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비정규 노동 수기 공모전 당선작] 나는 행복하기 위해서 투쟁했다

by 센터 posted Jan 26,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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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여민희 학습지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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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비정규 노동 수기 공모전 시상식에서 상을 받은 여민희 씨 (사진 가운데)


“나는 행복하기 위해서 투쟁합니다. 현장에서 재능선생님으로, 노동조합 조합원으로 일을 할 때가 가장 행복했습니다. 내가 행복할 때 동료들도 같이 행복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다시 행복해지기 위해 반드시 노동조합 조합원으로 현장에 돌아가고 싶습니다.”


발언을 하거나, 인터뷰를 할 때 나는 행복해지고 싶다는 말을 정말 많이 했다. 그래서 가끔씩 생각한다. 노동조합원 재능선생님인 나는 지금 행복한가?


1999년 재능교육 정규직 사원 파업, 11월 재능교육 교사노동조합 설립, 12월 재능교육 교사노동조합 조합원 33일 파업. 1998년 2월에 재능교육에 위탁계약직 학습지교사로 입사한 지 2년이 되어갈 무렵 내 인생이 바뀐 사건들이다. 그 당시에만 해도 경기남부권역에 꽤 이름을 날리던 재능선생님이었다. 개인 실적, 팀 실적이 상위권을 유지했고, 상품에 대한 교육도 잘했기 때문에 선배들이 말하던 정사원 발탁 0순위 대상자였다. 1차 파업이 끝나고 입사 후 줄곧 품어왔던 정사원 선발의 기회가 주어졌으나 함께 파업에 참가했던 선배들을 위해 포기했다. 그것이 의리라 생각했고 나는 다음을 기약했다. 선배들은 정사원이 되지 못했고 그 선발 과정 이후 회사에서는 꽤 오랜 기간 정사원 선발을 하지 않았다. 정규직 대신 사업부제(계약직) 팀장 제도를 운영하였고 선배들은 노동조합을 탈퇴하고 사업부제 팀장이 되었다. 탈퇴한 선배들을 보면서 의리를 지키겠다고 정사원 선발의 기회를 포기한 것을 두고두고 후회했다.


몇 년이 지나고 정사원 선발 제도가 다시 만들어졌다. 함께 정사원의 꿈을키워왔던 동료와 후배들이 하나둘씩 정사원이 되었다. 반면, 나는 노동조합의 반전임 활동을 하느라 수업을 3일밖에 하지 못해 수입도 상당히 줄었고 정사원의 꿈은 생각하지도 못했다. 겉으로는 의리를 지키고 바른 일을 하고 있다며 당당한 척 했지만 꿈을 접은 내 자신의 초라한 모습이 부끄러울 때가 많았다. 그러다 내게 정사원 발탁 제안이 들어왔다. 대신 노동조합을 탈퇴해야지만 정사원 지원을 할 수 있다고 했다. 지원 자격에 탈퇴가 우선인 것이 말도되지 않는다며 그건 못한다고 큰소리를 쳤지만, 고민에 빠졌다. 노동조합 간부를 하던 사람이 탈퇴를 하고 정사원 지원을 한다는 것은 내게도, 노동조합에도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선생님으로 조합원 자격은 가질 수 없지만 정사원이 되어 정사원노조에 가입하면 문제될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노동조합 동지들이 말렸다. 정사원 지원을 하지 않고 그냥 교사로 현장에 남아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이해는 하면서도 그 말이 무척 섭섭했고, 타인의 삶에는 배려도 없는 이기적인 사람들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한 동지가 이런 말을 했다.

 “살면서 평생 함께할 사람들을 만나기란 쉽지 않은데 나는 지금 그런 사람들을 만나고 있는 것 같아. 노동조합으로 함께하며 만난 사람들, 어딜 가도 이런 사람들을 만날 수는 없잖아. 물론 수입이 줄고 어려움도 있지만 사람이 가장 큰 재산이 아닐까? 너도 그렇게 생각했으면 좋겠어.”

이 말을 듣고 펑펑 울었다. 그리고 그날, 평생 함께할 수 있으리라 믿는 사람들과 26세에 재능교육에 입사하면서부터 가져왔던 7여 년의 꿈을 맞바꾸었다. 노동조합 반전임을 해제하고 현장으로 복귀했는데 수업을 할 회원을 더 줄 수 없다고 했다. 노동조합 간부였기 때문에 관리자의 입장이 곤란하다는 이유였다. 그렇게 어렵게 현장에 정착하고 시간이 지나면서 3일이었던 수업이 5일로 늘어났고 시상으로 해외연수도 다녀왔다.


