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 심리 치유] 너의 어깨가 되어줄게

by 센터 posted Aug 24,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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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지역본부 집단상담 사례를 통해 본

노동자 심리 실태와 치유 활동의 의미

이수경 민주노총 울산지역본부 치유프로그램 집단상담가



동지들의 죽음, 노동자 치유사업 시작


2012년 12월 21일, 갑작스러운 죽음 소식이 들려왔다. 부산 한진중공업 최강서 동지. 최강서 동지는 2012년 봄부터 초여름까지 민주노총 부산양산지부와 한진중공업 노동조합이 함께 기획한 노동자 집단상담 프로그램 ‘한진 사랑방’ 3기 참가자였다. 당시 참여하던 동지들 중 가장 젊었던 최강서 동지는 자신의 별칭을 ‘행님~’이라 정하고 나이든 동지들 사이에서 젊고 건강한 기운을 뿜어내곤 했다.


최강서 동지를 허망하게 보낸 그해 겨울, 울산에서도 현대중공업 비정규직지회 이운남 동지가 생을 마감했다. 이운남 동지를 보내며 우울과 무기력, 극도의 스트레스를 개인의 문제로만 볼 수 없다는 조직적인 판단에 의해 ‘노동자 치유사업’을 민주노총 울산지부의 중점사업으로 결의하게 되었다.


지부의 첫 활동은 2013년 2월, 관심 있는 시민과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한 ‘민주노총 울산지부 치유사업 시민 강연회’를 개최한 일이었다. 당시 쌍용차 해고 노동자와 가족을 위한 심리 치유 공간 ‘와락’의 식구들이 참여해 힘을 주었고, 그 자리에서 치유사업을 함께할 ‘치유사업단’을 구성할 수 있었다. 지부의 치유 담당자, 치유 프로그램을 진행할 집단상담 전문가, 와락의 치유 담당자, 지역의 활동가, 치유에 관심 있는 노동자 등 자발적인 참여로 구성된 ‘치유사업단’이 2013년 4월부터 2015년 7월까지 다섯 개의 그룹을 만났고, 한 그룹이 1박 2일 집중 프로그램을 포함해 8번의 만남, 12회기의 모임을 진행하여 총 60회기 집단 프로그램을 실시했다.


참가자 대부분이 남자, 그것도 경상도 남자, 쇠를 다루는 현장 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들로 술이 없는 밤 시간의 집단 상담 프로그램. 기존의 익숙한 관계를 흔들기 위해 이름을 내려놓고 별칭을 쓰기로 했다. 나이와 직급, 어느새 굳어진 수직적인 관계를 넘어서기 위해 서로가 서로에게 말을 놓기로 했다. 서로 다른 조직, 논리로만 소통하는 관습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으로 부딪치며 만나기로 했다. 너무 오랜 시간 방치해 두었던 감성, 내 안에서 물결치는 희로애락의 흐름을 다시 불러들이기 위해 노래로 과정을 열기로 했다. 이렇게 시작된 노동자 치유 프로그램 ‘괜찮아,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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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에서 물결치는 희로애락의 흐름을 불러들이기 위해 노래하는 울산 치유모임 참가자들.


집단상담 프로그램의 힘


집단은 하나의 유기체, 스스로 숨 쉬고 움직이며 활동하는 묘한 생명력이 있다. 누구 하나가 의도를 가지고 뭔가를 만들어가기 보다 함께 모여 있는 집단 구성원이 과정을 만들고 발전시킨다. 그 안에서는 침묵도 깊은 대화요, 아무런 자극이 없어도 작은 울림이 서로의 가슴을 두드리기도 한다. 집단의 힘, 집단의 역동성에 대한 믿음이 있기에 집단이 구성되면, 그리고 한 회기를 하고 나면 그 다음은 집단이 알아서 굴러간다. 서로의 마음을 안아주고, 있는 그대로 받아주고 다독여주고 정직한 거울이 되어 반영해주는 집단상담 프로그램.


