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 교육] 학습 없는 운동의 앞날은?

by 센터 posted Apr 28,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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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장현|평등사회노동교육원 원장



노동자 학습 운동의 씨앗 뿌린 전태일


‘逐條 勤勞基準法 解說’, 무슨 뜻일까? 해독할 수 없는 암호문을 앞에 놓고 스무 살 청년 전태일은 눈앞이 캄캄했을 것이다. ‘축조 근로기준법 해설’이라고 읽고, ‘한 조목씩 차례대로 쉽게 해설한 근로 기준법’이라고 풀이할 수 있다. 그러나 초등학교도 변변하게 졸업하지 못한 노동자가 ‘쉽게’ 읽고 풀이할 수 있는 책은 결코 아니었다. 한자투성이의 근로 기준법 해설을 읽어나가기 위하여 전태일은 수많은 밤을 뜬눈으로 밝혀야 했고, 그럴 때마다 이런 한탄과 함께 책장을 넘겼다. “왜 나에게는 대학생 친구도 한 사람 없을까?”


전태일의 삶은 두 시기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근로 기준법을 학습하기 전의 전태일은 그저 한 사람의 노동자였다. 가끔 차비를 털어 나이 어린 시다들에게 풀빵을 사줄 정도로 마음씨가 따뜻했지만, 더 이상 어찌 해볼 수 없었던 한 사람의 재단사였을 뿐이다. 그러나 근로 기준법 학습과 더불어 전태일의 삶은 송두리째 바뀌게 된다. 한 사람의 노동자에서 한 사람의 활동가로 변모했으며, ‘바보회’와 ‘삼동회’를 만드는 조직가로 발전했으며, 마침내 노동해방·인간해방의 불꽃으로 타오르게 된다.


전태일이 남긴 일기와 수기를 읽어보면, 그가 얼마나 공부에 목말라 했으며 얼마나 필사적으로 공부했는가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런 학습이 없었더라면 과연 전태일이 한 사람의 노동자에서 한 사람의 활동가로 변모할 수 있었을까? 그가 ‘대학생 친구’의 도움도 없이 혼자 힘으로 지새운 수많은 학습의 밤들이 없었더라면 한국 노동 운동의 역사가 다시 시작될 수 있었을까?


노동자 학습 운동의 싹을 틔운 이소선 어머니


전태일이 뿌린 노동자 학습 운동의 씨앗은 1970년대의 동토 속에서도 얼어 죽지 않고 여기저기서 싹을 틔웠다. 가장 먼저 그의 뒤를 이은 사람은 아들의 죽음을 지켜본 어머니였다. ‘전태일의 어머니’에서 ‘노동 운동 활동가’로 변모한 이소선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청계피복노조와 노동교실을 설립한 것이었다. 노동교실은 원풍모방노조(72년), 동일방직노조(72년), 반도상사노조(74년), YH무역노조(75년) 등 1970년대의 대표적인 민주노조 운동을 길러내는 온상이되었다. 


한편, 전태일의 분신 투쟁과 청계피복노조의 노동교실은 1970년대에 새로운 노동자 학습 운동의 물꼬를 텄다. 한 쪽에는 기독교 단체들이 나서서 교회 안팎에서 노동자들에게 ‘그나마 안전한’ 학습 공간을 마련해주었다. 도시산업선교회, 가톨릭노동사목회 등이 군부독재의 철통같은 감시와 탄압을 무릅쓰면서 노동자들에게 제공해준 여러 가지 학습 프로그램은 1970년대 민주노조 운동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다른 한 쪽에는 대학생들이 이곳저곳에서 주도한 노동야학이 있었다.


골방학습 시대


1980년 광주민중항쟁의 피비린내는 노동자 학습 운동에 획기적인 전기를 가져왔다. 불과 몇 년 사이에 1만 명이 넘는 대학생들이 ‘현장으로 존재 이전’을 단행하였고, 그와 함께 노동자 학습 운동은 질적으로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게 된다.


학출(학생 출신) 노동자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공장 안팎에서 선진노동자들과 함께 학습 모임을 꾸리는 일이었다. 전국적으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곳에서 이른바 ‘골방학습’이 진행되었고, 노동 운동 활동가 집단이 형성되어 갔다. 이런 ‘골방학습 시대’가 선행하지 않았더라면 1985년 구로동맹 파업과 대우자동차 파업, 그리고 1986년 인천 5.3항쟁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마침내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이 터져 나올 수 있었을까?


1987년 대투쟁을 통하여 역사의 무대에 다시 등장한 노동자계급은 ‘불법’이라는 굴레를 깨뜨리기 위해 10년 동안 투쟁해야 했다. 1990년 결성되어 1995년 해산한 전노협(전국노동조합협의회)은 신군부와 독점자본의 집중적인 탄압을 뚫고나가야 했다. 골방학습을 통하여 형성된 활동가 집단이 없었더라면 아마 불가능했을 것이다. 1995년 결성된 민주노총도 처음에는 ‘불법단체’라는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다.


새로운 단계로 접어든 노동자 학습 운동


1996~97년 노동법 개정 총파업과 1997~98년 IMF 사태는 노동 운동의 지형을 근본적으로 변모시켰으며, 그와 더불어 노동자 학습 운동도 질적으로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게 된다.


