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

by 센터 posted Apr 23,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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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1.jpg

 

 

밀양밀양 하고 입안에 되뇌기만 해도

미량미량 부드러운 햇살이 온몸을 소곤소곤 감싸던 밀양 간다

언제였더라, 영남루에 올라

강에서 불어오는 바람에게도 부러워했던 

그런 진한 풍경을 더듬으며 밀양 간다

동그랗게 동그랗게 서로 몸을 의지하며

정겹게 흐르는 밀양강
 
그런 강 같은 따뜻한 사람들이 사는 밀양 간다

76만 5천 볼트를 실어 나르는 송전탑이 날벼락처럼 떨어지고부터

밀양강으로 햇살이 떼로 몰려왔다

흔적 없이 사라진 자리마다 

무성한 소문들만 둥둥 떠다닌다는 밀양에 간다

밀주교를 지나 남천교를 빠져나가면서도

내 기억의 눈부셨던 햇살은 그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는

밀양, 지난여름 가혹한 시간을 견디느라

산이며 들이며 강이 만신창이가 되고 있는 밀양

나 오늘 밀양 간다

 

글|시인 최상해


말의 힘

by 센터 posted Aug 24,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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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에 닿아 반짝이는 칼끝 마주치면
반짝이는 그 칼끝 닮고 싶었다

미풍에 부드럽게 떠는 깃털 발견하면
부드러운 그 깃털 닮고 싶었다

자주 
손과 발이 차디찼다 몸의 온기
칼끝과 깃털에 온통 빼앗긴 것처럼
마음이 텅 비었다 약탈하도록 
칼끝 햇빛과 깃털을 건드리고 간 바람에게
빗장을 열어둔 것처럼

나 아닌 것을 닮으려고 했다
나 아닌 것이라면 
대체로 아름답고 부드럽다고 여겨져

온기도 영혼도 없던 나에게도
아름답다고 얘기해 준 이가 있었으나
그 말을 믿지 못했다 

오래도록

여전히 손발이 차가워질 때가 있지만
이제는 손발이 차가워질 때면 스스로에게 
크게 소리 내어 

아름답다고 말해준다

이진희.jpg 이진희 시인
2006년 계간 《문학수첩》으로 등단. 시집으로 《실비아 수수께끼》, 《페이크》가 있다.

마네킹의 오장육부

by 센터 posted Jul 03,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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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모니카 소리가 이상하다
곡은 없고 숨소리만 있다
도레인지 미파인지 
불고 들이마시는 소리에 뒤돌아보니
맹인이 아니다
두 눈 멀쩡하게 뜨고
바구니를 들고 있다
멀쩡함이 멀쩡함에게 구걸하는 증상
속이 곯은 거다
외상 없는 내상
전화번호부 같은 것으로 맞았을까
모르는 사람에게 암보험 상담 전화를 걸던 그녀는
말기암이었다
그 지경이 되도록 몰랐던 건
그녀의 오장육부가 위(胃)밖에 없었기 때문
배고픔이 모든 장기를 집어삼켰기 때문
합법적인 보이스피싱이라며
아는 사람에겐 권하지 않는다는 
일말의 양심이 악성종양이었을까
수술대에 오르기도 전에
그녀는 제거됐다
집도의는 그녀를 뽑은 사람이었다
회사는 멀쩡했다


이장근.jpg
이장근 시인
1971년 경북 의성 출생.
200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시), 2010년 제8회 푸른문학상 새로운 시인상(동시)으로 등단.
시집《꿘투》, 동시집《바다는 왜 바다일까?》 《칠판 볶음밥》, 청소년 시집 《악어에게 물린 날》 《나는 지금 꽃이다》,
《파울볼은 없다》 등