그렇게 현장조합원으로 익숙해질 2년의 시간이 지날 무렵, 노동조합에서 단체 협약 합의안이 나왔다는 소리가 들렸다. 기쁜 마음으로 접한 합의안에는 재능교사들의 수수료가 삭감되는 제도가 있었다. 현장으로 복귀했던 예전의 간부들이 모여 의견을 나누고 집행부에 항의했다. 그러나 돌아온 답변은 회사에서 시뮬레이션을 충분히 돌렸고 그것을 확인했으며 삭감되는 안이 아니라고 확언했다. 그때부터 우리는 수수료제도의 문제점을 알리기 위해 조합원을 만나고 설득하러 다녔다. 그러나 단체 협약 합의안은 전체 조합원 찬반투표에서 아슬아슬하게 가결되었다. 얼마 후에 알게 되었지만, 투표 과정에서 부정이 있었고 그것이 결과에 반영되어 가결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노동조합과 회사는 2007년 단체 협약 조인식을 가졌다. 반대를 했던 조합원들은 새로운 수수료제도로 변경된 계약서에 서명을 하지 않았다.


수수료제도가 시행되자, 첫 달부터 임금이 삭감된 현장 교사들의 아우성이 터져 나왔다. 부정투표와 삭감된 임금으로 단체 협약을 체결한 재능지부 집행부가 사퇴하고 단체 협약 부결을 주도했던 조합원들이 비대위를 구성했다. 곧바로 단체 협약 재교섭을 요구했다. 뜻대로 개악된 수수료제도로 변경한 회사는 노동조합의 재교섭에 응하지 않았다. 수수료 삭감에 반대하는 현장 교사들이 서명을 하고 본사에 항의서한을 전하고 이렇게 몇 달이 지나도록 꿈쩍도 하지 않는 회사에 등을 돌리며 조합원들이 하나둘씩 현장을 떠나기 시작했다. 수수료 삭감으로 생계가 곤란해져서 떠나는 조합원들을 붙잡을 수 없던 새 집행부는 결단을 내렸다.


2007년 12월 21일 혜화동 재능교육 본사 앞, 집회를 마치고 그날부터 농성에 들어가기 위해 천막을 펼쳤다. 회사 건물에서 대기하던 구사대가 무섭게 달려들었다. 그날 구사대의 폭력에 전치 2주의 부상을 당했고 회사에 6개월 일시계약정지 신청을 했다. 당시 세 명의 전임조합원으로는 농성장을 유지하기 어려운 상황이었기 때문에 지부장을 돕겠다고 먼저 이야기를 했고 노동조합에 힘을 보태기 위해서 10여 년을 일했던 현장과 작별 인사도 나누지 못했다. 6개월이 지나면 당연히 복귀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현장으로 돌아가기까지 6년이 걸렸다. 그렇게 6년 재능투쟁이 시작되었고 가장 먼저 해고자가 되었다.


혜화동 농성장을 지키던 네 명의 전임조합원 중 가장 많은 시간을 농성장에 있었기 때문에 그만큼 가장 많은 시간이 구사대의 폭력에 노출되었다. 어떤 날에는 손바닥이 찢어져 피가 흐르는 줄도 모른 채, 천막을 찢고 피켓을 훔쳐가는 수십 명의 구사대와 혼자 싸웠다. 여러 사람들이 어울려 걷는 발자국 소리만 들어도 구사대가 몰려나오는 듯싶어 온몸에 소름이 돋고 손발이 굳었다. 일주일에 한두 번씩 들고 나오는 구사대의 칼과 가위는 언제나 나를 겨냥해 있는 것 같았다. 정신 나간 채 살려달라고 8차선 도로를 왔다갔다 뛰어다니기도 하고, 고가도로 난간에 올라앉아 깨진 플라스틱 조각으로 손목을 수차례 긋기도 했다. 내 감정과 상태를 추스를 여유도 없이 앉아서 지키고 누워서 잠을 자야 하는 농성장이었다. 이런 재능교육이 너무나 끔찍했고 혜화동은 말이 필요 없는 무간지옥이었다.