노개투(노동법 개악 저지 투쟁) 총파업은 정리해고법과 비정규직법을 민주노총 합법화와 맞바꾸는 식으로 끝이 났다. 민주노총이 ‘불법단체’의 굴레를 벗게 됨으로써 산하 민주노조들에게도 합법적인 활동의 권리가 부여되었다. 합법적인 단체 교섭을 통하여 임금 등 노동 조건을 향상시킬 수 있는 권리를 갖게 되면서 민주노조 운동은 이제 ‘투쟁의 시대’에서 ‘협상의 시대’로, ‘활동가들의 시대’에서 ‘노조 간부들의 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전환은 이미 그전부터 조금씩 진행되고 있었다. 민주노조의 성장과 더불어 활동가들의 위상은 점차 약화되고 있었으며, 1993년에 민주노총 준비조직 성격을 띠었던 전노대(전국노동조합대표자협의회)가 결성될 당시에 이미 전국노운협(전국노동운동단체협의회)이 배제될 정도였다. 이런 시대 전환을 최종적으로 확인하는 계기로 작용한 것이 민주노총의 합법화였다.


한편, 1990년대 초에 진행된 소련·동유럽 사회주의 진영의 몰락도 노동 운동 활동가 집단의 재구성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80년대에 노동해방의 꿈을 품고 밀물처럼 노동현장으로 몰려왔던 학출 노동자들은 현실사회주의 진영의 몰락을 보면서 자신들의 선택에 의문을 품게 되었고, 마침내 노동해방의 꿈을 잃어버린 대다수 학출 노동자들은 90년대 전반기에 다시 썰물처럼 노동현장을 빠져나가게 된다. “학출들은 엉덩이를 털고 일어서면 돌아갈 곳이 있다”는 노동자들의 우려가 진실로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심지어 자본과 정권의 품안으로 투항해 들어가서 그들의 앞잡이 노릇을 하게 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그들이 떠나고 난 빈자리를 채우는 것은 온전히 노동자들의 몫으로 남았다.


새로운 주체로 나서게 된 비정규직 노동자


1987년부터 10년 동안 수세국면에 있던 자본과 정권은 IMF사태를 계기로 대반격의 기회를 잡았고, ‘노동 시장 유연화’라는 신종 무기를 휘두르면서 민주노조 운동을 와해시켜 나갔다. ‘비정규직’이라는 새로운 이름이 노동자 두 명 중 한 명의 이마빡에 붙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철밥통’에 대한 노동자들의 믿음은 깨져버렸고, ‘벌 수 있을 때 벌자’는 의식이 노동자들을 사로잡기 시작했다. 그 밑바닥에는 공포 의식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하루아침에 수세로 몰린 노동 운동은 산별노조 건설과 정치세력화를 통하여 난국을 타개하고자 했다. 거리로 내몰린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노동 운동의 새로운 주체로 나서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1999년 한라중공업 사내하청노조와 재능교육 학습지노조가 선두에 섰고, 이듬해 한국통신 계약직노조와 KBS 계약직노조가 뒤를 이었다.    


요컨대, IMF 사태와 더불어 ‘1987년 노동체제’가 무너지고 ‘신자유주의 노동체제’가 수립되는 대전환이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수많은 이론가들과 실천가들이 이미 IMF 사태 당시부터 이 점을 지적하기 시작하였고, 지금도 여전히 그렇게 평가하고 있다. 한편, 이 시기는 노동자 학습 운동에도 일대 전환이 필요한 시기였다. 노동 운동에 새로운 시대적 도전이 닥쳐왔지만, 이미 활동가 집단이 고갈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노동 운동은 이 점을 자각하지 못하였고, 지금도 여전히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활동가 길러낼 노동자 학습 운동 필요


민주노조가 합법화되면서 수많은 간부 자리가 생겨났다. 주먹구구로 계산하더라도 조합원 20명 당 1명의 간부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민주노조 안에 간부들을 양성하고 훈련하는 곳은 별로 없었다. 한때 100개가 넘었다는 노동 운동 단체와 노동 교육 단체는 90년대에 학출 활동가들이 철수하면서 대부분 문을 닫아버렸다. 이제부터는 민주노조가 스스로 자신의 활동가들을 길러내야 했다. 이제 그럴 정도의 힘도 있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20년이 지났지만 아직 대다수 민주노조 집행부는 간부 교육의 필요성조차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


한편, IMF 사태와 더불어 시작된 대전환 속에서 노동 운동은 양적으로 ‘더 많은’ 활동가들을 필요로 했을 뿐만 아니라, 질적으로 ‘새로운’ 활동가들을 필요로 하였다. 산별노조 운동은 그에 걸맞은 신념과 역량을 갖춘 활동가를 필요로 했고, 정치세력화 운동에 걸맞은 활동가를 필요로 했다. 비정규직 조직화 운동도 그에 걸맞은 활동가를 요구했다.


그러나 그런 활동가들을 길러내야 할 노동자 학습 운동은 지난 20년 동안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아직까지 기업별노조의 전통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단위노조들이야 그렇다고 치더라도, 산별노조나 민주노총조차도 체계적인 활동가 양성 프로그램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태가 지속되면서 차차 ‘학습과 신념의 시대’가 저물고 ‘짠밥과 통밥의 시대’가 열리게 된다.


지난 20년 동안 노동자 학습 운동의 맥이 끊어졌고, 새로운 활동가집단이 생겨나지 않았다는 증거는 곳곳에서 노출되고 있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는 간부 자리를 채우기 어려워하고 있는 노동조합들이 수두룩하다. 제비뽑기를 하여 간부를 선출하는 곳도 수두룩하고, 그렇게라도 하여 간부 자리를 채우지 못한 채 비워두고 있는 곳도 수두룩하다.


최근에는 새로운 증거들도 나타나고 있다. 정년퇴직을 바로 코앞에 둔 골방학습 세대가 다시 일선으로 복귀하여 위원장 자리 등을 맡고 있는 것이다. 노욕일까? 후배들을 믿을 수 없다는 뜻일까? 후배들을 키워서 맡기기에는 이미 너무 늦었다는 뜻일까? 학습 없는 우리 노동 운동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과연 지속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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