리어카의 무게

by 센터 posted Apr 28,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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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어카 바퀴가 주저앉았다
켜켜이 쌓인 주름살 같은 상자가
안간힘을 다해 도로 한복판에서 벗어나려 한다
늘 벗어나려 했던 것들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던 바퀴의 그늘
끌어도 끌어지지 않는 상자의 무게로
길바닥에 주저앉아 한나절 그늘을 받아낸다
푹 수그리고 앉았던 자리에
늙은 그림자는 꼼짝을 하지 않는데
홑겹의 낡은 옷이 휘청거리며
거리를 밀고 간다
묵묵히 바닥만 내려다보던
늙은 그림자가
스러지지 않고 어제도 오늘도
그 자리에 앉아 있다




박경희 시인.jpg

박경희|1974년 충남 보령 출생.
2001년 시안 신인상 수상. 제 3회 조영관 창작기금 수혜.
시집 《벚꽃 문신》, 동시집 《도둑괭이 앞발 권법》,

산문집 《꽃 피는 것들은 죄다 년이여》,

《쌀 씻어서 밥 짓거라 했더니》가 있음.


리어카를 구원하라

by 센터 posted Dec 23,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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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행과 헤어져 혼자 걸었다

영등포역 근처에서

복이 많아 보인다며 한 여자가 따라붙었다

빨리 걸으니 더 이상 따라오지 않았다

얼마 못 가서

행주에 아파트 분양 전단지를 끼워서 주는 여자를 만났다

행주 때문에 받았다

신호등이 없는 건널목 앞에서는

예수님 믿고 구원받으라는 남자를 만났다

눈을 맞추기도 전에

다른 사람한테 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주위를 살피며 건널목을 다 건넜을 때

뒤에서 비켜달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리어카를 끌고 오는 노인이었다

클랙슨 소리가 리어카 옆구리를 물어뜯고 있었다

복도 행주도 아파트 분양 전단지도 예수도 없었다, 리어카에는

빈 박스만 가득 실려 있었다

 

[크기변환]사본 -이장근.jpg

이장근 시인

200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시) 

2010년 제8회 푸른문학상 ‘새로운 시인상’(동시)으로 등단했다.

동시집 《바다는 왜 바다일까?》, 《칠판 볶음밥》

청소년시집 《악어에게 물린 날》, 《나는 지금 꽃이다》, 《파울볼은 없다》, 《불불 뿔》 

시집 《꿘투》, 《당신은 마술을 보여달라고 한다》, 그림책 《아기 그리기 ㄱㄴㄷ》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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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어

by 센터 posted Sep 11,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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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나라면 어땠을 거 같아?

 

소년이 철로를 베고 잠이 들었다

 

모 시사 프로그램 진행자는 초저가 제품의 시대가 끝나가는 것이 씁쓸하다고 했다 어떤 노동자가 적은 임금으로 일해야 하는가 부는 어디서 오는가

 

현실의 문제

인간성 회복

 

통학 버스 창가에 앉아 거리를 걷는 한 소년을 바라보았다

 

나는 힘이 없어요 내 손을 놓으세요

 

그 애는 암 병동에서 일했다 어제 돌봤던 이가 오늘 떠났는데 아무렇지 않다고 했다 어쩜 그럴 수 있니 토요일에는 사람들이 죽은 거리를 걸었다 산 사람은 살아야지 그 말이 싫었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죽음 타령을 했다 이제 그만해 불어난 강물에 돼지 축사가 잠겼다

 

그렇게 너하고

흘러가고 있다는 사실

 

모두가 될 수 있다는 건 아무도 아니라는 뜻이야 미래가 바라는 온전한 인간상이지

 

가상 현실이 모방하는 현실은 착취와 억압으로 이뤄져 있어

 

세상이 두려우세요?

