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정규노동>과 사람들] 우리가 오를 봉우리는··· -이남신 현 센터 소장

by 편집국 posted Jul 24,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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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오랜 시간 잘 헤쳐 왔다. 12년 만에 맞는 <비정규노동> 100호 발간을 앞두고 설레는 맘을 어쩔 수 없다. 비정규노동자의 목소리이자 가슴으로 자임해온 <비정규노동>에 대해 누가 뭐라 건 일단 살아남은 게 그저 기쁘고 기특하다. 제 역할을 얼마나 잘 했느냐고 따져 묻는다면 ‘여기까지 온 것만 해도 어디냐!’, ‘그럼, 그럼.’ 고개 주억거리며 변호할 것이다. 못났지만 나를 휘감은 감상은 애잔한 느낌표들을 동반해 한참을 머문다. 종종 발간주기를 훌쩍 넘겨 월간지란 말이 무색했던 시절도 있었고, 폐간을 운운할 정도로 긴박한 처지에 놓이기도 했지만, 수많은 이들의 헌신과 희생, 땀과 눈물이 배인 비정규 운동의 산증인 <비정규노동>의 발자취를 되돌아보며 범상치 않은 하나의 역사이자 기록임을 새삼 절감한다.

 

솔직히 기관지를 이 정도 편집 수준으로 내는 것이 센터의 제반 조건에 비춰볼 때 참 버거운 과업임을 체감해왔기에, 객관적인 시각으로 보는 것이 쉽지 않다. 책 하나 내는 게 참 만만찮구나 깨닫자마자 <비정규노동>의 더딘 문제 개선에 속 태우면서 내용은 차치하고라도 어떻게든 나오는 것만으로도 가슴을 쓸어내리던 처지에 100호라니. 어찌 행여라도 야속한 심사를 드러낼 수 있겠는가. 더구나 뒤늦게 센터에 합류한 내가 무슨 자격으로 어떤 평가를 덧붙일 수 있으랴. 다만 간난신고의 세월을 딛고 맞는 100호 지령의 <비정규노동>이 좀 더 나은 조건에서 제대로 자신의 역할을 잘하길 바라는 마음 간절할 뿐이다.

 

돌이켜보면 해고노동자로 센터와 연을 맺은 2009년에 본격적으로 만난 <비정규노동>은 빈사 상태였다. 노동운동과 비정규운동의 침체가 센터 사업과 운영 전반에 그대로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악전고투. 힘겹지만 비정규 문제 해결에 대한 열망과 사명감으로 버텨온 여러 동지들의 얼굴에도 숨길 수 없는 피로감이 진하게 묻어났다. 잊을 순 없지만 되돌아보고 싶지 않은 아픈 시간들. 결국 <비정규노동>도 2010년 고질적인 발간 주기 문제와 재정 부담으로 고심 끝에 격월간으로 전환한 후 우여곡절을 거쳤다. 이제 상당 부분 정상화됐지만, 상흔은 도처에 남아 있다. 지금도 <비정규노동>의 전망과 정체성 논란은 여전히 묵은 과제로 무겁게 가슴을 누르고 있고, 정작 수많은 익명의 비정규노동자 당사자들에게 다가가지 못한 한계를 어떻게 넘어설지도 걱정이다. 편집위원회의 위상과 역할 재정립, 편집국의 업무 과부하 체계 개선도 시급한 과제로 남아 있다. 센터의 평생 이력서인 <비정규노동>의 생존이 담보해야 할 자기 존재의 가치에 대해 성찰할수록 넘어서야 할 산이 첩첩이다.

 

무엇보다 센터와 <비정규노동>의 존립 이유를 무색하게 하는 1천만 비정규 시대가 난망하고 안타깝다. <비정규노동>의 이력이 더해갈수록 비정규 문제가 개선되고 센터가 문 닫을 날이 하루라도 앞당겨지길 소망해왔는데 현실은 여전히 거꾸로다. 노동이 존중받고 노동인권이 보장되는 인간다운 얼굴을 한 자본주의 수준에도 미치지 못한 한국사회. 아직도 성장 담론의 그늘에 수줍게 놓인 좋은 일자리와 경제민주화, 그리고 복지 의제가 안쓰럽다. 전 사회적으로 비정규 문제의 심각성에 대한 공감대가 확산되고 우선 해결 과제로 공인되기까지 끈질기게 비정규 실태와 과제를 알려내고 쟁점화 해내는데 적잖은 불쏘시개 역할을 해온 <비정규노동>이 지금 여기서 무엇을 해야 할지 다시 고심이 크다. 2000일 가깝게 초장기로 투쟁해온 재능 학습지 교사들과 200일을 훌쩍 넘겨 송전철탑 고공농성을 전개해온 현대차 사내하청 노동자들만 보더라도 무력감을 떨칠 수가 없다. 하물며 싸울 무기도 없고 전의도 상실한 채 하루살이처럼 하루를 연명하는 수많은 노동인권 사각지대의 비정규노동자들과 중소영세사업장 노동자들, 이주노동자들을 떠올리면 뭘 할 수 있을지 아득하다. 사회여론화와 정치쟁점화가 현실 개선으로 이어지지 못한 채 압도적인 힘을 지닌 울트라 슈퍼갑 재벌 대자본의 위력 앞에 무릎 꿇려진 사회. 양극화와 불평등 심화로 치달아온 한국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변혁 없이는 비정규 문제의 알량한 개선조차 요원한데, 과연 매체 영향력과 파급력이 크지도 않은 작은 노동 단체의 기관지 <비정규노동>이 무얼 할 수 있을까.

