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촌은 근로자의 날이라서 쉬고
엄마는 노동자의 날이라서 쉬고
삼촌은 회사 안 가서 좋다고 하고
엄마는 회사 잘릴 것 같다고 하고
삼촌은 굴뚝이 있었다는 옛날 목욕탕 이야기를 하고
엄마는 굴뚝에 여전히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삼촌은 누나 일 아니니까 그런 일에 신경 쓰지 말라 하고
엄마는 내 일 될 수 있으니까 관심 가져야 한다고 하고
난 5월 1일이 근로자의 날이나 노동자의 날이나 상관없다
엄마나 삼촌이나 저런 소리 안 하고
삼촌이나 엄마나 잘릴 걱정 없이
편안히 쉬는 날이었으면 좋겠다
시끄러워 죽겠다
유현아 시인
2006년 제15회 ‘전태일문학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 시작.
시집으로 《아무나 회사원, 그밖에 여러분》이 있다.
냉장고에 호박 오이 무생채 무쳐놨으니까 대접에 넣고 비벼먹어 고추장은 베
란다에 있고 참기름은 가스레인지 찬장에 있어 맨날 빵 같은 거 먹지 말구 된장
국은 쉬었는지 확인 한 번 해보고 먹어 오늘은 어디 가니 일찍 들어와 엄만 새벽
에 나가
시위대가 도로를 점거했다
엄마는 집에 없고
엄마가 차려놓은 밥상이 집에 있고
시위대가 톨게이트 옥상을 점거 중이다
뜨거운 아스팔트 위를 걸으며 퇴근했다
올라간 지 한 달째라고 했다
집에 가서 씻고 밥 먹고 잤다
이종민 시인
2015년 《문학사상》 등단
2018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문학나눔 도서 선정 시집 《눈물 이후》 한국작가회의 회원, 문학동인 Volume 회원
대책 없던 아버지는 판타지를 꿈꿨다
상상력을 사줄 수호신을 기다렸다, 다만 집에서
엄마가 공장으로 일하러 나간 사이 하나뿐인 방을 판타지 소굴로 만들었다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부르고 방바닥에 배를 깔고 슬금슬금 시를 썼다
나는 그런 아버지의 낭만이 싫었다 하나뿐이었던 방도 싫었고 하나뿐이었던 마루도 싫었고 없는 사람처럼 일만 한 하나뿐인 엄마도 싫었다
나풀나풀 가벼운 아버지는 집밖으로 나가는 일이 거의 없었다 나가면 돈 나간다고 돈은 들어오게 해야 한다는 알 수 없는 신념에 가득 차 있었는데 1년 중 하루는 정성스레 양복을 다려 입고 밖으로 나가 저녁에 들어왔다 한 손엔 작은 비닐봉지가 들려있었는데 소고기 반근과 미역 한 움큼이었다 철야하는 어머니를 기다리는 동안 아버지는 쌀을 안치고 소고기 미역국을 끓였다 나는 그때가 가장판타지적인 공간에 있었다고 기억한다
철야를 하고 온 어머니는 하루도 빠짐없이 아버지를 욕했는데 1년의 그 하루만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밥상 위 소고기 미역국에 밥을 말아 코 박고 먹기만 했다
아버지는 옆에서 기타를 쳤고 나는 쌀밥의 냄새와 소고기 미역국의 향긋함에 미움이 사라지는 하루였다
팔순의 아버지는 여전히 일 년 중 하루는 소고기 반근과 미역을 샀으며
팔순의 어머니는 여전히 아버지 원망을 1년 중 단 하루만 빼고 주구장창 한다
아마,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 하루의 판타지를 50년 째 기억하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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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현아 시인
2006년 제15회 전태일문학상 수상
시집으로 《아무나 회사원 그밖에 여러분》이 있음
시집으로 《글로리홀》, 《입술을 열면》
안개의 제국엔 국경선이 없다. 더 이상 도망칠 백성은 없으므로, 한번 갇히면 누구도 헤어나지 못하지만 그런 연유로 제국의 문은 열려 있고 천지간은 적막으로 가득 떠 있다. 어느 새벽 자전거를 탄 이국의 사내가 안개 속으로 빨려 들어간 적 있다. 비어 있으나 비어 있지 않고 차 있으나 차 있지 않은 그곳에서 꼼짝없이 여생을 갇혀 지내야 하는 일이 사람의 나라에선 외롭고 슬픈 일이지만 안개의 제국에선 흔하고 흔한 일, 아무도 자진 월경越境한 자의 행방은 수소문하지 않는다. 한번 삼키면 뱉을 줄 모르는 자본의 뱃속처럼 어둡고 컥컥한 길을 따라 그는 아직도 불 꺼진 공장 밖을 전전하고 있을까. 도道를 도라 말하면 도가 아니듯 무無를 무라 하면 무가 아니듯 죽음을 죽음이라 말하지 않는 사람들, 저 속절없이 자욱한 안개숲에는 더 이상 가지를 내밀 수 없는 나무들이 있다. 혼자인 듯 아닌 듯 아스라이 하늘을 괴고 서 있는 저것들을 사람들은 전신주라 부르지만, 안개의 제국에선 깃발 없는 만장輓章이라 부른다. 지난여름, 자전거를 타고 나가 돌아오지 않는 사내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란 말을 모른다.