 

나무 구멍 속에 똬리를 틀고

소년은

 

곰곰 생각하며

 

마른 가지에 눈동자 같은 싹이 트고

 

 

길 위의 시_최지인.jpg

 

최지인 시인

2013년 『세계의 문학』 신인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제10회 조영관 문학창작기금을 수혜하고 제40회 신동엽문학상을 수상했다. 시집 『나는 벽에 붙어 잤다』 『일 하고 일하고 사랑을 하고』 『당신의 죄는 내가 아닙니까』, 동인 시집 『한 줄도 너를 잊지 못했다』를 펴냈다. 창작동인 ‘뿔’과 창작집단 ‘unlook’에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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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맛

by 센터 posted Feb 24,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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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에서 불쑥 손을 내밀었을 때

하마터면 악수를 할 뻔 했다

 

지금 우리는 낯선데

내게 손을 내미는 저의는 무엇인가

 

거절에 대해서 생각한다

뒷맛을 남기는 씁쓸한 손들에 대해

 

일치한 적 없는 손금 때문에

아귀가 맞지 않던 생각의 틈들

 

앞뒤 잴 것 없이 먼저 흔들고 온 날은

기분이 명랑해질 때도 있었다

 

정산할 수 있다면 몸을 숙이며

손잡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출구에서 알았다

 

허리를 꼿꼿이 펴고 내민 빳빳한 지폐가

차단기를 들어 올린다

 

[크기변환]권상진.jpg

권상진 시인

2013년 전태일문학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눈물 이후》 합동시집 《시골시인-K》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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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유통기간은 언제까지입니까?

by 센터 posted Oct 30,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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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유통기간이 끝나가는 동안 
거미줄같이 엉킨 골목을 걸으며 한숨을 쉬는 일
매일 다른 구인 전단지를 붙이는 일
안도의 시간을 타고 집으로 가는 일
그런 일들이 고요하게 흘러갔다  

밀폐된 시간 속에서 눈을 감으면 보이는 얼굴들이 있다 전단지 위에 덧붙여진 또 다른 전단지처럼 겹겹이 쌓이는 얼굴들 고향에 가서 감나무를 심자고 했던 이제는 떠나간 유통기간이 지난 얼굴들
얼굴들이 떠나도 새로운 날짜를 새긴 얼굴들이 금방 자리를 채웠다 몸이 익숙해지기도 전에 얼굴들은 나가고 들어왔다 모두가 흔들리는 외줄 위에서 한발 한발 내딛으며 하루를 열고 닫았다 

나의 기간도 연장전이 끝난 경기처럼 언제 울릴지 모를 호루라기 소리를 기다리며 고요하게 흐르는 일 속에서 채워져 간다  

또 하나의 얼굴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당신의 유통기간은 언제까지입니까?



김진.jpg
김진
한국작가회의 회원. 
경남작가회의 회원. 
2007 경남작가 신인상.

너무 늦지 않기로 해요

by 센터 posted Feb 27,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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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이 시인

두통 없는 하루가 지나가요
멀미 나지 않는 하루가 저물어요
몸살 없이 무사한 오늘이에요

오늘이 지나면 내일이라 믿었어요
오늘이 지나도 내일은 아니었어요
오늘 하루만큼 죽어간 나의 오늘이었어요
나를 죽이면서 날름 삼킨 오늘이에요

농담이라고 하니 몸살이 났어요
별것도 아닌데 예민해서 더 예민해졌어요
오늘이 잘릴까 봐 두려웠어요

나 없는 나의 하루하루 일상이에요
야금야금 파먹는 미세먼지처럼 달라붙었어요

억누르고 침묵했던 오늘이 길이 되었어요
냄새 난다고 버리지 못하게 한 생리대를 다시 가방에 쌌어요 
거식과 폭식이 앞뒤로 치고받으며 슬픔을 외면해요
수행하듯 삭였던 침묵은 진짜 인형이 되었어요
오늘이 쌓은 그 인형의 길을 소리 없이 뒤따르고 있어요
그래요 중독된 날들이에요

나를 찾아오는 기억이 너무 늦지 않기로 해요
나는 지하방 너머 어슴푸레한 달빛처럼 희미해지고 있어요

-------------------------------------------------------------------------------------------------
* 김사이 시인_2002년 계간 《시평》으로 등단. 시집으로 《반성하다 그만둔 날》, 《나는 아무것도 안하고 있다고 한다》가 있음.