이러다 미치거나 죽을 것 같았다. 그리고 이곳을 떠나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생계를 이유로 댔지만 재능교육을 잊고 살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다른 직장을 구했지만, 떠나지도 못한 채 선전전을 하고 집회에 참석을 하고 일 때문에 지방을 다니면서 휴게소에 차를 세우고 쪽잠을 잤다. 몸은 너무나 고되었지만 그나마 숨을 쉴 수 있어 죽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렇다고 평화가 주어지지는 않았다. 구사대가 빠지고 용역 깡패가 등장했다. 용역 깡패가 미세하게 뚫어놓은 두 개의 자동차 바퀴에 바람이 빠지면서 고속도로에서 차가 거의 주저앉았고 고속도로 경찰대가 출동했다. 속력을 내고 달린 상황이었다면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것이다.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음담패설과 성희롱, 미행을 하고 생명을 위협하던 용역깡패들을 버티는 동안 재능교육에서 가압류 신청을 하여 거래중지 상태로 은행거래를 할 수 없게 되었고 가처분을 이유로 재능교육이 채무불이행자 등재 신청을 해서 신용불량자가 되었다. 집회를 하다가 공권력에 갇힌 상황에서 지부장을 먼저 빼내고 남아 구속을 당했고 구치소에서 수감 생활을 했다. 악마 같은 재능 자본 덕분에 난생 처음 겪어야 했던 일들, 평생 겪지 않고도 지낼 수도 있었던 일들을 겪었던 곳이 혜화동 농성장이었다.


제정신으로는 버티기 어렵고 외로웠던 혜화동 재능교육본사 앞에서 조합원들은 더 이상 살 수 없어 2010년에 시청 앞 재능사옥 앞 환구단으로 농성장을 옮겼다. 그 무렵 재능자본은 노동조합 활동을 이유로 현장에 남아있던 조합원들을 해고자를 만들었다. 해고투쟁을 하는 조합원은 열두 명이 되었다. 재능지부는 조합재정과 지방의 해고 조합원들의 여건을 고려해 생계를 병행하도록 했다. 그리고 가능한 조합원들이 농성장을 교대로 사수했다. 구청직원들이 몰려와 천막을 철거하는 일이 있었지만, 혜화동에서처럼 구사대나 용역깡패가 몰려와 폭력을 행사하는 일은 거의 없어졌고, SNS 덕분에 농성장으로 지지방문 오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서 예전처럼 외롭지는 않았다. 


매일 저녁 환구단 앞에서 문화제를 했다. 지부장과 학습지 사무처장이 단식을 하고, 연대단위 동지들이 릴레이 단식을 하고, 재능교육 학습지 불매 운동을 하고, 재능교육은 가끔씩 협상안을 던졌다. 그러나 학습지노조 위원장도 요구안에 넣을 수 없다 했던 12년차 해고조합원 복직도 인정한 협상안을 사측이 제시했을 때도 ‘단체 협약’이 빠진 합의안은 받을 수 없다고 조합원들은 결정했다.


길거리 농성장에서 찬바람을 맞아가며 고열로 며칠을 앓다가 중환자실에서 생사의 고비를 넘긴 조합원, 아무 말 하지 못하고 홀로 병원에서 낭종을 떼어내고도 농성장으로 돌아온 조합원, 며칠 연락이 없어 수소문하다보면 병원도 가지 못한 채 집에 쓰러져 있던 조합원, 며칠 병원에 입원해 있다가도 퇴원을 하면서 농성에 빠졌던 것이 미안해서 곧장 농성장으로 달려온 조합원···. 이런 조합원들이 되찾고자 했던 것이 노동조합이고 단체 협약이었다. 가끔 옆에서 지켜보던 연대동지들이 이쯤에서 정리하고 현장으로 들어가는 게 어떻겠냐고 이야기할 때도 단체 협약 없이는 절대 안 된다고 했던 조합원들이었다. 물론 가정사로, 경제적 이유로 고통을 호소하면서 흔들리기도 하고, 포기하려고도 했고 수차례 싸우기도 했다. 그러나 어떻게든 함께하기 위한 방법을 찾으려 했고, 부담을 나누고 서로의 짐을 짊어지면서 한 발자국씩 헤쳐 나왔다.


그러던 중 학습지노조 내부에 폭언, 폭행 사건이 발생했고 진상조사를 하자는 조합원들의 요구가 무시되면서 해고조합원들이 참석하던 지부 회의가 수차례 파행되었다. 오랜 농성에서 지친 심신의 문제, 감정의 문제를 우선 염려하여 문제를 해결해보려고 백방으로 노력했다. 연대동지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도 하고, 심리치료를 받을 수 있는 방법도 찾으려 노력했다. 끝까지 손을 놓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조합원들이 함께하는 투쟁 논의, 지부 회의는 더 이상 진행되지 않았고, 모든 일정은 일방적으로 통보되었다. 오직 조합원들끼리 농성장 배치시간을 조절하고 혜화동 본사 앞 선전전을 진행하고, 현장 선전전을 하면서 우리가 투쟁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그러나 이대로는 노동조합도, 단체 협약도 되찾기 전에 조합원들이 지쳐 포기할 것 같았다. 그렇게 두 달여가 지나던 중 ‘노동조합법상 노동자가 맞다’라는 행정법원의 판결은 우리 투쟁에 희망을 주었다. 다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단체 협약을 체결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이 있을까 조합원들이 모여 고민을 나누었다. “분신밖에 없지 않겠나”며 낮은 목소리로 말을 뱉던 조합원의 눈물을 보았다. 그리고 재능투쟁을 함께했던 연대동지들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재능도 뭔가(전술)를 해야 하지 않겠어? 내부 문제? 그건 어디나 다 있어. 투쟁을 시작하면 조직은 추스를 수 있어. 그건 진리야. 재능은 지금 고강도 투쟁전술이 필요한 시기야. 된다니까. 일단 해봐!”