첫 그룹도 비슷했다. 이전에 익숙했던 관계 패턴을 내려놓고 각기 다른, 각기 소중한 한 인격체로 만나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다. 첫 모임 후 어색해서 슬그머니 빠져버린 참가자도 생겨났고 “뭐하는 모임이야, 술도 없이~” 피식피식 헛웃음을 보이는 참가자들도 있었다.  


첫 그룹 3회기 모임에서였던 거 같다. “이 모임에서만이라도 솔직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며 말문을 튼 참가자. 그동안 어디서도 하지 못했던 자신의 약하고 흔들리는 마음, 그 마음에 대한 두려운 감정이 터져 나왔다. 마치 입으로 내뱉으면 곧 쓰러져 버릴 것 같았던 불안한 마음을 한켠 내비치고 나서 맑아지던 얼굴. 내 안에는 약하고 두려운 마음도 있지만 단단하고 올곧은 마음도 함께 있어 이런저런 내 마음을 다 들여다보고 만나고 나면 언제나 건강한 마음이 내 중심에 들어설 수 있다는 걸 확인한 순간이었다.


그 이후 집단은 힘을 받았다. 어릴 적 상처,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묵혀있던 아픈 가슴, 쪽 팔린 것, 너에게 느꼈던 배신, 배신이라고 말하니 억울하게 올라오는 감정, 내놓고 이야기하니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다던 화해, 아~ 그래서 그랬구나. 가슴 깊이에서의 공감, 공감을 받고 치유되던 상처받은 내 감정들. 집단은 그렇게 자기 속도로 집단원 하나하나의 마음을 울리며 움직이고 있었다.


8회기 과정 중 마지막 과정은 1박 2일로 진행했다. 평소에는 집단상담을 하기 위해 조직 사무실을 빌려 조심스럽게 썼지만, 1박 2일을 하는 동안 풍광 좋은 자연 속에서 같이 먹고 같이 자고 같이 뒹굴며 어린아이 같은 심정으로 마무리 과정을 진행했다. 과정의 꽃은 hot seat program. 자신 만의 장점과 아쉬운 점을 사람들 앞에 내어놓으면 전체 참가자들이 정직한 마음으로 사랑 담긴 대면을 해주는 것이다. 뜨거운 의자에 앉은 것처럼 부끄럽고 어쩔 줄 모르고 피하고 싶기도 하지만 온전한 집중과 경청으로 자기 자신을 바라보게 해준다. 그래서 마치 보약 한 그릇을 먹는 것처럼 각자에게 힘이 되곤 했다.


내 안의 나를 만나는 치유 놀이터


두 번째 치유집단을 끝내고 자체적인 평가를 해 보았다.   삶은 신명나고 건강하게 살아가야 하는데 지금 우리는 힘들고 지쳐, 상한 상태로 살아내고 있다고 느껴졌다. 집단상담을 하며 마음을 내어놓는 일, 서로의 마음을 받아주고 안아주는 일이 삶의 건강과 연결됨을 경험했다는 고백도 나왔다. 이런 마음 나눔이 좀 더 많은 노동자에게 다가갈 수 있었으면 하는 희망을 담고 울산지역 전체 노동자를 위한 커다란 치유축제를 열기로 했다. 이름 하여 ‘내 안의 나를 만나는 치유 놀이터’.


사전에 미리 신청한 노동자 50명에게 MMPI(미네소타 다면적 인성검사)를 실시했다. 행사 당일에는 행사장인 울산 북구청 마당에 개인 상담부스 열 개를 만들어 울산지역 자원봉사 상담가들이 개인상담, 타로상담, 문학치유상담을 진행했다. 전국적인 지원도 받을 수 있었다. 서울에서 내려온 치유 전문가 자원봉사자들은 버려진 장난감 조각을 모아 자신만의 장난감으로 재탄생시킨 장난감 학교 부스를 만들어 어린이 손님을 맞이해주었고, 와락 정혜신 선생님은 ‘누구에게나 엄마가 필요하다’라는 주제로 울산시민을 위한 대중강연을 하기도 했다. 치유 놀이터가 끝난 후 MMPI 검사에서 상담이 필요하다고 진단된 10여 명의 노동자는 10회기 개인상담을 별도로 진행했다. 이렇게 치유 놀이터는 울산 민주노총과 와락, 아름다운 재단이 지원하여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이 놀이터가 신명나게 펼쳐질 수 있었던 건 치유사업단과 그동안 집단에 참여했던 참가자들의 헌신, 집단을 통해 경험한 치유의 필요성이 몸으로 마음으로 발현되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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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진중공업 치유모임에서 포옹하는 참가자