 

도리 없다. 우공이산의 초심으로 돌아가야 한다. 천리길도 한걸음부터이듯 센터는 다시 10년을 내다보는 긴 호흡으로 시작해야 한다. 달라진 담론 지형의 비정규노동 문제의 질과 우선순위에 걸맞게 자신의 역할을 재정립하고, 정책 연구조사 작업과 함께 지역과 현장에서부터 실사구시 정신에 기반한 비정규 문제 개선과 해결을 현실로 구현할 다양한 방도를 내와야 한다. 자본독재 신자유주의 시대 파열구를 내면서 계급적 연대와 단결에 기반한 노동운동과 비정규운동의 활로를 열어갈 전망과 전략을 제시해야 한다. 쇠퇴와 지리멸렬로 무너져내린 민주노조운동과 진보정치운동의 잔해를 헤치고 소모적인 비정규 철폐 담론을 뛰어넘어 노동운동과 비정규운동의 건강한 대안 주체를 양성하는데 주력해야 한다. 사회연대 네트워크 선순환의 핵심 고리인 노동 블록이 제 몫을 할 수 있도록 소통과 통합의 터미널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

 

이런 센터의 활동 기조와 방향 속에서 <비정규노동>도 일상적인 고용 불안과 차별, 그리고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려온 비정규직 당사자들의 절절한 육성이 담기고, 노동자들이 소박한 수준에서라도 선취하면서 만들어가야 할 대안 사회와 비정규노동체제 극복의 상을 그려내는 소임을 이뤄낼 수 있도록 고단하지만 쉼 없이 달려가야 한다. 박토의 현실에 굳건히 뿌리박고 서서 저 푸르른 하늘로 비상할 꿈과 상상력을 잃지 말고 대지의 기운을 창공으로 흩뿌려야 한다. 이 땅 외진 구석구석까지 햇살처럼 노동인권이 비춰들 수 있도록. 하여 이제 <비정규노동>은 노동인권의 햇살이 되어야 한다. 노동 현실의 구조와 모순을 거시적으로 담아내는 것과 함께 아무도 눈길 주지 않는 곳일수록 질기게 천착하고 드러내는 현미경이 되어야 한다. <비정규노동>은 아직도 할 일이 많다.

 

낮은 곳을 향한 연대, 비정규 노동자의 목소리 <비정규노동>. 센터의 얼굴이자 대표 소리통. 여전히 과제는 산적해 있고 요청받고 있는 역할도 여럿이다. 여기 저기 봉우리가 올라오라 유혹한다. 그러나 모든 봉우리를 다 등정할 필요도 없고 등로주의 철학으로 가는 길을 즐기며 길의 끝에 가닿으면 그만이다. 21세기 벽두 비정규노동의 문제를 선구적으로 통찰하며 사회적 의제로 제시한 센터와 한 몸 되어 한국자본주의를 죽비처럼 질타하며 방황하는 노동운동의 숨통을 틔운 <비정규노동>, 힘겹게 왔지만 아직도 갈 길이 멀다.

 

숱한 애환으로 점철된 비정규노동자들의 고통스럽고 지난한 삶의 굽이굽이에서 잠시 숨 돌려 휴식 취하며 펼쳐 읽고 싶은 <비정규노동>을 만들어야겠다. 수많은 비정규노동자들이 찾아 열독하는 그런 <비정규노동>을 끝내 만들어야겠다. 함께 꾸면서 실천하는 꿈은 몽상으로 그치지 않고 이루어진다 하지 않던가. <비정규노동> 200호를 향해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발을 내딛으면서 승자독식 무한경쟁으로 인간과 자연을 공멸로 내몰아가는 신자유주의 시대를 뒤엎을 반역을 꿈꾼다. 연대와 나눔의 가치가 확산되고 노동자가 주인 되는 평등 사회 건설을 다짐한다. 노동해방 세상을 여는 첨병 <비정규노동>, 이제 다시 시작이다.

 

하여, 친구여 우리가 오를 봉우리는
바로 지금 여긴지도 몰라
우리 땀 흘리며 가는 여기 숲속의 좁게 난 길
높은 곳엔 봉우리는 없는지도 몰라
그래 친구여 바로 여긴지도 몰라
우리가 오를 봉우리는··· ···.
(김민기의 ‘봉우리’ 가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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