6년의 투쟁에서 실행 직전에 실패를 하기도 했고, 몇 차례 고민을 하다 포기했던 고공투쟁을 하기로 조합원들이 결의하였다. 내부의 문제 때문에 많은 고민을 했지만 조합원들이 먼저 결의를 하면 모두 함께할 수 있으리라 판단했다. 장소를 결정하고 사람을 확정하고 그동안 조합원들과 함께하지 않았던 전 임원들에게 상황을 전달했다. ‘어떻게 그런 결의를 할 수 있었는지, 애썼네. 그래, 그럼 우리 재능자본과 제대로 한 판 붙어보자.’ 이렇게 기다리던 답변 대신 돌아온 답변은 조합원들을 믿지 못해서 함께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날 밤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포기해야 하나 고민했지만, 그래도 하고 싶었다. 그동안 입버릇처럼 얘기해왔던 노동조합의 조합원인 재능선생님으로 일했던, 그 행복했던 기억을 되찾고 싶었다. 그동안 제대로 투쟁하지 못한 내 스스로의 죄책감을 씻고 싶었다. 주위에서 용기를 주었다. 투쟁에 막상 돌입하면 자본과의 싸움이 목적이니 함께 투쟁할 수 있을 것이라고, 걱정하지 말라고 하였다. 믿었다. 진심은 통한다고 했으니까. 투쟁하겠다는 조합원들의 진심, 그 이상 무엇도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2013년 2월 6일 혜화동성당 종탑 꼭대기에 올랐다. 무섭고 두려움이 컸지만 무엇보다 큰 희망을 가지고 올랐기 때문에 두려움을 누를 수 있었다. 회사를 마주보며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행복하기까지 했다. 종탑에 오른 첫날 가졌던 벅찬 느낌은 뭐라 설명할 수 없었다. 소식을 듣고 깜짝 놀라 달려온 연대 동지들은 걱정을 하면서도 “잘했다”, “이제 재능투쟁 제대로 끝낼 수 있겠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마음을 읽어준 동지들이 고마웠다. 다급해진 사측이 곧바로 교섭요청을 해 왔다.


특집-여민희 사진교체.jpg

재능노조 조합원 오수영 씨와 함께 2013년 혜화동성당 종탑에 올랐다.


그러나 가장 먼저 해결될 것이라 믿었던 내부 문제가 난관에 봉착했다. 투쟁 중이었기에 쉬쉬하던 내부 문제가 제대로 드러나지 않은 상태에서 한 명망가는 투쟁의 주체들이 내부에서 이념분쟁으로 나뉘었기 때문에 좌파원칙주의자인 소수의 편을 지지해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 고강도 투쟁을 결의한 조합원들은 권력에 눈먼 무원칙주의자가 되었다. 그 명망가의 발언은 SNS를 통해 걷잡을 수 없이 퍼졌다. ‘좌파와 우파’, ‘소수와 다수’, ‘재능자본과 결탁한 고공농성’, ‘집행부를 몰아내기 위한 고공농성’, 민주노조 운동에 절대 있을 수 없는 종파주의, 패권주의, 무원칙주의자로 다수가 소수를 배제하기 위해 고공이라는 전술을 선택하고 사측과 적당히 타협하려는 그런 세력들로 평가되었다. 구사대의 폭력을 견딜 때보다 더 끔찍했다. 긴 세월의 재능투쟁에서 조합원들 개개인이 가졌던 어려움, 동지라 믿었기에 토로하고 극복했던 고민들, 부족하더라도 최대치까지 노력했던 조합원들의 활동은 폄하되었고 비난하기 위해 거짓까지 보태어 날개를 달았다. 애당초 조합원들의 진심 따위는 필요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투쟁 의지와 진심만 있으면 통할 거라 생각했던 조합원들은 미련하고 순진했다. 이런 상황을 사측은 판단하고 이용했다. 내부 문제를 빌미로 교섭을 할 수 없다고 했다. 종탑 농성 초기 사측의 태도와는 다르게 몇 개월 동안 교섭을 하지 못했다.