이용헌 시인은 광주(光州) 출생.
2007년 《내일을여는작가》로 등단.
시집 《점자로 기록한 천문서》가 있음.
날개도 없이
하늘을 나는 사람들이 있다
까치조차 짓지 않는
30m, 40m 높이에 집을 짓는 사람들이 있다
땅 위에서 외치는 소리
높은 곳에 있는 사람들 들리지 않아
오르고 또 오른다
오르는 일이야 늘 이어지고 있지만
더 높이 오르면 소리 전할 수 있을까
오늘이 마지막이라며
날개도 없는 사람들
까치집 보다 높은 곳에
이상한 집을 짓는다
* 인권. 통권 78호 한금선 님의 시선에서 인용함.
* 2013년 1월 4일 전주종합운동장, 천일교통 해고노동자 김재주 분회장이 철탑 농성을 함.
이상호 | 창원 출생. 1999년 제11회 ‘들불문학상’을 수상했다.
2007년 시집 《개미집》이 문화관광부 우수도서로 선정되었고, 2015년 《깐다》 등을 펴냈다.
‘객토문학동인’, ‘경남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제주 청년 고남도 씨는 1948년
바람 세찬 어느 날
배에 숨어 일본으로 밀항했다
폭도로 몰려 토벌대에 학살당한 이웃들이
어디에 묻혔는지 알 수 없는 제주에서
비탈밭을 일구기가 괴로웠던 그는
일본인 밑에서 허드렛일하며 겨우 먹고 살아남아
일본말을 터득하고
일본에 세금 내는 거주민이 되었으나
제주에 불던 바람이 잊히지 않아
나무들이 흔들리는 날이면 날마다
비탈밭을 떠올리다가 늙어 죽었다
예멘 청년 모하메드 씨는 2018년
바람 세찬 어느 날
비행기를 타고 제주로 입국했다
반군과 정부군이 이웃들을 사이에 두고 총질하고
동네에 폭탄 터뜨리는 예멘에서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들에 대해서도 가르치던
초등학교 교사였던 그는
농사일을 해본 적 없고
고기잡이배를 타본 적 없어
말이 통하지 않는 제주에서
난민 신청자에게 주는 생계비로 버티며
우선 먹고 살아남을 일자리를 찾으러 다니다가
바람 부는 날이면 날마다
초등학교 교실을 떠올리며 살날을 헤아렸다
하종오 시인
1954년 경북 의성 출생. 1975년 《현대문학》 추천으로 등단. 시집으로 《벼는 벼끼리 피는 피끼리》《사월에서 오월로》《넋이야 넋이로다》《분단동이 아비들하고 통일동이 아들들하고》《정》《깨끗한 그리움》《님 시편》《쥐똥나무 울타리》《사물의 운명》《님》《무언가 찾아올 적엔》《반대쪽 천국》《님 시집》《지옥처럼 낯선》《국경 없는 공장》《아시아계 한국인들》《베드타운》《입국자들》《제국(諸國 또는 帝國)》《남북상징어사전》《님 시학》《남북주민보고서》《세계의 시간》《신강화학파》《초저녁》《국경 없는 농장》《신강화학파 12분파》《웃음과 울음의 순서》《겨울 촛불집회 준비물에 관한 상상》《죽음에 다가가는 절차》《신강화학파 33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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