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 중심성과 노동의 중심

by 센터 posted Oct 24,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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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강문대(민변 노동위원장/센터 감사)



재판의 계절, 그 막을 연 삼성전자 반도체 부문

노동자에게 있어서 지난 한 달간은 과히 재판의 계절이었다. 가을의 길목에서 법원은 많은 생산물을 내놓았다. 노동자들은 그 생산물을 보고서 웃거나 울거나 하였다. 가을의 생산물이라 하여 모두 다 자연의 은총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시작은 삼성전자 반도체 부문의 업무상 재해 사건이었다. 서울고등법원은 지난 821일 일부 원고에 대해서는 업무상 재해를 인정하고, 다른 일부 원고에 대해서는 업무상 재해를 인정하지 않는 내용의 판결을 선고하였다. 1심 판결과 동일한 내용이었다. 재판부가 올바로 판단한 부분도 있었지만 전체적으로는 납득하기 어려운 판결이었다. 업무상 재해를 인정받지 못한 원고들도 삼성전자 반도체 부문에서 오래 근무하면서 유독 화학물질에 장기간 노출되었기 때문이다. 법원은 이 분들이 병에 걸린 원인을 근로자들이 입증해야 한다는 취지로 판단하였는데, 그건 근로자들에게는 거의 불가능한 요구이다. 결국 우연히 원인 물질을 알게 된 근로자는 승소하고 그렇지 못한 근로자는 패소하게 되는 것인데, 이런 내용의 판단이 정당하다고 볼 수 없다. 그 뒤 근로복지공단이 대법원에 상고하지 않아 노동자가 승소한 부분의 판결은 확정되었고, 패소한 원고들은 대법원에 상고하여 다시 대법원의 판결을 기다리게 되었다. 황상기 아버님이 끝내 승소한 것은 정말 감동적인 결론이다.


학습지 교사와 철도노조 파업에 관한 판결

두 번째는 학습지 교사가 노동자인지 여부에 대한 것이었다. 서울고등법원은 1심 법원이 재능교육의 학습지 교사는 근로기준법상으로는 노동자가 아니지만 노조법상으로는 노동자라고 인정한 판결을 뒤집고, 학습지 교사는 근로기준법상으로는 물론이고 노조법상으로도 노동자가 아니라고 판결하였다. 판결의 취지는 학습지 교사는 사용자라는 것인데, 그러한 판단이 현실에 맞지 않는다는 것은 긴 말이 필요 없을 것이다. 이 판결은 불과 얼마 전에 대법원이 골프장 캐디가 노조법상의 노동자라고 판단한 판결의 취지에도 맞지 않아 현행 판례에도 배치된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런데 위 판결을 선고한 재판부는 사용자가 노동조합의 간부들에게 노조를 비판하는 내용의 책을 읽도록 강요한 것이 부당노동행위에 해당하지 않는다고도 판단하였는데(1심 판결은 그와 달랐다), 노동 문제에 대해 어떤 선입견이나 편견을 가지고 있지 않나 의문이 든다.

세 번째는 철도노조의 파업이 업무방해죄에 해당하는지에 대한 것이었다. 대법원은 철도노조의 2009년도 파업에 대해 업무방해죄가 성립한다고 판결하였다. 이 판결은 문제가 되었다. 몇 년 전에 대법원이 노동조합의 파업에 절차상으로나 목적상 위법한 점이 있다고 해도 그 파업이 전격적으로 행해지지 않았으면 형법상 업무방해죄로는 처벌할 수 없다고 전원합의체에서 판결했는데, 위 판결은 그 판결의 취지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법원이 기존 대법원의 판결과 다른 취지의 판결을 하려면 새로운 전원합의체 판결을 선고해야 하는데, 위 판결은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이다. 이에 대법원은 기존 대법원 판결의 논리를 갖다 쓰면서도 결론만 달리 하였는데, 그렇게 하다 보니 일반인들이 납득하기 어려운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하고 말았다. “노조가 파업을 공개적으로 예고하였지만, 그 파업이 불법이므로 사용자는 노조가 감히 파업을 감행하리라고 예상할 수 없었다.” 파업을 행할 시점에서는 파업이 불법인지 아닌지 논란이 되고 있었고, 철도노조는 기존에도 불법 파업을 수차례나 감행하였으며, 사용자는 당시 노조의 파업을 기정사실화 하면서 그에 대한 대책까지 마련했는데도 대법원의 결론은 위와 같았다. 이건 논리와 상식의 파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은 것이다.