낮게 허밍으로

by 센터 posted Dec 01,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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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게 허밍으로

 

고명자

 

먼 들판으로 넘어진 포플러나무

뿌리째 뽑혀 말라 가며 앓는 시늉을 해

어찌나 가만히 살랑이던지

더러는 진짜 죽고

더러는 새잎이 돋고

 

노래가 새어 나와

죽은 뿌리에서 병든 기억이 흘러나와

흉흉한 소문이 흥얼흥얼 흘러나와

그래서 집 안에는 포플러를 심으려 하지 않나 봐

 

사람의 목소리가 아닐 거야, 아닐 거야

열여덟 시름도 다 풀려 버렸지

누가 나무에 들어앉아 날 불러낸다고

포플러 잎사귀를 타고 꼭대기까지 오르려 했어

 

음악대학과 봉제공장 갈림길에

포플러 잎사귀의 정령들

내 손목 끌어당기네

저 많은 실밥들 언제 다 따내라고

푸른 정령들은 손뼉 치며 노래하며 따라오라 하고

나는 목젖 다 내놓고 울기만 하고

 

어느 날 문틈으로 보니 그때의 포플러들이 나를 찾으러 들판을 걸어가고 있는 거야

 

음악대학 담벼락을 돌고, 돌고, 돌고

내가 부른 노래는 노래라 말해질 수 없어

일손을 놔버리고 나무에 기대앉아 석 달 열흘 흘러가 본 적 있어

포플러는 까마득히 넓어지고 높아지고 멀어지다

내 손아귀를 벗어나 버렸어

 

길 위의 시_고명자.jpg

 

 

고명자 프로필

2005년 문예지 시와 정신 등단

시집 술병들의 묘지』, 『그 밖은 참, 심심한 봄날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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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로하는 엄마 노동하는 삼촌

by 센터 posted Oct 30,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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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촌은 근로자의 날이라서 쉬고
엄마는 노동자의 날이라서 쉬고


삼촌은 회사 안 가서 좋다고 하고
엄마는 회사 잘릴 것 같다고 하고


삼촌은 굴뚝이 있었다는 옛날 목욕탕 이야기를 하고
엄마는 굴뚝에 여전히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삼촌은 누나 일 아니니까 그런 일에 신경 쓰지 말라 하고
엄마는 내 일 될 수 있으니까 관심 가져야 한다고 하고


난 5월 1일이 근로자의 날이나 노동자의 날이나 상관없다
엄마나 삼촌이나 저런 소리 안 하고
삼촌이나 엄마나 잘릴 걱정 없이
편안히 쉬는 날이었으면 좋겠다


시끄러워 죽겠다


유현아.jpg 유현아 시인

2006년 제15회 ‘전태일문학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 시작.
시집으로 《아무나 회사원, 그밖에 여러분》이 있다.



그리고 나는 저녁이 될 때까지 계속 걸었다

by 센터 posted Mar 14,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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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드라이어 소리에 아버지가 깨셨다 출근하니? 뜨거운 바람에 머리카락이 바싹 말랐다 오늘도 늦을 거 같아요 가는 내내 뒤를 돌아봤다 나는 반대편 출구로 나와서 골목을 쏘다녔다


아버지는 가양동 현장에서 일하셨다 오함마로 벽을 부수는 일 따위를 하셨다 그런 일 같은 건 늘 바닥을 보는 거나 마찬가지 세상에는 벽이 많았고 아버지는 쉴 틈이 없었다


아버지께 당신의 귀가 시간을 여쭤본 이유는 날이 추워진 탓이었다 골목은 언젠가 막다른 길로 이어졌고 나는 아버지보다 늦어야 했다 아버지는 내가 얼마나 버는지 궁금해 하셨다


배를 곯다 집에 들어가 현관문을 보며 밥을 먹었다 어쩐 일이니? 라고 물으시면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외근이라고 말씀드리면 믿으실까? 거짓말은 아니니까 나는 체하지 않도록 누런 밥알을 오래 씹었다


최지인.jpg 최지인 2013년 《세계의 문학》 신인상으로 등단.