종탑농성이 50일, 100일 하염없이 지나갔다. 생활은 적응이 되었지만,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용변을 제대로 처리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수치심은 나날이 더해 갔다. 초기에 끓는 물을 부어 먹을 수 있는 용기누룽지를 정말 많이 먹었다. 노동조합 재정을 전 집행부 임원들이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끼니걱정을 해야만 했다. 하루에 두 끼를 먹는데, 소화가 되지 않아서 죽을 사서 올려주면 둘이 나눠먹기도 하고, 반으로 나누어 하루 끼니를 해결했다. 비싼 죽값 때문에 조합원들에게 미안해서 용기누룽지를 사달라고 했다.

 “난 누룽지가 좋아, 이게 제일 맛있어.”

대신 지지방문을 온 동지들이 먹고 싶은 것을 얘기하라고 하면 평상시 먹을 수 없었던 비싸고 맛있는 음식을 이야기하였다. 사정을 알게 된 한 단체에서 기금을 모금해서 식사를 챙겨주었고, 한 동지께서 매일 아침 집에서 밥을 챙겨다주기 전까지는 그렇게 끼니를 때웠다. 화장실 대체용으로 사용한 환자용 시트패드와 쓰레기봉투를 아끼기 위해서 배가 한참을 아플 때까지 참기도 했다. 아무리 싼 것을 고른다 해도 비용이 많이 들었고 패드를 왜 이렇게 빨리 쓰냐는 조합원의 지나가는 한마디가 못이 박혔다. 결국 나중에는 병이 생겼다.


많이 어렵고 힘든 시기였다. 무엇보다 마음이 너무 힘들어서 순간순간 모진 생각의 고비를 넘겼다. 발을 헛디뎌 아찔한 순간을 넘기고, 하늘을 쪼개는 천둥소리에 무섭고 놀라 눈물짓고, 번개에 맞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소름이 돋고 강한 비바람 때문에 휘청거리다가 이렇게까지 죽을 고비를 넘기고 있는데 살아서 싸워야겠다고 생각했다. 강하게 마음을 먹고 몇 달 동안 가방 깊숙한 곳에 숨겨둔 밧줄을 버렸다. 그리고 ‘노동조합, 단체 협약’만을 생각했다. 조합원들에게도 늘 “우리는 충분히 버틸 수 있으니, 신경 쓰지 말고 충분히 교섭해 달라”고 당부하였다.


2013년 8월 26일 합의문 내용 중,

‘1. 재능교육과 재능교육지부는 2008. 10. 31자로 해지한 단체 협약을 원상회복한다. … 3. 회사는 故 이지현과 해지교사 11명 전원(…)을 즉시 복귀시킨다.… ’


정말 찾고 싶었고 듣고 싶었다. 100여 명의 조합원이 시작했던 투쟁이 6년이 지나는 동안 조합원은 해고자 11명만 남았다. 1999년 11월, 재능교육 교사노동조합 시절부터 단체 협약 체결 과정은 단 한 차례도 녹록했던 적이 없었다. 특수고용노동자 최초의 단체 협약을 체결하고 유일한 단체 협약을 지켜내는 것이 특수고용노동자에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실천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그래도 단체 협약이 있어서 우리 학습지노동자들의 삶의 질이 얼마나 당당해졌는지 현장이 아니면 절대 느낄 수도, 알 수도 없기에 현장 복귀 판단은 어렵지 않았다.


노동조합을 시작하고, 투쟁을 할 때도, 떠나고 싶었을 때도, 다시 돌아올 것을 결심했을 때도 단 한가지였다. 내가 행복해지려고 하는 일이 많은 사람들이 함께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사람들과 함께 행복해지는 일을 내가 조금 더 노력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행복해지기 위해 투쟁했던 지난 6년 동안 동지를 잃었고 동지를 얻었다. 그리고 연대를 다시 배웠고 투쟁을 다시 배웠다. 아직 씻기지 않은 상흔이 불거질 때면 조금 더 나 자신을 돌보고 아꼈더라면 조금 더 현명하게 투쟁했을 거란 아쉬움이 많이 든다. 그래도, 그래도 노동조합원 재능선생님인 지금 나는 행복하다. 그리고 재능투쟁 거리농성 2076일, 종탑고공농성 202일은 2013년 8월 26일로 마무리했지만 노동조합 16년, 우리 투쟁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더 행복해지기 위해. 모두 행복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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