전교조와 현대차 비정규노동자에 대한 판결

네 번째는 전교조에 대한 노조 아님 통보 처분의 효력 정지 여부에 대한 것이었다. 서울고등법원은 1심 법원이 노동부의 노조 아님 통보 처분이 적법하다고 판결해 놓은 상황에서도 그 처분의 효력을 정지하는 결정을 하였다. 그렇게 결정한 이유는, “교원의 노동조합 설립 및 운영 등에 관한 법률 제2조가 헌법 제37조 제2항의 과잉금지원칙에서 벗어나 교원의 헌법상 보장된 단결권을 침해하고 헌법 제11조의 평등원칙에 위반하여 교원의 평등권을 침해하는 위헌적인 조항이라고 의심할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이로써 전교조에 대한 정부의 공세는 잠정 중단되게 되었고, 이른바 진보 교육감에 대한 정부의 흔들기도 당분간은 중지되게 되었다. 서울고등법원은 상식적 판결을 통해 우리 사회의 큰 대립과 갈등을 일단 진정시키는 용기를 보여주었다.

마지막은 현대자동차 비정규노동자들에 대한 고용의제 및 고용의무에 대한 판결이었다. 서울중앙지방법원은 현대자동차의 사내 하청 업체들이 고용한 노동자들은 사실상 현대자동차에 불법파견된 사람들이므로 현대자동차에 이미 고용되었거나 현대자동차가 이들을 고용할 의무가 있다고 판결하였다. 이로써 약 1,200명의 노동자들이 현대자동차의 정식 노동자가 되었다. 2000년대 초반부터 현대자동차의 불법파견 논란이 일었으므로 그에 대한 결론이 10년이 넘어서야 내려진 것인데, 다행히도 그 결론은 해피엔딩이었다. 물론 아직 완전한 해피와 종국적 엔딩은 아니다.

지난 1개월간의 이 판결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노동자들의 중요한 문제가 대부분 포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노동조합의 단결권(재능교육 사건, 전교조 사건), 단체행동권(철도노조 사건), 간접고용과 불법파견의 문제(현대자동차 사건), 업무상 재해의 문제(삼성반도체 사건)가 위 판결들을 통해 다루어졌다. 임금 문제 정도가 빠져 있는데, 지난 연말에 통상임금 판결이 선고되었으므로 이 문제 역시 불과 얼마 전에 법원에서 다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지난 1개월간 노동 관련 판결이 숨 가쁘게 선고되었다. 판결들 중에서는 노동자들에게 기쁨을 준 것도 있고 슬픔을 안겨 준 것도 있다. 법원 판결은 심급에 따라, 판사에 따라, 시기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므로 그에 일희일비해서 안 된다는 것은 자명하다. 다만, 노동자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문제의 결론이 오롯이 법원의 결정에 좌우된다는 것은 매우 개탄할 만한 일이다. 노동문제에 있어서 노동자가 최종 처분권을 가지는 경우는 거의 없으므로 소송을 제기한 주체가 노동자라고 해도 실은 그 소송은 사용자나 정부가 제기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것은 곧 노동문제를 도발하는 주체가 사용자와 정부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들의 도발의 끝은 과연 어디까지일까?


