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살

by 센터 posted Feb 27, 2017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 - Up Down Comment

길날 농사짓는 사람



싱싱한 고래 한 마리 내 허리에 살았네

그때 스무 살 나는 푸른 고래였지··· ···

(문정희, 〈생일파티〉 중 일부)


길 가다

꽃 보고


꽃 보다

해 지고


내 나이

스무살


세상이 너무

사랑스러워


뒹구는

돌눈썹 하나에도

입맞춤하였다네.

(곽재구, 〈스무살〉 전문)


어느덧 60~70대에 이른 여성시인과 남성시인이 쓴 ‘스무 살’에 관한 시/시구다. 두 시인이 스무 살 무렵이었던 때는 지금으로부터 반세기 전쯤인 1960~70년대. 2017년 올해 스무 살 되는 이들이 1997년생이거나 1998년생인 점을 감안하면 이들이 태어나던 때로부터도 한 세대쯤 더 전이다. 그러니까, 이 시인들이 스무 살이었을 적에 두 번쯤의 스무 살 남짓을 더 얹어야 지금의 스무 살들은 시인들의 현재가 된다. 시간은, 세월은, 나이는 몸에 물처럼 바람처럼 스미다가 마침내 몸을 뚫고 지나간다.

그때의 스무 살에게는 고래나 꽃이 말을 걸어오기도 했던 모양이다. 바다 같이 푸른 세상, ‘너무 사랑스러운’ 세상에서 고래처럼 솟구치는 꿈을 꾸기도, 길가에 핀 꽃에 한눈팔리어 해가 지도록 걷기도 했던 모양이다. 유독 이 시인들이 스무 살 무렵부터 ‘시인의 감수성’을 지녔던 까닭만은 아닐 것이다. 그때의 스무 살들은 대체로 ‘저렇게’ 살아갔던 것 같다. 삶의 낭만이랄까 여유랄까 품위랄까 뭐 이런 것들을 ‘가난해도’ 누릴 수 있었던 환경이요 시절이었던 것이다. 이제는 스마트폰이라면 모를까 길가의 꽃에 한눈팔려 해지도록 걷는 스무 살을 보는 일은 무척이나 드문 일이 되었다. 스무 살 허리에 싱싱한 고래가 산다니, 무슨 말인가 하고 금세라도 두 눈 크게 뜨고 지금의 스무 살들이 물어올 것만 같다. 입시라는 제도로 줄 세우기하는 풍경은 그때나 지금이나 별반 달라진 게 없는 듯한데, 그 밖의 것은 그때로부터 참 많이도 달라졌다.


작년 5월, 서울 지하철 2호선 구의역에서 고장 난 스크린 도어를 수리하다 스무 살 생일을 하루 앞두고 ‘죽임을 당했던’ 1997년생 비정규직 청년 노동자는 결코 그렇게 죽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온전한’ 스무 살을 맞이하고 싶었을 것이다. 침몰하는 배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던, 이 청년 노동자와 동갑내기였던 단원고의 그들도 그러했을 것이다. 스물이라는 숫자, 20세. 삶의 질이야 어떻든 간에 평균 수명이 80세에 달한다는 현대에 그 4분의 1에 해당하는 20세도 채우지 못하고 많은 젊은 목숨이 ‘살해당하는’ 시대를 목격 중이다. 저출산율이 심각한 사회문제라고 회자되는 이 나라에 어렵사리 태어났건만 스무 살이 되지 못한 채 죽어가야 하는 또래를 둔 스무 살 무렵의 그들에게는 길가의 꽃에 홀려 종일 길을 걷는다거나 상상 속의 푸른 고래랑 뛰어논다거나 할 시간이며 여유가 없다. 사회는 갈수록 더 치열한 경쟁을 부추기고, 사흘이 멀다 하고 온갖 사건 사고가 일어난다. 한정된 일자리와 ‘위험한’ 사회는 대부분의 그들을 길과 바다를 찾아 나서게 하지 못한다. 방안이나 컴퓨터와 스마트폰 같은  ‘사각형세상’으로 몰아넣는다. 