치유사업의 후유증?


과정을 진행하며 더 섬세하게 접근해야 할 것들도 보였다. 과정 시작 전 우리는 약속을 했다. 평등하게 만나자, 이전의 관계를 넘어서는 소통을 경험해 보자. 내 안의 어린아이를 깨워 신명나게 웃고, 울고, 뛰놀아 보자. 그리고 무엇보다 이 안에서 이루어진 이야기들을 비밀창고에 잘 넣어두자 라고. 그러나 속살을 내어놓고 나면 스스로 힘이 빠지기도 하고, 이전의 관계에서 상했던 마음이 오히려 더 두터워지기도 하고, 오히려 내 안의 나를 만나니 노동 운동과 조직보다는 나 개인의 삶이 더 소중하게 다가오기도 했다. 어떤 이는 치유사업이 노동 운동을 약화시킨다고 애교 섞인 항의를 내보이기도 했고, 치유 프로그램을 하고 난 뒤 속힘이 생긴 어떤 참가자는 그동안 참고 하지 못했던 말들을 어느 곳에서나 가리지 않고 해 문제아로 찍혀 오히려 ‘치유사업 후유증’을 앓고 있다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  


여덟 번의 만남, 12회기 과정을 통해 한 사람의 아픔이 모두 치유되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딱딱하게 굳어있던 내 마음의 한켠을 바라보는 일, 그 마음을 동지들이 안아주고 다독여 주는 일, 세상은 여전히 팍팍하고 현장은 여전히 암담하지만 그래도 나는 건강하게 살아내야 하는 일, 그 힘을 치유사업은 자기 보폭으로 정성껏 해내왔다고 자평한다.이 일이 노동 운동가를 만드는 일도, 노동 운동의 전선을 형성하는 일도 아니지만 건강한 노동자로 자기 삶의 주인으로 주체적인 노동 운동가로 살아가게 하는데 기대어 힘낼 수 있는 작은 어깨는 된다고 생각한다.


‘사람’을 찾는 치유 활동


다섯 개의 그룹을 진행하고 지금 민주노총 울산지부의 치유사업은 잠시 방학 중이다. 일 년에 한 번씩은 그동안 과정에 참여했던 참가자들이 모두 모여 후속만남을 하고 있다. 어떻게 살았는지 어떻게 살아내고 있는지 근황도 서로 물으며 매일 비슷한 일상생활, 잠시 뒤돌아보는 만남을 하고 있다. 어느 곳에서 만나든 함께 집단을 한 동지들은 ‘들꽃~’ ‘달래~’ 등 이름이 아닌 별칭을 부른다, 존대가 아닌 반말을 하며 친구처럼 포옹을 한다.


삶에서 한 순간, 자기 자신을 정직하게 만났던 치유 프로그램은 내 속에 힘이 있음을, 내 안에 감정이 흐르고 있음을, 너에게도 나 같은 힘이 있음을, 너 안에도 나와 같은 감정이 흐르고 있음을 순간순간 느끼고 만날 수 있게 해 준다. 네가 지칠 때 내가 너의 어깨가 되어주고 내가 힘들 때 스스럼없이 너의 어깨에 기댈 수 있는 공간을 갖게 해 준다. 치유 활동이란 우리가 우울하고 무기력할 때 죽음이 아닌 사람을 찾게 해주는 과정이다. 내가 손 내밀어 살아있는 또 다른 생명을 만나게 해주는 관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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