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비정규 노동 수기 공모전 당선작 우수상] 가로등 불빛 아래

by 센터 posted Dec 27,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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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호 희망연대노동조합 케이블방송 비정규직 티브로드지부 사무국장



노동조합을 한지도 어느덧 4년이 흘렀다. 노동자라는 의미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고 단지 너무 힘들고 억울해서 노동조합을 시작하게 되었다. 시간이 흘러가면서 노동자로서의 의미를, 그리고 어떤 자세로 살아가야 하는지를 조금씩이나마 배워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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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고 노동자 복직을 요구하며 벌인 총파업 투쟁(@희망연대노조)


케이블 방송에서 일한지 어느덧 19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처음에는 일을 배워가는 과정 속에 재미도 있었고 주위 동료들과도 서로 도와가며 일하는 보람도 많이 느꼈다. 그저 열심히 일하면 일한 만큼 인정도 받고 대우도 점점 좋아질 것이라고 굳게 믿고 일했다. 티브로드라는 대기업에서 일한다는 자부심도 갖고 있었다. 하지만 내 생각은 그저 꿈에 불과했고 티브로드는 일하는 노동자들을 그저 돈을 벌어오는 기계쯤으로 여기고 있었다. 처음에는 매주 토요일은 오전 근무를 하고 휴일은 쉬었다. 열심히 일할 수 있는 환경이었다. 직접고용도 되어 있어서 근무 불안도 없었고 주어진 일을 열심히만 하면 아무 걱정도 없었다.


그러던 중 티브로드는 각 지사를 외주화하겠다고 했다. 외주가 되면 돈도 더 많이 벌 수 있게 해주겠다고 했고 앞으로도 끝까지 책임져주겠다고 했다. 티브로드는 “일하는 사람들을 항상 가족이라 여기고 있고 회사만 믿으면 아무 걱정 없을 것”이라고 했다. 그렇게 우리는 외주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모른 채 회사를 믿고 외주지사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어차피 하는 일은 같았고 “무슨 큰일이 일어나겠나” 하는 마음에 별 생각 없이 회사가 하자는 대로 믿고 따랐다.


하지만 이때부터 조금씩 회사는 바뀌고 있었다. 업무 강도도 조금씩 강해지고 있었고 전에는 하지 않았던 영업을 현장기사들에까지 하게 했다. 그래도 처음 영업을 할 때는 나름 재미도 있었고 회사도 심하게 강요하지는 않아서 현장 일을 하면서 영업하는 것도 그리 힘든 일은 아니었다. 또 적은 금액이긴 했지만 영업하면 수수료도 있었기 때문에 즐거운 마음으로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몇 해가 지났을까. 회사는 또 한 번 대대적인 개편에 들어갔다. 각 지역으로 센터를 개편해서 본격적인 관리에 들어간 것이다. 새로운 센터장들이 오고 그들은 본사 지침이라며 각종 지표를 언급하고 센터별 점수에 따라 순위가 매겨지므로 뒤처지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업무량도 점점 늘어만 가고 영업 압박이 하루가 다르게 점점 우리를 짓누르고 있었다. 기술지표라는 것을 만들어 이대로 착실히 수행해야 한다고 하는데 내용을 들여다보면 해피콜, 시간 내 처리율, 방문 전 통화, 당일 설치율 등 여러 가지 항목을 만들어 반드시 높은 점수를 받아야만 했다. 그런데 각 항목들은 현실과는 너무 거리가 멀었다. 해피콜은 반드시 매우 만족을 받아야 하는데 고객 대부분은 해피콜이 오면 “만족한다”라고 말한다. 기사가 “고객님 해피콜 오면 반드시 매우 만족이라고 말해주세요”라고 해야 하는데 바빠서 혹은 고객이 별생각 없이 “만족한다”라고 말하면 평가점수가 바로 낮아지는 것이다. 업무량도 한 시간에 여러 건이 할당되는 경우가 다반사인데 지표를 맞추기 위해서 사전에 고객에게 양해 전화를 하면 “이 시간에 오기로 했는데 늦어지면 어쩌냐” 하면서 핀잔을 듣는 게 다반사였다. 업무량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할당해 놓고 무조건 다 처리하라고 하니 밤늦게까지 일하는 경우가 반복되었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욱 문제가 되었던 것은 영업이었다. 본사로부터 센터에 영업 할당량이 떨어진다. 팀별, 개인별로 쪼개서 각자의 영업 목표량이 정해진다.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반드시 목표를 채워야 했고 영업을 하지 못하면 사무실에 복귀하는 것도 두려웠다. 밤이 되면 회사 근처 가로등 아래 몇몇 사람들이 모인다. 영업을 하지 못해 회사로 들어가지 못하고 한숨만 푹푹 쉬며 애꿎은 담배만 피워댄다. 사무실 들어가면 영업하지 못한 사유서도 써야 하고 괴롭힘 당할 걸 생각하면···. 나도 매일매일 영업해서 당당하게 회사 들어가서 퇴근하고 싶었다. 희미한 불빛 아래 모여서 서로의 불쌍한 얼굴을 쳐다보며 걱정스런 말들을 건넨다.

