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트〉와 나

by 센터 posted Jan 06,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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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이남신 센터 소장·이사




〈카트〉가 세상에 나왔다. 비공개 시사회와 개봉관에서 두 번 봤다. 첫 번째는 많이 울었고 두 번째는 담담했다. 잘 만든 영화다. 예상보다 수위가 높았다. 제작이 쉽지 않았을 텐데 명필름과 부지영 감독에게 고마웠다. 출연한 스타 여배우들과 아이돌 그룹 메인 보컬에게도 팬심과는 다른 뜨거운 가슴으로 고마웠다. 510일 함께 투쟁했던 우리 조합원들을 살갑게 되살린 모든 이들에게 고마웠다. 영화판엔 비정규직이 득실대는데 고생이 많았을 이름 모를 비정규노동자에게도 감사하다. 비정규 여성노동자의 투쟁과 일상을 담은 최초의 상업영화 〈카트〉 덕분에 간만에 극장에서 진짜 조합원들 얼굴도 볼 수 있었다. 매일 인터넷 검색으로 누적 관객 수를 확인하고 영화평과 언론방송 소개 내용을 스크린하면서 문화 매체를 통한 비정규 문제 공감대 확산이 훨씬 빠르구나 실감하는 중이다. 비정규센터 소장으로서 제대로 한 수 배우고 있다.


〈카트〉는 여성 특유의 감성이 돋보인 디테일이 참 좋다. 혜미(문정희)가 선희(염정아)에게 언니라고 처음 호칭을 바꿔 부르던 장면과 선희가 복귀한 혜미에게 원망하지 않고 공중전화로 함께 예전처럼 일하자고 정말 친자매처럼 통화하는 장면이 서로 잘 어울렸다. 농성장에서의 연극 공연과 줄넘기, 노래 부르기, 자기 삶 나누기 등은 정말 당시 투쟁을 그대로 옮겨온 듯똑같았다. 여성들의 교감과 협력이 가슴 찡하게 다가왔다. 낙숫물이 바위를 뚫는다는 믿음을 자연스레 설파한 20년 청소원 순례(김영애)가 선희에게 곁에 함께 있어줘 고맙다고 할 때 그 마음이 그대로 느껴졌다. 정규직 노조를 만든 동준(김강우)이 순례가 입원한 병원으로 문병왔을 때 넉넉한 가슴으로 품는 순례의 모습. 선희가 부지불식간에 따귀를 때린 아들 태영(도경수)이 뛰쳐나간 뒤 황망하게 서있는 모습 뒤로 압도하듯 솟구친 벽. 끼니때마다 주식인 김과 라면. 임금을 떼어먹으려는 편의점 주인에 항의하다 20만 원을 쥐어주자 잠시 갈등하다 받는 태영의 모습. 태영을 못마땅해 하며 편의점 출입문을 벽돌로 박살내 버린 태영이 여자친구 수경(지우. 역시 결정적인 때 여자가 더 당차다). 그러고 보니 여성 제작자에 여성 감독, 여성 프로듀서(김균희), 주조연 여배우들까지 이 영화는 온통 여성들로 가득하다. 이랜드 투쟁처럼.


카트 주요장면.jpg



아쉬움도 있다. 평범한 여성 노동자들을 주인공으로 세우다 보니 실제 투쟁을 기획하고 이끈 지도부와 수많은 연대 활동가들의 모습은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사실 2007~8년 이랜드-뉴코아 투쟁 과정에서 민주노총의 역할도 남달랐고 전국에서 정말 많은 조합원들이 자기 투쟁처럼 연대했다. 상업영화로선 그이들까지 카메라로 응시하는 건 모험이었을 것이다. 그 수많은 사람의 이야기들을 이 한 편의 영화로 담는 건 불가능하기도 하지만. 정규직으로 위원장을 맡은 동준의 역할도 실제와 많이 달랐다. 무엇보다 마지막 카트를 미는 선희와 혜미 곁에 구치소에서 출소한 동준도 함께 했다면 좋았을 터이다. 〈카트〉가 흥행하면 노조 간부나 활동가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 한 편 볼 수도 있겠지. 정말 그런 날이 오기를 간절하게 바란다.


까메오로 마포 민중의 집 정경섭 대표가 우체국 집배원으로 나왔다는데 미처 못 봤다. 유상철 노무사도 확인하고 집회 사회로 나선 송경동 시인도 봤다. 아 송경동 역할은 내가 더 딱인데…^^. 당시 투쟁했던 실제 조합원들과 쌍용차와 투쟁 사업장 동지들을 숨은그림찾기 하듯 찾는 재미도 쏠쏠했다. 이름 없이 이랜드 투쟁을 함께 떠받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노동자들과 활동가들, 시민들이 이 영화를 만든 진짜 제작자다. 시나리오 작가다. 하루하루 살얼음 같았던 이랜드-뉴코아 투쟁은 〈카트〉보다 훨씬 역동적이었고 더 영화 같았다. 잊을 수 없고 잊지 말아야 할 사람들, 동지들이 너나없이 주연이었다. 정말 그랬다. 지금은 얼굴도 잘 볼 수 없는 뉴코아노조 지도부와 파업 기간 견해 차이로 떠나버린 이랜드일반노조의 여러 동지들이 가슴 사무치게 떠오른다. 얼마나 많은 갈등과 상처 속에서 배태되고, 진행되고, 마무리된 투쟁인지 아는 사람만 안다. 그 베일까지 걷어내고 속살까지 내보이는 날도 언젠가는 올까. 잘 모르겠다. 나중에 쓰린 가슴 달래며 차분하게 되새길 날이 왔으면 좋겠다.


