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여(剩餘)와 여가(餘暇)

by 센터 posted Jul 23,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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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종찬 | 서울동부비정규노동센터, 공동대표, 센터 부소장


꼭 이맘때가 되면 등장하는 기사가 있다. 올해도 어김없이···.

‘직장인을 대상으로 올해 여름휴가 계획을 물었더니 81퍼센트가 여름휴가를 간다고 응답했고, 기간은 3일이 제일 많았고, 휴가 비용은 기혼자는 평균 77만 원, 미혼자는 평균 52만 원이며, 해외여행은 23퍼센트로 지난해보다 늘었다’는 내용의 기사다.


기사 얘기가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올해는 또 하나의 특징이 있다. 이른바 ‘내수 진작’이다. 동아일보 사설은 ‘우리 경제에 먹구름이 잔뜩 낀 것은 수출 부진과 내수 침체가 겹쳤기 때문이다. 여기에 메르스 충격까지 더해지면서 소비 심리는 꽁꽁 얼어붙었다’고 진단하면서 ‘경제를 정상궤도에 올리기 위해서는 소비 심리가 중요하다. 국민들이 일상으로 돌아가는 일이 절실하다. 외환위기 때 온 국민이 금 모으기에 나섰듯이 국내 여행을 장려해 경제를 살리고 국민 전체가 하나가 되는 공동체 의식을 다질 필요가 있다. 내 나라에서 보내는 여름휴가가 첫걸음이다’라고 주장한다. 거참···. ‘외환위기 때 온 국민이 금 모으기에 나섰듯이’란다.


오래전에···. 대학을 다녔던 이력을 빼고 제법 큰 공장에  들어갔는데, 요샛말로 ‘파견 근로자’로 들어갔다. 열심히 일하면 정직원시켜준다는 말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고. 차별? 당연히 있었다. 하지만 같이 일하는 사람들 - 특히 나 같은 초보들 사이에선 정규직이든 비정규직이든 별다른 틈은 없었다. 퇴근하면 같이 어울리고 쉬는 날이면 하루 종일 뭉쳐 다니며 놀던 차에 맞은 여름휴가. 역시 대여섯 명이 뭉쳤다. 망상해수욕장에 2박 3일 머물렀는데, 당시에 필름 넣고 찍던 카메라로 인화한 사진이 아직도 있다. 그 오글거림(?)은 웬만한 분들은 다 경험이 있을 듯하다.


젊은 시절 휴가지의 추억거리야 다 있듯이 우리 또한 어처구니없는 일들도 있었다. 총무를 맡은 친구가 지갑을 잃어버리는 통에 돈과 예매한 고속버스 표를 몽땅 잃어버리고 버스터미널에서 우리가 타야할 버스가 출발하기 직전까지 아무도 타지 않는 좌석을 가리키며 “봐요. 우리 자리라니까요. 버스표를 잃어버린 건데 그냥 좀 탑시다”라고 통사정을 해봐도 소용없었던 일 같은 것들.


그런데 나로선 더 당황스런 일이 있었던 것이, 바로 그 해수욕장에서 내가 다니던 대학교 정문 앞에 있던 문방구 아저씨를 딱 마주친 것이다. 나름 감춰진 신분이 있는데, 그걸 들통 낼만한 사람을 만났으니 그 당혹스러움이란···. 아저씨는 당연히 반갑게 아는 체하는데, 난 버벅거리고 빨리 지나치려고만 했으니 얼마나 이상하게 봤을까. 사실 친구들끼리 해수욕장에 놀러온 거 그뿐이었는데 말이다.


당시에도 소득 격차에 따른 휴가 풍속도의 차이는 있었겠지만, 기억나는 가장 많은 기사는 ‘과소비 경제’였던 것 같다. 그런데 지금은 ‘소비 진작’이다. 이 차이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얼마 전 타임지는 ‘무엇이 여름휴가를 없앴는가?’라는 제목으로 한산한 행락지의 사진을 표지로 걸었다 한다. 미국에서도 ‘휴가와 복지를 보장해 주는 좋은 직장’이 사라졌으니 행락객도 당연히 줄 수밖에 없다는 거다.


우리나라에서 과거 근검 절약이 미덕인 시대는 개인들이 저축을 함으로써 산업화를 위한 자본을 마련했고, 일정하게 산업화가 이뤄지고 노동자들은 컬러텔레비전을 사고, 냉장고를 사고, 자동차를 사고, 집을 사야 했다. 그렇게 해서 굴지의 기업들이 생겨났다. 이렇게 커진 기업들은 좁아터진 국내 시장이 아니라 세계 시장으로 나아갔다. 외국에는 우리에게 익숙한 한국 기업들의 광고판이 들어서고 ‘국력 신장’에 가슴 뿌듯한 애국심도 생겨났다.