“회사 들어가면 뭐라고 하지?”

마치 죄인인 것처럼 고개를 떨구고 한숨만 내쉰다. 어쩔 수 없이 밤 늦은 시간에 회사로 복귀해도 여기저기 눈치 보기 바쁘다.

“난 영업못한 죄인이니까.”


이렇게 하루하루 지나가면 매월 영업평가를 내린다. 영업실적대로 ‘명장, 장인, 보통, 부진, 매우 부진’ 등으로 개인별 등급이 매겨진다. 우리가 무슨 소도 아니고. 이렇게 등급이 매겨지면 등급별로 대전에 있는 흥국생명 연수원으로 집체교육을 간다. 상위등급이 교육을 가는 건 그냥 놀러가는 거다. 가서 편하게 먹고 쉬다오면 된다. 하지만 하위등급 교육은 완전 다른 세상이다. 보통은 1박 2일로 교육이 진행되는데 각 센터 영업부진자들이 모여 강도 높은 교육이 시작된다. 한 명은 기사 역할, 한 명은 고객 역할이 돼서 연극을 한다. 역할 바꿔서 다시 또 한다. 대본을 본인이 직접 써서 어떻게 고객응대를 잘해야 하는지 계속 반복해서 하고 또 하고. 영업을 하지 못한 일종의 벌인 것이다. 감독관의 OK 사인이 떨어질 때까지 새벽 늦게까지라도 그 지긋지긋한 연극을 해야 했다. 보통 이 연극은 새벽녘이 되면 끝난다. 잘하고 못하고의 문제가 아니다. 영업 못한 벌이기 때문에 앞으로 괴롭힘 당하지 않으려면 영업 열심히 잘하라는 일종의 신호인 것이다. 다음날 버스에 올라 집으로 가는 길에 다짐에 다짐을 한다.  ‘다시는 영업부진자로 이곳에 오지 않으리라.’


하루하루 너무나 지쳐만 갔다. 회사 나가는 것도 점점 두려워졌다. 하지만 나가야 돈을 벌지. 놀 수는 없으니까 괴롭지만 버텨나가고 있었다. 영업 압박에 시달려  내 이름으로 쓰지도 않는 방송, 인터넷을 가입했다. 그것도 몇 개씩이나.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도저히 회사가 원하는 실적을 맞출 수 없었다. 본인 이름으로, 쓰지도 않는 상품을 가입한 기사들이 대부분이었고 본인도 모자라 가족들 이름으로 가입한 경우도 다반사였다. 물론 그 사용요금은 쥐꼬리만 한 본인 월급에서 감당해야 했다. 타 센터 어떤 기사는 100만 원가량 사용료를 낸다는 얘기도 들렸다. 월급 200만 원 남짓 받아서 티브로드에 사용료 100만 원 내면 이게 뭐란 말인가. 영업 강요의 폐해는 이것만이 아니었다. 고객들을 속이고 영업을 하는 것도 다반사로 이루어졌다. 필요하지도 않은 디지털이나 인터넷전화 등을 반드시 설치해야 하는 것처럼 속이고 달았다. 오직 실적이 중요했기에 나중에 오영업으로 민원이 들어오거나 해지가 되는 것은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지금 당장 영업을 해야 했으니까. 물론 오영업으로 민원이 들어오면 그 책임은 모두 영업한 기사가 져야 한다. 하지만 나중을 생각할 여유는 조금도 없었다.


이런 시간들이 계속 흘러가는 와중에 충격적인 일이 발생했다. 티브로드 원청의 지시로 각 센터에 있는 기사들을 모두 개인사업자로 전환하라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술렁대기 시작했다. 경험이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인데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하란 말인가? 하지만 원청은 개인사업자로 전환하면 지금보다 많은 돈을 벌수 있고 세금 문제도 별문제 없을 거라 했다. 하지만 기사들의 불안은 갈수록 높아져만 갔다. 이런 발표가 있은 뒤 얼마 후에 대전교육장에 각 센터 팀장들의 집체교육이 있었다. 전국에서 모인 팀장들이 회의를 했다. 개인사업자로 가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을 회사에 공식적으로 알리고 거부하자는 내용이었다. 대부분이 동의했고 결의를 다졌다. 그런데 그날 밤에 몇몇 사업부장들과 센터장들이 대전으로 급하게 내려왔다. 팀장들을 다 불러 모아 놓고 당시 사업부장이던 원청 상무가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태광은 여러분을 절대 배신하지 않을 것이고 끝까지 책임질 것이니 걱정하지 말아라. 개인사업자로 전환해도 아무런 피해가 없을 것이고 기존과 같이 일하면 된다.”

