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정규직 여성 노동] 여기 채금자 누구야!

by 센터 posted Oct 31,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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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미진 IT 노동자



비정규직 여성으로의 일상에 대한 이야기는 어떤 것일까. 솔직히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 뭘 써야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이제 일상이 된 것일지도 모른다. 딱히 말로 꺼내어 글로 적어 남들과 공유하기엔 이게 특별한 일이란 생각이 들지 않는 그런 상황. 김포공항 청소 노동자와 카트 노동자들의 삶이 어떠한지 전해지면서 생각해보았다. 궂은일을 하면서도 정부지침인 시급 8,200원 시행에 대한 요구가 관철되지 않는 사회. 이 사회에서 내가 겪는 일상이 이야기꺼리나 된단 말인가. 도대체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겠는가, 이런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기만 할 뿐이다. 머리를 말리는 드라이어 소리만 머리를 꽉 채우고 어떤 이야기를 할지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을 때, 내가 말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의 말, 나의 언어. 비정규직으로 일하면서 나는 말을 잃어버렸다.


나는 IT 산업에서 프리랜서로 일하고 있다. 프리랜서(freelancer)란 단어가 주는 유연함 혹은 어떤 여유라는 느낌과는 달리 실제론 용역 업무에 투입된 노동자이다. 근무 시간과 장소, 근무 내용 및 처리 방법 모두 원청회사의 감독과 지시를 따른다. 하는 일은 정직원과 다르지 않다. 직원이 필요하지만 정직원을 고용하면서 가져가야 할 책임과 비용을 절약하고자 언제라도 자를 수 있는 사람을 뽑는 것이다. 같은 시간, 같은 공간, 같은 일을 하지만 직원도 아니고 사람도 아니다. 필요에 따라 투입된 물질 혹은 기계와 같다. 이는 나의 비약이 아닌데 계약 진행을 담당하는 곳이 회사의 구매팀이라는 것을 보면 짐작할 수 있다. 우리는 매달 처리한 일을 보고하고 다음 달 재구매의 대상이 될지 평가된다.


살다가 누군가의 평가를 받는 건 피할 수 없는 일이긴 하다. 박경신 교수의 말과 같이 ‘나의 평판은 타인의 머리에 있는’ 것이니 내가 어쩌지 못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하다. 하지만 나에 대한 누군가의 평가가 나의 일자리에 절대적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건 어쩔 수 없는 당연한 일인가.


머리를 지배하는 생각은 이런 것이다. 내가 정직원이라면 상대방은 이 행동에 의미를 둘까. 의미를 둔다는 것은 그 사람의 행동에 어떤 방식으로든 수치화할 수 있는 점수를 줄 수 있다는 것이다. 기준은 그들 자신만의 것이다. 좋은 행동, 나쁜 행동. 자기 기준에 부합되고 그를 따르면 플러스, 그렇지 않다면 마이너스. 저들과 같은 정직원의 입장일 때 나를 평가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을까. 이런 생각들. 결국엔 재구매의 대상이 되기 위해 쓸데없이 책잡힐 일은 하지 말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정치색을 드러내거나 그런 적극적인 표현이 아닐 지라도 나에게 주어진 부당함을 표현하거나 혹은 더 나아가 사사로운 것에 대한 호오好惡를 표현하는 것도 주저하게 된다. 내가 필요 이상으로 편집증 적인가. 얼마 전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어 작업물에서 자신의 목소리가 지워진 어느 성우의 일을 생각해보면 별로 이런 걱정이 지나친 것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그래서 말을 삼가게 된다. 되도록 일에 대한 이야기만을 하고 나에게 속한, 나로부터 나온 생각은 말하지 않는다. 나의 색은 드러내지 않는다. 이렇게 무채색의 인간으로 살아가는 건 꽤나 어려운 일이다. 나는 숨을 쉬고 눈과 귀와 입은 멀쩡히 살아서 움직이고 무엇도 하지 않을 때에도 뇌는 자꾸만 어딘가로 향하기 때문이다. 이럴 때 비정규직인 내가 말하는 입뿐 아니라 듣는 귀가 있다는 건 어찌나 괴로운 지. 가끔 원청회사의 정직원들이 다른 프리랜서들을 평가하는 걸 듣게 된다. “누구누구는 자리에 30분 이상 앉아있던 적이 없어.”, “누구 씨는 이제 우리한테 얼굴 비추러 오지도 않아.” 이런 말들. 하지만 그 이야기를 듣는 나는, 그리고 그 말을 들은 프리랜서들은 그러한 정직원의 시선과 평가, 그것이 줄 영향을 머리에 새기고 가슴을 졸인다. ‘나도 평가되겠구나. 나에 대해선 어떤 이야기를 할까. 잘 해야지.’


이런 사사로운 평가는 정직원들 사이에선 그저 뒷담화로 끝날 뿐일 것이다. 회사는 아주 일처리를 잘하고 있다. 정직원과 그렇지 않은 비정규 직원들을 같은 공간에 둔다. 이로써 작지만 완벽한 계급 사회가 이뤄진다. 물론 그렇다고 정규직 직원들이 무소불위의 권한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완벽한 절대적 차이를 만들고 차별과 계급을 만든다. 진짜 노예 주인은 따로 있는데 우리끼리 작은 권력을 가지고 누군가를 괴롭히고, 그렇게 힘의 매력에 빠지게 한다. 누군가에게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나. 나에게 쩔쩔매는 존재들. 나의 행동과 말로 인해 좌지우지될 수 있는 사람들. 이렇게 완벽하게 책임을 회피하면서 노예를 부리는 이 존재는 얼마나 일을 잘 하고 있는 것인가.


올 초 근무하고 있던 어떤 회사에서였다. 설 연휴 전날, 점심시간이 끝나고 반 평도 되지 않는 화장실에서 이를 닦고 있었다. 청소하시는 어머님이 들어오셔서 내게 물어보셨다.

“아가씨, 삼층 채금자 누구여?”

“예?”

“삼층 채금자, 삼층 채금자가 누구여?”

“아··· 일한 지 얼마 안 되어서 잘 모르는 데요··· 왜요?”

“작년엔 선물을 주더니 올핸 없네.”

어머님은 책임자를 찾고 난 채금자란 이름을 찾고 있었다. 모르겠어요. 어머님. 저도 모르겠어요. 여기 책임자는 누군지 뒤에 숨어선 나오지를 않아요. 나도 묻고 싶어요. 여기 채금자 누구야! 나와, 채금자! 채금자씨!! 나와, 나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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