그런데 이제는 자동차를 사고, 집을 샀던 노동자들이 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다고 한다. 귀족노동자들의 몽니 때문에 청년 세대 신규 일자리를 못 만든다는 것이다. 또 다른 논리도 있다. 격화되는 국제 경쟁 속에서 기업이 변화에 즉각적으로 반응하기 위해선 노동 시장이 탄력적이어야 한단다. 핵심 업무를 제외한 나머지는 외주화하고 해고는 자유롭게 해야 한단다. 그들의 계획대로 이제 일자리에는 커다란 계곡이 생겼다. 이른바 중심부 노동 시장과 주변부 노동 시장. 말이 좋아 주변부 노동 시장이지 시나브로 ‘호출근로’화 하고 있다. 이런 구조에서 일자리에 안착하지 못하는 청년 세대는 스스로를 일컬어 ‘잉여인간’이라 한다. 남는 사람? 필요하지 않은 사람?


언젠가부터 난 주위 사람들에게 휴가 계획을 잘 묻지 않는다. 기껏 묻는 것이 그 직장의 휴가 일정이나 유·무급 여부 정도? 아이들이 있는 집에서는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기 위해 적당한 장소와 시간을 물색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꼭 여름휴가가 아니더라도 개개인의 형편에 맞게 여행을 계획하고 떠난다. 어떤 면에서는 최선을 다해서 ‘소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소비 심리가 꽁꽁 얼어붙었다고? 금 모으기를 했던 것처럼 좀 쓰자고? 공동체 의식을 갖자고? 이거··· 왜들 이러시나? 스스로 ‘잉여인간’이라고 자조(自嘲)하는 이들에게 이제는 후안무치(厚顔無恥)한 놈들이라고 비난하는 것인가? 아니면 그야말로 공동체가 생산한 재화를 소수의 독점한 사람들이 쓰려는데 엄청나게 화려한 휴가를 보내더라도 다 나라 경제를 위해서 하는 일이니 비난하지 말라는 사전 정지 작업인가?


다들 하는 얘기지만, 휴가는 휴식이고 재충전이다. 좀 극단적으로 비유하자면, 밥 먹고 밥그릇 설거지해야 다음 끼니 때 또 그 그릇 쓸 거 아닌가? 그런데 밥그릇 사용 못했으면 설거지할 일 없잖은가?


어떤 조사에서는 비정규직의 90퍼센트가 여름휴가 빠진 날만큼 월급을 못 받았다고 한다. 올해 최저임금위원회에서는 최저 임금을 고지할 때, 시급과 더불어 월급을 병기하자는 공익위원의 제안 때문에 사용자위원이 집단 퇴장하고 회의를 거부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왜? 주휴수당 문제가 드러나기 때문이었다. 이쯤 되면 노동자들은 쉬기 위해 투쟁한다고 볼 수 있을 지경이다.


앞에 예를 든 기사에 따르면 올해 미혼 직장인의 평균 여름휴가 비용은 52만 원이란다. 올해 단신가구 최저 생계비는 약 62만 원이고 현금 급여 기준으로는 50만 원이다. ‘평균’이지만 한 달 살 돈을 며칠간의 여름휴가 비용으로 사용한다는 게다. 소비 심리 위축이 아니라 소비 여력이 없다고 보는 것이 마땅하다.


이보다 더 우려스러운 것은 휴가조차도 소비와 같은 경제적 측면에서만 본다는 것이다. 여기에 사람은 없다. 존엄도 가치도 없다. 그저 정책에 반응하는 경제 주체가 있을 뿐이다.


‘잉여 사람’은 없다. 현대 사회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타인의 노동에 의지해 살아간다고 하지 않는가? 반면에 소수의 사람들  곳간엔 ‘잉여’가 있다. 그들의 곳간에 잉여가 생긴 것은 ‘배제’ 때문이리라. 그런데 모든 사람들의 경제 활동으로 인해 생산된 재화를 독점하고 약자들을 배제시키고 점유하고 있는 것을 잉여라 할 수 있을까? 성경엔 이런 비유가 있다. 어느 부자가 농사가 잘되어 곳간이 차고 넘치니 작은 곳간을 헐고 넓고 커다란 곳간을 지어 곡식과 물건을 잔뜩 쌓아 놓고 이제 평안히 놀고먹자고 생각하는데, 과연 이 곳간의 곡식과 물건이 이 부자의 것일까? 라는 질문을 던진다. 부자들에게 도덕을 회복하자는 얘기도 아니고 그럴 생각도 없다. 다만, 포기하지 말자라고나 할까.


얼마 전에 어느 목사님께서 “우리끼리 매주 토요일은 연대요일이라고 정해보면 어떻겠소?”라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앞서 타임지나 국내 얘기를 들어가며 비정규직·청년 실업이 난무하는 상황에서 헛다리짚는 여름휴가 얘기는 하지 말자고 했다. 결국은 제대로 된 일자리를 제공하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라는 결론에 이를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 더 생각해 볼 문제는 ‘휴가와 복지가 보장되는 좋은 직장’이면 제대로 된 휴가를 가질 수 있는가 하는 문제다. 어느 목사님의 말씀처럼 휴가·여가, 이런 것들이 위로와 유대감과 연대를 회복하는 시간과 기회가 더 많아지기를 바란다.

오랜만에 여름휴가 계획을 세워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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