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밭에서 펼쳐온 곡진한 삶

by 센터 posted Jun 03,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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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길날 농사짓는 사람



숲의 정령들이 출몰하는 계절이 왔다. 지천으로 깔린 색색의 초록이 성한 시절이다. 청명한 날에는 반짝거리는 초록빛이 눈부셔 눈을 못 뜨겠다. 지구 온난화며 기후 변화로 인해 봄은 짧디 짧아지고 있지만, 그래도 봄의 한복판이 있다고 한다면 노동절을 전후한 지금의 시기일 것이다. 이즈음의 산이며 숲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아득하고 신비롭다. 저 속에서 온갖 초록의 정령들이 사뿐사뿐 뛰어놀거나 쌔근쌔근 잠을 자거나 자기들만의 언어로 신나게 대화를 나누고 있을 거라는 상상에 이른다. 일본 애니메이션을 지나치게 본 까닭인지도 모르겠다.


산만큼이나 논밭이 푸르러지는 계절이다. 치열한 초록의 바다, 삶의 현장-농민들에게는 밭이며 논이 그렇다. 봄이 와 돋아나기 시작한 풀들을 밀어내고 일군 자리에 씨앗을 심거나 뿌리며 계절을 연다. 해가 뜨면 허리 펼 새 없이 김을 매고 작물들을 돌보며 기른다. 그리고 열었으면 닫을 시기인 저녁과 가을이 온다. 때와 절기와 계절 앞에서 가장 겸허하고 정직할 수밖에 없는 이들이 농사짓는 사람들일 것이다.


태어나 자란 마을에서 옆 마을로 시집와 그곳에서 50년 넘게 농사를 지어온 한 여성 농민(전남 장흥 거주, 72세)을 만났다. 농촌 여성 대다수의 현실이 그렇지만 그녀 역시 농사와 가사와 양육을 도맡다시피 병행해가며 딸 셋, 아들 둘을 키워 도시로 떠나보냈다. 이제는 중년의 나이가 된 자녀들이 진즉 떠나고 없어도 그녀의 하루는 여전히 분주하다. 해가 뜰 무렵이면 일어나 집안의 텃밭이며 마당이며 창고 안팎을 살핀다. 채소며 꽃이며 온갖 사물들에게 간밤의 안부를 묻고 밥을 짓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해서 논에서 밭에서 어둑어둑해질 무렵까지 쉴 새 없이 손발을 움직인다. 쌀과 고추 농사를 주로 짓고 있지만 이밖에도 수십 가지 농작물을 심고 거둔다. 그녀에게 땅은 생계의 중요한 원천이자 고마운 삶의 토대다. 만물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머리나 책이 아니라 온몸으로 익혔을 그녀다. 자연의 일부로 살며 정성을 다해 땅을 일궈온 그간의 세월 덕분인지 지혜로워 보이는 눈빛이 따스하게 빛난다.


태어나 이제껏 농촌에서만 줄곧 살아온 그녀지만 자식들이 사는 모습을 봐도 그렇고, 도시에서의 삶이 결코 좋아보이지는 않는단다. 못살면 못사는 대로, 잘살면 잘사는 대로 ‘제 몫’을 일구고 챙기기에 바빠 보이니 오가는 정도 없고, 사는 재미도 없어 보여 팍팍하게만 느껴진단다. 그래서 이다음에라도 자식들 중 누군가가 농사를 짓겠다고 한다면 기꺼이 힘을 실어주고 싶단다. 다양한 세대가 한집에 살면서 어릴 적부터 농사일에 손을 보태던 과거에는 노동력이 확보되어 기계 값이며 농약 값이 안 드는 데다 다함께 모여 생활하니 가난하지만 살 만했단다. 지금처럼 해마다 씨앗들을 사다 쓰지도 않았으며 일손이 모자라 빚을 내 비싼 농기계를 사들이거나 빌릴 일도 없었단다. 봄여름 땀 흘려 지어 갈무리한 곡식이 많든 적든 굵든 잘든 감사히 나누었단다.


시장의 힘은 농촌 공동체를 붕괴시켜 왔다. 반세기 전에 비해 인구는 3분의 1가량으로 줄었고 공동체의 기반이 되는 논밭은 농약과 다국적 씨앗 회사들에 의해 오염되고 점령당했다. 농가 부채는 수배로 늘어났으며 100퍼센트에 육박하던 곡물 자급률은 20퍼센트대로 곤두박질쳤다. 최근 10년 새 귀농 귀촌이 붐을 이루는 것도 같지만 여전히 농촌의 평균 연령대는 60대 이상이다. 먹고사는 데 기본이 되었던 자급자족형 농사의 자리에는 온통 돈이 들어앉았다. 수십 년 새 노동력과 토종이 급격히 줄어들면서 부채가 나날이 늘어나도 기계와 농약이며 화학비료, 수입된 씨앗에 의존해서 농사를 지을 수밖에 없는 구조로 변해온 것이다. 주류 시장에서는 토종으로 농사지은 농작물을 외면한다. 크고 매끈하며 맛도 좋은 것만을 선호하는 대다수 소비자들의 기호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이다. 그나마 ‘한살림’이며 ‘생협’ 같은 조합 형식의 윤리적 소비를 독려하는 바른 먹을거리 지향형 기업들이 있지만 농촌에서든 도시에서든 가난한 이들에게는 그 문턱을 넘어서기가 쉽지 않다.


시나브로 초록이 지쳐 가을일 것이다. 한바탕 수확의 시기가 저물고 나면 계절의 여백과 행간이 도드라지는 쓸쓸한 겨울이 올 것이다. 겨울잠에 드는지 하늘이나 바다 어드메로 증발해버리는지는 모르겠으나 초록의 정령들도 가뭇없이 숲을 떠날 것이다. 하지만 겨울이 와도 그녀에게 ‘늦잠’이란 없을 것이다. 변함없이 계절이 오가는 대로 깨어나 일하고 잠들 것이다. 자연의 흐름을 좇아 평생을 ‘자연스럽게’ 살아왔으므로 해가 짧아지니 조금쯤 더 쉴 수 있을 따름일 것이다.



* 길날_정규·비정규 노동자와 백수의 처지를 넘나들다가 지금은 전남 장흥에서 농사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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