R은 올해 스무 살이 되었다. 3년 전 세월호 참사를 당한 단원고 ‘아이들’과 작년 구의역에서 처참한 죽음을 맞아야 했던 ‘비정규직 청년 김씨’보다 1년 후에 태어났다. 그들은 우리 나이로 작년에 스무 살이 되었고, R은 올해 스무 살이 되었다. R은 ‘평범하게’ 사는 게 꿈이라면 꿈이라고 했다. 학교를 졸업한 후 무사히 취직도 하고, 사랑하는 이를 만나 결혼도 해서 아이를 낳아 오순도순 살아가면서 앞서 등장한 시인들 세대가, 이제 쉰 살 즈음인 R의 부모 세대가 ‘일반적으로’ 누려왔다고 할 수 있는 삶의 과정들을 무탈하게 밟아 살기를 바란다고 했다. R의 얘기를 들으며 지금이 ‘무던하고 평범한’ 삶을 살아가기가 힘들어진 시대라는 사실을 새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 R은 이제 스무 살이 되었으니 정서적으로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독립하는 삶을 살고 싶다고 했다. 부모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는 삶으로부터 떠나려면 사회적인 안전망이 튼튼해야 하는데, 우리 사회는 그렇지 못해서 이 부분이 R에게도 숙제처럼 남아 있다고 했다. 복지 시스템이 허술한 데다 이제껏 평범하게 여겨져 온 일반적인 생애주기가 빠른 속도로 무너지는 중인 이 사회에서 이른바 ‘흙수저’들이 살아갈 길은 결국 ‘함께 모여’ 사는 것 아니겠냐며, 꼭 이성 간 결혼의 방식이 아니더라도 많은 이들이 여럿이 모여 ‘셰어share하는’ 삶을 살아가게 될 것 같다며 그래서 더더욱 모든 국민에게 배당되는 ‘기본소득’ 형태의 제도가 뿌리내리기를 바란다고도 했다. 아울러 ‘계층 대물림’이 현재 한국 사회의 가장 큰 병폐이며 시간이 걸리더라도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고, 그런 점에서 꾸준히 이어지고 있는 ‘촛불집회’에 희망을 걸고 있다면서 “잘 모였고, 이번엔 될 것 같은” 느낌이 든다고 했다. R의 얘기를 들으며 R이 바라는 ‘공정한 사회에서 평범하게’ 살아갈 권리, 일상의 평화를 안정적으로 누리며 존재할 권리의 문제는 세대를 초월해 우리 사회의 ‘평범한’ 모든 이에게 절실한 정치적 문제가 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스무 살을 “보호 받는 대상에서 책임지는 주체”로 정의하던 R은 이제 곧 대학생이 된다. R은 자신이 딸이라서 아들인 남동생에 비해 차별을 받는다고 느낀 적 없이, 모든 것을 잘 품어주는 부모님과 친구처럼 지내며 ‘무던하게’ 성장해왔고, 과거의 스무 살 어른들과는 사뭇 달라진 방식으로 또래 친구들과 나름의 ‘낭만’을 좇아 현재를 살아가고 있다. R을 비롯한 스무 살 그들이 성차를 떠나, 대물림되는 가난과 부로부터 놓여나 덜 아프고 덜 불안해하며, 더 자유롭고 행복한 일상을 일구며 나이 들어가기를 바랐다. 싱싱한 고래처럼 바다 같은 세상을 유영할 날이 스무 살 그들에게 ‘골고루’ 하루라도 빨리 오면 좋겠다.


나눔글꼴 설치 안내


이 PC에는 나눔글꼴이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사이트를 나눔글꼴로 보기 위해서는
나눔글꼴을 설치해야 합니다.

설치 취소

Designed by sketchbooks.co.kr / sketchbook5 board skin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