그렇게라도 짖어보는 것이다

by 센터 posted Aug 29,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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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량리 산 중턱

빈집을 지키는 개 한 마리

목줄에 매여 있다

지난밤, 흩날렸던 참나무 이파리를 

잡초 무성한 마당에 던지며

비가 지나간 것인지

머리 젖은 개가 무너진 마루 밑에 엎드려있다

 

툇마루 삭아 귀퉁이마다 내려앉았고

가르랑거렸던 안방

바람벽은

흙이 털린 지 오래

햇살도 비껴간 곳

 

사그랑이 된 바구니는 굴러다니고

기스락물이 깍짓동에 떨어지고

잔잔해진 바람을 등지고

노루잠을 자던 개가 눈을 뜬다

돌담에 앉았던 산 그림자가

매가리 없이 컹컹 짖는 개 소리에 놀라

후딱 지나간다

 

밥그릇에 고인 물이

바람에 쓸려가는 것이 쓸쓸해서

개는, 그렇게라도 짖어보는 것이다 

 

[크기변환]박경희.jpg

박경희 시인

2001년 시안 신인상 수상, 제3회 조영관 창작기금 수혜. 

시집 《벚꽃 문신》, 《그늘을 걷어내던 사람》, 동시집 《도둑괭이 앞발 권법》, 산문집 《꽃 피는 것들은 죄다 년이여》, 《쌀 씻어서 밥 짓거라 했더니》, 《차라리 돈을 달랑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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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뚝

by 센터 posted Apr 26,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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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업이 시작되고 몇 명은 굴뚝으로 올라가고 
굴뚝 위에서는 모든 것이 훤히 보이지요
굴뚝 위에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당신이 없다면 우리 모두 흩어져 울었을 거예요
파업을 지지하러 몰려온 사람들도 
이제 지쳤어, 안 되겠어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도 
누군가를 기다리며 자기만의 굴뚝에서 연기를 피우는 사람
굴뚝 속이라도 들어가 손바닥을 쬐고 싶은 사람도
내려오면 안 돼요 끝까지 버텨 보세요
얼어붙은 눈물 목걸이를 목에 걸어주는 사람도
내려오라 목이 쉬어 소리 지르는 가족들도
굴뚝에서 내려오기 전까지는 모든 것이 보이지요
하얀 구름을 찍어내는 굴뚝도 이젠 좀 쉬어야지
모두가 굴뚝 주변에서 뭉게뭉게 이야기를 피울 때
이야기가 사방으로 흩어져 구름이 될 때
지나가던 구름이 굴뚝 위에서 쉬다 
근심 많은 사람들 이마 위로 쏟아질 때
드디어 굴뚝에서 연기가 멈추고 공장도 지쳐 쓰러졌어
이제 모두 집으로 돌아가 밀린 잠을 자야지
언제 우리가 굴뚝 위로 올라왔지 
굴뚝 위의 사람들은 언제 내려가야 하는지 모르고
내려가야 할 사다리마저 치워지면
굴뚝 위의 사람이 종일 뱉어내는 한숨으로 안개가 끼고
지상의 인간들은 가끔 이야기 한다
모든 것이 보이지 않아 눈이 멀어버렸나봐
굴뚝 위로 올라간 사람들은 먼 곳을 보며 노래하네 
파업이 시작되고 몇 명은 굴뚝으로 올라가고

김성규.jpg

김성규 시인
200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등단. 시집 《너는 잘못 날아왔다》, 《천국은 언제쯤 망가진 자들을 수거해가나》가 있다.