찬반 투표.jpg

510일 파업 종료 찬반 투표에서 한 표를 행사한 조합원들은 민주노조 사수로 자신의 몫을 지금도 묵묵히 해내고 있다.


그러고 보니 이랜드 투쟁은 독특한 점이 있다. 민주노총이 단일 사안으로 대의원대회를 소집한 전무후무한 투쟁인데도 제대로 된 평가서가 없다. 아니, 투쟁 경과를 정리한 자료조차 찾아보기 힘들다. 여기 저기 흩어져 있을 그 소중한 자료들이 아직도 빛을 못 보고 있다. 공식적인 기록은 남기지 못한 채 꽤 오랜 시간이 흐른 셈이다. 의례적인 평가서를 대신해서 이랜드 투쟁을 알린 건 《우리들의 소박한 꿈을 응원해줘》라는 단행본이다. 〈카트〉를 만들게 된 동기를 제공한 책이기도 하다. 진재연 등 여러 르뽀 작가들이 구술 작업을 통해 파업 조합원의 가감 없는 투쟁의 일상을 세심하게 포착한 내용이 감동적이어서 꽤 많이 팔리기도 했다. 510일 파업투쟁을 담은 〈외박〉이 뒤를 이어 나왔다. 〈외박〉은 오랜 기간 가장 가까이서 생생한 투쟁 현장을 카메라로 담은 김미례 감독의 집념과 피땀 어린 노력의 결실이다. 일본에서도 화제를 불러일으킨 투쟁 다큐멘터리로 여성의 관점에서 본 투쟁의 다각적인 면이 인상적이다. 그리고 김경욱 위원장 얘기를 축으로 만든 웹툰 ‘송곳’도 나왔다. 최규석 작가의 실력이 더해져 현재도 장안의 화제가 되고 있다. 이번 〈카트〉까지 이랜드 투쟁은 다양한 문화 매체들이 색다른 풍부한 내용으로 투쟁 평가를 대신하고 있는 셈이다.


2007~8년 510일 파업투쟁은 80만 원 월급의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가 82억 주식배당금의 거대 자본가와 맞장 뜬 투쟁이었다. 씨앤앰처럼 비정규직과 정규직이 굳세게 연대한 아름다운 투쟁이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FC서울 간 축구경기가 있던 날 오전 공권력 침탈로 끌려나오기 전까지 3주 동안의 월드컵점 점거 농성은 진정한 의미에서 해방구였다. 교회 장로인 이랜드 그룹 박성수 회장은 죽었다 깨어나도 알 수 없는 진정한 나눔과 연대의 일상이 거기 있었다. 일터와 가정에서 3중고로 고통받아온 여성노동자들의 인고와 자각이 눈물겹게 뒤범벅된 현장이었다. 〈카트〉에 가장 고마운 건 그 예민하고 세심한 감수성을 잘 잡아냈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가 흘깃 쳐다보고 지나치거나 외면하기 십상인 여성노동자들의 고단하고 힘겨운 일상. 파업투쟁 과정에서도 하나도 달라지지 않는 여성들의 현실. 그 답답하고 뒤돌아보고 싶지 않은 현실 속에서 피어나는 우의와 동지애. 여성들이 단합해 만든 〈카트〉는 〈외박〉과 마찬가지로 여성의 눈으로 본 투쟁 현장을 다른 수채화로 그려냈다. 주류 영화의 한계를 넘어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을 정면으로 응시한 2014년 판 〈파업 전야〉, 〈카트〉가 손익분기점인 170만 관람객 달성에는 미치기 어렵겠지만 100만은 돌파하길 염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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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카트〉 제작진과 투쟁 당사자들의 만남. 왼쪽부터 홍윤경 전 이랜드일반노조 사무국장, 이경옥 전 이랜드일반노조 부위원장, 부지영 감독, 김균희 프로듀서, 이남신 전 이랜드일반노조 수석부위원장


문득 궁금해진다. 비정규노동자였던 예수는 자칭 기독교 기업이라는 이랜드 그룹에서 벌어진 이 싸움에서 노동자와 자본가 중 누굴 응원했을까. 뻔한 답변보단 다양한 관점의 얘깃거리가 생산되는 텍스트가 또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자본의 논리가 종교, 특히 대형교회를 통해 우리 사회에 어떤 암담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지 그런 영화나 다큐멘터리 한 편 누가 만들었으면 좋겠다. 어느 날 가슴 두근거리는 선물처럼 찾아온 〈카트〉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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