이런 식으로 팀장들을 설득했다. 얘기를 마치고 지역별로 팀장들을 분리시켜서 대전 인근으로 데리고 나갔다. 술자리를 만들어 술을 먹이면서 걱정하지 말라고 계속 우리를 안심시켰다. 다음날 복귀를 해야 하는데 평소 같았으면 버스를 타고 같이 이동했지만 그날은 달랐다. 버스가 없다며 각자 지역으로 가라는 것이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팀장들이 서로 뭉쳐서 얘기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인 것 같다. 그렇게 올라와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우리는 개인사업자가 되어야만 했다. 그 당시 내가 팀장으로 있었는데 팀원 중 절반은 회사를 그만두었다.


그렇게 또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가고만 있었다. 나도 결국은 각종 압박, 스트레스 때문에 견디지 못하고 회사를 그만두었다. 하지만 나가도 할 수 있는 게 많이 없었다. 결국 개인사업자 정책이 없어지고 예전처럼 운영한다는 얘기를 듣고 다시 티브로드에 들어왔다. 예전과 별반 달라지는 것이 없었다. 기술센터와 영업센터가 나뉘어져 운영을 한다 하는데 기술센터도 영업을 똑같이 해야 했다. 실적 압박은 여전했으며 본사직원이 센터에 상주하면서 각종 실적 관리를 했다. ‘이곳은 바뀔 수가 없는 곳이구나’ 생각하면서 포기한 채 회사를 다니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는 동생이 연락을 했다.

“형, 노동조합 얘기 들은 거 있어요?”

나는 티브로드에서 노동조합이 만들어질 거란 얘기는 금시초문이었다. 이때부터 몇몇의 사람들이 모여 비밀 카톡방을 만들고 서로 의견을 나누면서 노동조합 활동을 위한 준비에 나섰다. 퇴근 후 민주노총에 모여 밤늦게까지 교육도 받고 서로 의견도 나눴다. 일요일이면 하루 종일 회의하면서 노동조합 시작을 위한 준비에 매진했다. 우리에겐 보안이 생명이었다. 노동조합을 오픈하기 전에 회사에 알려지면 활동 자체가 어려울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에 서로 조심하면서 준비를 해나갔다.


드디어 2013년 3월 24일 ‘더불어 사는 희망연대노동조합 케이블방송 비정규직 티브로드지부’의 모습을 드러냈다. 회사는 많이 놀랐는지 정신이 없어 보였다. 본사로부터 센터에 계속 전화가 오고 센터장도 어찌할 바를 모르고 안절부절못하던 모습들이 생각난다. 그때부터 센터에 상주하던 본사 직원들은 온데간데 없어지고 티브로드 원청은 센터들을 철저하게 외면했다. 그동안 해왔던 각종 실적 관리도 다 없어지고 노동조합은 티브로드와는 관계없는 단체라며 모르쇠로 일관했다.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티브로드가 이 정도까지 썩어있구나 라는 생각에, 그리고 원청 상무가 했던 말이 다 거짓이었고 티브로드는 노동자들을 그저 돈벌어 오는 기계쯤으로 여기고 있구나 라고 생각하니 화도 많이 났다.


본격적인 노동조합 활동에 들어갔다. 난생 처음 집회도 하고 교섭도 하고 그동안 맥없이 지내오던 시간들이 이제는 활력으로 넘쳐났다. 원청은 계속 우리를 무시했지만 상관없었다. 이제 우리는 함께 뭉쳐서 싸울 수 있으니까. 그리고 8월 파업에 돌입했다. 티브로드 원청 앞에서 노동자의 권리를 주장하며 외치고 또 외쳤다. 그리고 9월 30일 우리는 흥국생명 8층 티브로드 원청으로 들어가 면담투쟁에 돌입했다. 원청으로서 책임 있는 답변이 나오기 전까진 나오지 않으리라 굳게 마음먹었다. 그날 저녁 결국 티브로드는 우리와 정식으로 대화하고, 원하청 노사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답변을 했다. 건물을 내려와 동지들과 서로 부둥켜안으며 기쁨의 눈물을 흘렸던 것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된다.