공장 빙하기

by 센터 posted Aug 28,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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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나무 한 그루 심어야겠네
공장 정문에다 심어야겠네
공장이 화석이 되어 지구 곳곳에서 발견될 때
새파랗게 잎을 틔우고 열매를 맺어
여기가 공장이 있던 자리라고 유일하게 증명해줄
은행나무 한 그루 심어야겠네
이 빙하기(氷河期)를 견디고 견뎌 
지구의 역사가 되는
버림받은 노동자들 가슴을 심어야겠네
은행나무 한 그루 심어야겠네
공장 정문에다 심어야겠네


표성배 시인
경남 의령에서 태어나 1995년 제 6회 ‘마창노련문학상’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아침 햇살이 그립다》, 《저 겨울산 너머에는》, 《개나리 꽃눈》, 《공장은 안녕하다》, 《기계라도 따뜻하게》, 《기찬 날》, 《은근히 즐거운》 등이 있고, 시산문집으로 《미안하다》가 있다.

공장

by 센터 posted Jan 02,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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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는 감귤밭에서 일하다 손가락 하나를 잃었지요 하지만 울지는 않았어요 작은언니 중학교 졸업식날 우리 집에서 가장 먼저 중학교를 졸업한 사람이구나, 말하며 울었지만요 
  아버지는 내일도 다시 입을 작업복을 공장에 걸라고 하셨지요 새 옷과 겹치지 말아야 하는 먼지 묻은 옷이 걸려 있던, 공장은 벽에 못 하나를 박아 만든 아버지 혼자만의 장롱이었지요

  바람이 지나가는 구멍을 가진 제주 돌담은 태풍에도 무너지지 않아요 하지만 우리들은 허기진 구멍을 가지고 있어요 굶주리면 흙이라도 풀이라도 입 속에 넣어야지요 허기처럼 쉽게 사라지는 우리들은 새 달력에 죽음을 먼저 기록하지요

  새 달력을 앞에 두고 투명한 못 두 개를 박습니다 새 달력에 나의 공장이 두 개, 심장처럼 두 개, 심장에 박힌 못에 걸어 둘 민호와 고래,

  민호는 음료수 공장에서 사라진 학생, 태평양 고래들도 해파리 대신 비닐을 삼키며 사라져 갑니다 무릎을 꿇고 투명한 못 두 개를 박습니다 열아홉 민호는 젊기도 전에 사라졌고, 문자를 읽을 수 없는 고래들도 텅 빈 뱃속 채우다 사라져 갑니다 

  민호가 없는 텅 빈 하루를, 허기로 가득 찬 고래 배를, 손가락 하나 없는 손으로 단추를 채워 나갔을 아버지는 몇 번이나 울었을까요 이제 우리는 다시 새 달력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두 개의 울음을 공장에 겁니다 

  새 달력에는 이미 무릎을 꿇고 박은 투명한 두 개의 못이 박혀 있으니까요


*선반 같은 것이 없는 작은 벽에 못을 박아 옷을 걸어두게 한 자리를 제주에서 나고 자란      아버지는 공장이라 불렀다. 그것은 허공에 둔 장롱이라는 뜻일지도 모른다.

김신숙.jpg 김신숙 시인
2012년 《제주작가》, 2015년 《발견》으로 등단. 시집 《우리는 한쪽 밤에서 잠을 자고》 발간.