간접고용 확산 방지를 위한 법원의 판결과 노동자의 역할

향후 법원의 판결 중 가장 주목되는 것은 삼성전자서비스의 하청업체 소속 노동자들의 사용자를 누구로 결정하는가이다. 현재 간접고용 노동자들의 문제가 봇물처럼 터져 나오고 있다. 얼마 전 종료된 삼성전자서비스의 하청업체 노동자들의 파업이 그 대표적인 것이고, 씨앤앰과 티브로드 하청업체 노동자들의 파업, 인천공항공사의 외주업체 변경을 둘러싼 갈등 등이 꼬리를 물고 있다. 언론에 알려지지 않고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고 있어도, 오늘도 어느 대학의 청소업체나어느 아파트의 관리업체에 소속된 노동자들이 노동3권은커녕 기본적인 인권조차도 보장받지 못하고 있을 수 있다. 그런 문제는 비단 간접고용 업체에서만 발생하는 것은 아니지만 간접고용 업체에서는 그런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이 아주 높고, 그런 문제의 발생이 제도적으로 뒷받침되고 있다는 점에서 더 큰 문제이다. 현대자동차 사내하청업체의 노동자들은 법원 판결을 통해 직접 고용이 될 수 있었지만, ‘사내하청업체가 아닌 다른 사업체의 경우 그런 판결을 받을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 그래서 삼성전자서비스 하청업체에 관한 판결이 중요하다. 법원이 이 사건에서도 현대자동차 사건에서와 같은 판결을 내려준다면 우리 사회에서 간접고용이 지금처럼 잡초 자라듯이 번져가는 현상은 막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법원 판결만 기다리고 있는 것은 노동자가 해야 할 일이 아니다. 노동자는 일차적으로는 사업장에서 간접고용이 근절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자신이 정규직이면 단체협약을 통해 그런 방안을 마련해야 할 것이고, 비정규직이면 진짜 사장을 상대로 지속적으로 단체교섭을 요구하여야 할 것이다. 그 다음으로는 간접고용을 근절하고 그 폐해를 줄일 수 있는 입법안을 마련하는 일에 나서야 할 것이다. 간접고용과 관련해서는 새누리당도 입법안을 제출해 놓았고(사내 하도급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안), 새정치민주연합과 진보정당에서도 입법안을 제출해 놓았다(은수미 의원과 심상정 의원의 근로기준법 개정안 및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개정안 등). 노동자들이 입법을 통해 쟁취해야 할 것은 특수한 기술을 요하고 일시적인 작업이 아닌 한 간접고용을 금지시키는 것이다. 한편 그것이 어렵거나 이미 행해진 간접고용에 대해서는 하청업체를 변경하는 경우에도 노동자의 고용은 반드시 승계하도록 하고, 단체교섭과 부당노동행위에 대한 책임의 주체는 사용자임을 명시하도록 하며, 무엇보다 직접고용 노동자와 하청업체 노동자 간의 차별을 금지시키는 것이다.


삶의 중심인 노동, 걸맞는 지위를 회복해야

한 진보정당에서 노동 중심성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노동을 여전히 중심에 놓아야 한다는 입장과 이제는 다른 의제들을 중심에 놓아야 한다는 입장이 서로 대립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 논의에 끼어들려는 것은 아니지만, 정치적 의제에 있어서 노동 중심성을 어떻게 다루느냐와 관계없이 우리 삶에 있어서 노동은 이미 중심에 들어와 있음이 분명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루에 가장 많은 시간을 들이는 일이 무엇이고 가장 오래 머무는 곳이 어디인지를 생각해보면 노동이 삶의 중심이라는 것은 자명한 것이다. 이토록 중요한 노동이 천시되고 있는 것이 우리 사회의 가장 큰 역설이자 모순이다. 이제 노동에 그 역할에 걸맞는 지위를 회복시켜야 한다. 노동하는 과정에 민주화와 기본적 인권이 보장되는 것, 그것이 노동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이를 막는 모든 제도와 관습은 척결되고 폐기되어야 한다. 사회적으로 큰 관심을 받지 못하고 법원에 갈 엄두도 못 내는, 비민주적이고 기본권 인권도 보장받지 못하는 노동이 우리 주변에는 엄청나게 많이 널려 있다. 인부, 잡부, 일꾼, 김 씨, 박 씨, 이 양, 강 양, 비정규직으로 불리는 모든 노동에 민주화와 기본적 인권이라는 중심이 회복되어야 한다. 이는 21세기 자본의 저자인 토마 피케티 프랑스 파리경제대 교수가 역설하는, “자본주의를 공익 아래 두기 위한 민주적 장치를 재고해야 한다.”라는 주장의 다른 표현일 따름이다.노동의 종말이라는 담론이 한때 유행했지만 노동에는 종말이 있을 리가 없다. 오직 있다면 노동자의 종말만이 있을 것인데 그것은 결코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 노동자의 종말은 세계의 종말일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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