람 잡아먹는 비에 홀렸대

소중한 걸 묻어둔 곳을 찾지 못해서

맹렬하게 건조한 우기를

그저 견디고만 있는 거래


범람하지 않는 비를 골몰한다

눈이 타버릴 때까지

좋았던 날의 돌을 움켜쥐고


때가 오면 내리칠 것이다


또 한 명이 쓰러진다 어스름이 짙어진다


기도를 잊고 텅 빌 것이다


이 나라의 사람들은 주마등 속에 산다

비가 속살거리는 옛 기억에 들려서

웃지도 울지도 않고

자지도 먹지도 않고


또 한 명이 쓰러진다 비가 툭,

주검의 관절마다 비가 툭,


빗방울만 환한 나라에서

비에 갇힌 꿈의 군락에서


오로지 비만,

사랑스럽다


이용임.jpg 이용임 시인

2007년 한국일보 시 부문 당선. 시집 《안개주의보》 《시는 휴일도 없이》, 산문집 《당신을 기억하는 슬픈 버릇이 있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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