공범

by 센터 posted Aug 25,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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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착 이불 속으로

사라진 막내는

숨을 견디는 걸까

 

이불을 당기면

젖은 머리로

악몽을 쥔 사람처럼

숨을 몰아쉰다

 

나는 이불을 훔치고

엄마는 악몽을 태운다

끊어지지 않는

검은 연기를 쫓는다

 

벗어날 수 없는 어둠은 결속일까

 

별이 묻힌다 

별들의 무덤일까 생각한다 

생각 좀 그만할 수 없니,

 

생각을 빼앗길 수 있다  

 

 

 

[크기변환]김미소.jpg

김미소 시인

1989년 충남 서산에서 태어나 2019년 《시인수첩》으로 등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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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너지 못하는 인사

by 센터 posted Apr 26,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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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줌씩 익힌 규칙이

어느 날 한 번도 꿈꾸지 않았던 내가 되었을 때

 

조금만 더 힘을 내서 뭉개졌어야 했어

 

뭉개진 것이 나인지 세상인지 구별할 수 없어서

하천을 따라 한강에 가듯이

 

한강에 도착해서 노을이 질 때까지

강물을 접는 리버 한을 부르듯이

 

내가 나에게 당신 언제 왔어?

힘이 빠진 인사를 건네듯이

 

봄이 어디에서 오는지 모르지만

봄이 도착해서 펼쳐놓고 있는 꽃들이

이름을 떨어뜨리며 시들어갈 때까지

 

봄은 온다

 

하지만 헤어질 때 하는 인사에는

이별이 스며들지 않는다

 

이상해 달라진 게 없는데

어느 날 너무 편한 생활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작은 일 하나도 해결하지 못할 때 찾아오는

두려움과 공포

 

반복이 되면 두려움과 공포는 사라진 것 같기도 해

 

내가 꿈꾸던 생활이 너무 시시한 것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 같아

나 아마도 시시하게 살다 죽을 것 같아

 

너는 잘 지내고 있니? 내가 나에게 건넨 인사가 되돌아올까

급하게 다시 걷기 시작했어

 

[크기변환][크기변환]안주철.jpg안주철 시인

2002년 《창작과 비평》으로 등단했다. 시집 《다음 생에 할 일들》 《불안할 때만 나는 살아 있다》 《느낌은 멈추지 않는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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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의 판타지

by 센터 posted Dec 27,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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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책 없던 아버지는 판타지를 꿈꿨다
상상력을 사줄 수호신을 기다렸다, 다만 집에서


엄마가 공장으로 일하러 나간 사이 하나뿐인 방을 판타지 소굴로 만들었다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부르고 방바닥에 배를 깔고 슬금슬금 시를 썼다
나는 그런 아버지의 낭만이 싫었다 하나뿐이었던 방도 싫었고 하나뿐이었던 마루도 싫었고 없는 사람처럼 일만 한 하나뿐인 엄마도 싫었다


나풀나풀 가벼운 아버지는 집밖으로 나가는 일이 거의 없었다 나가면 돈 나간다고 돈은 들어오게 해야 한다는 알 수 없는 신념에 가득 차 있었는데 1년 중 하루는 정성스레 양복을 다려 입고 밖으로 나가 저녁에 들어왔다 한 손엔 작은 비닐봉지가 들려있었는데 소고기 반근과 미역 한 움큼이었다 철야하는 어머니를 기다리는 동안 아버지는 쌀을 안치고 소고기 미역국을 끓였다 나는 그때가 가장판타지적인 공간에 있었다고 기억한다


철야를 하고 온 어머니는 하루도 빠짐없이 아버지를 욕했는데 1년의 그 하루만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밥상 위 소고기 미역국에 밥을 말아 코 박고 먹기만 했다
아버지는 옆에서 기타를 쳤고 나는 쌀밥의 냄새와 소고기 미역국의 향긋함에 미움이 사라지는 하루였다


팔순의 아버지는 여전히 일 년 중 하루는 소고기 반근과 미역을 샀으며

팔순의 어머니는 여전히 아버지 원망을 1년 중 단 하루만 빼고 주구장창 한다
아마,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 하루의 판타지를 50년 째 기억하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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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현아 시인
2006년 제15회 전태일문학상 수상
시집으로 《아무나 회사원 그밖에 여러분》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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