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장

by 센터 posted Jan 02, 202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 - Up Down Comment Files
  아버지는 감귤밭에서 일하다 손가락 하나를 잃었지요 하지만 울지는 않았어요 작은언니 중학교 졸업식날 우리 집에서 가장 먼저 중학교를 졸업한 사람이구나, 말하며 울었지만요 
  아버지는 내일도 다시 입을 작업복을 공장에 걸라고 하셨지요 새 옷과 겹치지 말아야 하는 먼지 묻은 옷이 걸려 있던, 공장은 벽에 못 하나를 박아 만든 아버지 혼자만의 장롱이었지요

  바람이 지나가는 구멍을 가진 제주 돌담은 태풍에도 무너지지 않아요 하지만 우리들은 허기진 구멍을 가지고 있어요 굶주리면 흙이라도 풀이라도 입 속에 넣어야지요 허기처럼 쉽게 사라지는 우리들은 새 달력에 죽음을 먼저 기록하지요

  새 달력을 앞에 두고 투명한 못 두 개를 박습니다 새 달력에 나의 공장이 두 개, 심장처럼 두 개, 심장에 박힌 못에 걸어 둘 민호와 고래,

  민호는 음료수 공장에서 사라진 학생, 태평양 고래들도 해파리 대신 비닐을 삼키며 사라져 갑니다 무릎을 꿇고 투명한 못 두 개를 박습니다 열아홉 민호는 젊기도 전에 사라졌고, 문자를 읽을 수 없는 고래들도 텅 빈 뱃속 채우다 사라져 갑니다 

  민호가 없는 텅 빈 하루를, 허기로 가득 찬 고래 배를, 손가락 하나 없는 손으로 단추를 채워 나갔을 아버지는 몇 번이나 울었을까요 이제 우리는 다시 새 달력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두 개의 울음을 공장에 겁니다 

  새 달력에는 이미 무릎을 꿇고 박은 투명한 두 개의 못이 박혀 있으니까요


*선반 같은 것이 없는 작은 벽에 못을 박아 옷을 걸어두게 한 자리를 제주에서 나고 자란      아버지는 공장이라 불렀다. 그것은 허공에 둔 장롱이라는 뜻일지도 모른다.

김신숙.jpg 김신숙 시인
2012년 《제주작가》, 2015년 《발견》으로 등단. 시집 《우리는 한쪽 밤에서 잠을 자고》 발간.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59 50년의 판타지 센터 2016.12.27 1302
58 건너지 못하는 인사 file 센터 2021.04.26 166
57 공범 file 센터 2021.08.25 93
» 공장 file 센터 2020.01.02 906
55 공장 빙하기 센터 2017.08.28 1413
54 굴뚝 file 센터 2018.04.26 1615
53 그렇게라도 짖어보는 것이다 file 센터 2022.08.29 37
52 그리고 나는 저녁이 될 때까지 계속 걸었다 file 센터 2016.03.14 1747
51 근로하는 엄마 노동하는 삼촌 file 센터 2019.10.30 830
50 낮게 허밍으로 file 센터 2023.12.01 19
49 너무 늦지 않기로 해요 센터 2020.02.27 815
48 당신의 유통기간은 언제까지입니까? file 센터 2017.10.30 1334
47 뒷맛 file 센터 2022.02.24 59
46 레이어 file 센터 2023.09.11 43
45 리어카를 구원하라 file 센터 2021.12.23 92
44 리어카의 무게 file 센터 2016.04.28 1630
43 마네킹의 오장육부 file 센터 2017.07.03 1493
42 말의 힘 file 센터 2020.08.24 477
41 밀양 file 센터 2014.04.23 1837
40 바닥은 쉽사리 바닥을 놓아주지 않는다 file 센터 2016.08.24 1696
목록
Board Pagination ‹ Prev 1 2 3 Next ›
/ 3

나눔글꼴 설치 안내


이 PC에는 나눔글꼴이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사이트를 나눔글꼴로 보기 위해서는
나눔글꼴을 설치해야 합니다.

설치 취소

Designed by sketchbooks.co.kr / sketchbook5 board skin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