3.김승호-티브로드.jpg

국회 앞에서 해고자 복직, 고용승계 보장을 요구하며 집단단식 기자 회견을 가졌다.(@희망연대노조)


우리는 현장으로 복귀했다. 이제는 더 이상 실적에 쪼들리지 않아도 가로등 밑에 둘러앉아 한숨 쉬며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사람 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티브로드는 노동조합을 어떻게든 없애고자 준비를 계속 해오고 있었다. 2014년이 되자 센터에 내리는 수수료를 인당 고정비 지급에서 가입자 대비 단가수수료로 전환시킨 것이다. 경쟁이 치열한 방송시장에서 가입자가 줄어들면 센터가 받는 수수료가 적어지는 것이다. 센터에서는 어려우니 영업을 많이 해야 한다는 얘기들이 점점 흘러나왔다. 다시 과거로 돌아가려는 움직임이 점점 느껴졌다. 우리는 가만 두고 볼 수가 없었다. 센터장들 협의체인 협력사협의회와 교섭을 진행했지만 그들은 센터가 어려워서 임금 인상 및 노동 조건 개선에 대해선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결국 협상은 결렬되고 우리는 다시 티브로드 원청 앞에 모였다. 노사상생을 하겠다던 티브로드는 완전히 태도를 달리해서 “너희는 티브로드 직원이 아니니 상관없는 일”이라고 계속 외면했다. 각 센터들은 우리가 파업을 나가자 바로 직장 폐쇄를 하며 우리를 압박했다. 4개월이 넘는 긴 시간을 길거리에서 보냈다. 가족들의 반대에 부딪치고 생활고에 시달려 버티지 못하고 노동조합을 탈퇴하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너무 안타까웠다. 같이 싸우자고 하고 싶었지만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그렇게 많은 동지들이 떠나가고 많은 아쉬움을 뒤로 한 채 우리는 현장으로 복귀했다. 현장에서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서로를 의지하며 우리는 이겨나가고 있었다. 노동자로서의 자존감과 긍지를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서로를 위로하며 한 발짝씩 조금씩 전진해 나갔다. 하지만 티브로드는 노동조합을 어떻게든 말살시키려고 준비를 하고 있었다. 2016년 2월 전주와 광명에서 업체 변경을 빌미로 노동자들을 대량해고 시켜 버린 것이다. 노동자들은 거리로 내몰렸다. 티브로드는 역시나 하청업체의 일이니 모르겠다고 외면하며 뒤에서 업체를 이용해 노동자들을 탄압했다. 조합원이 가장 많은 전주와 광명센터를 업체변경 해버렸으니 이것은 누가 봐도 노동조합을 탄압하려는 티브로드의 계획이었다.


기나긴 시간 복직을 위해 싸웠다. 명동 티브로드 본사 앞과 전주 티브로드 사업부 앞에 천막을 치고 매일같이 삼보일배를 했고 목숨을 담보하고 한강대교 위에 올라가서 우리의 억울함을 호소했다. 하지만 티브로드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번 기회에 노동조합을 없애려고 혈안이 돼 있었던 것이다. 너무 힘들고 지쳐서 이만 포기할까 하는 생각도 여러 번 들었다. 하지만 포기하면 앞으로 어떻게 될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절대 포기할 수 없었다.


그렇게 7개월의 시간이 흘렀다. 해고 동지들의 복직을 위해 어떻게 싸워야 할까 고민하던 중 ‘국회 앞으로 가서 결판을 짓자’고 결의하였다. 매일 반복되는 기자 회견, 문화제를 진행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우리와 함께 싸우기 위해 결합하고 힘이 돼주었다. 그렇게 한 달여의 시간이 흐르고 결국 우리의 해고 동지들이 복직할 수 있었다. 247일이라는 긴 시간 속에 많은 아픔과 어려움을 겪었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싸웠던 우리 동지들, 도와주신 많은 분들의 힘으로 보이지 않았던 긴 어둠의 터널을 뚫고 마침내 밝은 빛을 보았다. 우리는 해낸 것이다. 파렴치하고 무도한 자본의 공격에 굴하지 않고 서로를 믿고 싸워서 얻어낸 값진 결과이다. 만약 중간에 포기했다면 어땠을까? 우리는 예전의 노예로 전락해서 기계처럼 일만 하는 신세가 되었을 것이다.


앞으로 할 일이 너무도 많다. 노동자로서의 당당한 삶을 찾아가기 위해 조금은 더디더라도 계속 전진해 나갈 것이며 동지들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어려운 일이 닥치더라도 반드시 함께 이겨낼 것이다. 자본은 언제 어떤 방식으로 공격해 올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어떠한 상황에서라도 싸워 이겨나갈 수 있는 준비가 되어있다. 천막 아래에서 가로등 불빛을 보며 술 한 잔을 기울였던 생각들이 많이 난다. 그리고 다짐에 다짐을 하며 서로를 응원하던 목소리도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있다. 그때를 추억하며 가슴속 깊이 다짐을 해본다. 노동자는 반드시 승리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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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한겨레신문 인터넷판에도 실렸습니다.

http://www.hani.co.kr/arti/opinion/because/77641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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