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정규직 여성 노동] 참는 게 메리트

by 센터 posted Oct 31,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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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숙 파견 노동자



“아줌마! 여기 박스 접으세요.” 

 봐도 스무 살 초반쯤 되어 보이는 앳된 정규직 여자가 쏘아붙인다. 머리가 희끗한 SJ언니는 아무런 표정도 없이 박스를 접는다. 10년간 일하며 익히는 노하우 중 하나인 것일까. 나이도 아니오, 경력의 차이도 아니다. 그저 파견직과 정규직이라는 신분의 차이가 고스라니 드러날 뿐이다. 나 역시 언니 옆에 나란히 서서 박스를 접는다.


우리는 정규직과 같은 장소에서, 같은 시간, 같은 일(더 많은 일, 힘든 일을 하는 경우가 더 많다)을 한다. SJ언니는 여기저기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을 척척 해결한다. 오죽하면 정규직들도 언니를 찾아와 물어보기도 하고, 도움을 요청하기도 하겠는가. 나 역시도 정규직과 한 달간 부대끼며 같이 고생도 하고 밥도 먹다보니 자연스레 멤버십이 생긴다. 아, 그들과 다를 바 없는 한식구라는 착각 속에 빠지는 것이다.


그렇게 한 달 후 그들보다 반토막이 난 월급을 쥐고 뼈저리게 실감한다. 우리의 계급이 그들과 다르다는 것을. 어디 다른 것이 그 것 뿐이랴. 10년간 회사를 위해 일했어도 직책은 그저 아줌마. 듣도 보도 못한 4대 보험 연기신청서, 6개월이면 한 번씩 바뀌는 파견업체, 퇴직금도 그렇다. 우리는 23개월을 일하고 23개월치의 퇴직금을 받은 후 1개월을 쉰다. 다른 파견직들은 꿈도 꾸지 못하는 퇴직금을 그나마 받는다고 감지덕지해 한다.


내가 이 회사에 들어 온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물론 생산직 파견은 불법이다. 그럼에도 혹시나 정규직이 될 수 있지 않을까하는 막연하고 희박한 희망을 품고 들어왔다. 제약회사는 안산, 시화공단에서 일하는 여자들이라면 한번쯤 꿈꿔보는 꿈의 직장이다. 깨끗한 작업 환경, 낮은 업무 강도, 보다 나은 복리후생들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야말로 ‘꿈’의 직장이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스무 살 친구들이 아니면 정규직은 엄두조차 내기 어렵다.


그러나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파견직은 극히 드물다. 50여 명 정도의 파견직 언니들은 대부분, 아이를 키우고 나온 경력 단절 여성인 언니들이거나 55세 이상의 언니들이다(나이 차이가 많이 나더라도 대부분 언니라는 호칭으로 부른다). 다른 파견직에 비해 안정적이라서, 좀 더 나은 급여 조건으로, 더 이상 갈 곳이 없다는 두려움으로 이곳에 모여든다.


각기 다른 이유이지만 결국 우린 버텨내야 하는 공동의 목적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만의 생존방식을 찾는다. 자존심 따위는 집어 던진 지 오래다.

1. 나이 어린 정규직들이 기분 상하지 않도록 말조심하기

2. 정규직들이 휴가 쓴 후 눈치 보고 휴가 쓰기. 당연히 안 쓰면 더 좋고

3. 앞장서서 허드렛일 하기

4. 시키는 일은 말대꾸 없이 열심히 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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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밖에도 자신들만의 노하우와 스펙을 쌓아간다. 그게 나의 메리트가 된다. 보이지 않는 날카로운 칼끝이 우리들의 목에 닿아있다. 언제든 나의 목을 벨 수 있다는 걸, 그것이 전혀 이상할 것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우리는 하루하루 살얼음판을 걸으며 오늘도 잘 버텼음에 그저 감사할 뿐이다.

문득, 생각해본다. 우리를 지켜 줄 그 무엇도 없는 것인가. 법도, 제도도, 복지도, 사람도, 회사도, 그 무엇도, 없다. 그러니 버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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