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제자를 꿈꾸는 사람_삼성전자 서비스지회 위영일 지회장

by 센터 posted Aug 18,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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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이번 호 누가 나에게 이 길을꼭지는 센터 글쓰기 모임 쉼표하나고현종 회원님께서 인터뷰와 정리를 맡아 해 주셨다. 당분간 이 꼭지는 쉼표하나회원님들께서 진행해 주실 예정이다.

작년 7, 삼성전자서비스센터 노동자들은 삼성전자서비스지회를 결성하였다. 그로부터 약 1년 만인 628일 원청인 삼성전자서비스와 합의한 단체협약 협상이 타결되었다. 삼성의 76년 무노조 경영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이는 최종범, 염호석 두 노동자의 안타까운 죽음과 삼성전자서비스 사측의 탄압, 공권력의 무자비한 개입을 감내해 낸 결과였다. 그 결과와 지회 설립 1주년을 구치소 안에서 맞이해야 했던 이가 있다. 삼성전자서비스지회 위영일 지회장. 지난 8월 보석으로 석방된 위영일 지회장을 쉼표하나고현종 회원이 만나 노조 활동을 하게 된 배경과 과정, 소회를 들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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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초동 삼성타운을 올려다보며 나는 골고다 언덕을 떠올렸습니다. 골고다(Golgo-tha)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처형된 예루살렘 교외의 언덕입니다. 예수의 삶을 본 받고자 지금껏 달려온 시간들이었어요.

 

유복했던 어린 시절, 곧 찾아온 가난

어머니는 공주상업학교를 나오셨어요. 책장에 클래식 서적이 가득할 정도로 당시로는 드문 엘리트였지요. 아버지는 군무원이셨어요. 초등학교 입학 전까지는 유복했습니다. 그러다 일곱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생활이 힘들어졌지요. 어머니는 나와 여동생을 건사하기 위해 행상, 보따리 장사를 하며 삶을 꾸려가셨어요.부산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다 다시 부산으로 내려와 생활했어요. 학창 시절 성격은 내성적인 편이었는데, 워낙 가난하게 커서 친구도 없고 표현도 잘 못 하는 아이로 자랐습니다.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공업계 고등학교를 선택했고요. 공업계 고등학교에서 전자통신을 전공했어요.

 

삼성전자에 입사하다

삼성전자에 입사하기 전에는 전공을 살려 중소기업에서 잠시 일했어요. 큰 꿈을 위해 1992년 삼성 사내 교육 훈련생 모집 광고를 보고 지원하게 되었지요. 당시만 해도 삼성은 전자 부문에서 LG에게 뒤지고 있었어요. 이를 극복하려고 삼성은 서비스 인력에 많은 투자를 하게 됩니다. 한마디로 대단했어요. 화장실에 스킨과 로션도 있었고, 책상에는 값비싼 교육 자료를 무료로 볼 수 있도록 비치해 놓았지요. 역시 삼성은 다르구나 하는 놀라움과 함께 이런 곳이라면 내 청춘을 바쳐도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도전과 실패, 그리고 재입사

입사 후에 결혼도 하고 아이를 둘 낳았습니다. 삼성전자를 그만두고 컴퓨터 관련 사업을 했어요. 더 많은 부와 꿈과 가족을 위해서였지요. 사업은 뜻대로 되지 않았고 모든 것을 걸었던 내겐 아무것도 남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이 해체되고, 흩어졌습니다. 지금도 그로 인한 피해가 온전히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노동조합을 설립했다는 이유로 해고가 되었으니 아득하기만 합니다. 그 아픔을 딛고 다시 삼성전자에 재입사해 엔지니어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현장에서 만나는 고객 한 명 한 명이 새롭게 다가왔고, 한층 성숙한 인간이 되는 계기가 되었어요. 냉장고, TV 수리하러 홀로 사시는 어르신들 집에 가면 두세 평 남짓한 방에 항상 소주병이 뒹굴어 다녀요. 제가 여쭙죠. “아버님 가족은 있으십니까?” 하고. 그럼 대개 하시는 말씀이 아들딸 형편이 넉넉지 못해 생활비도 거의 못 받어. 돈은 없어도 자식들 얼굴이라도 자주 봤으면 좋겠는데 얼굴 본 지도 3년이 넘었어.” 예요. 이런 상황이니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서비스 기사들 오면 굉장히 기뻐해요. 말 상대가 생겼다는 거죠. 수리하는 시간보다 말벗 해 주는 시간이 곱절로 많아요. 이런 어르신들을 대하다 보면 제 어머니를 보는 듯해 눈시울이 붉어지곤 했지요. 이런 어르신들에겐 수리비도 제대로 받지 못해요. “수리비 3만 원이에요.” 하면 화들짝 놀라시거든요. 그러면 만 원만 주세요.” 하고 그냥 오지요. 물론 2만 원은 제 월급에서 공제되는 것이지요. 받은 만 원도 나중에 라면으로 되돌려 주고 와요. 이렇게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감면 제도는 하나밖에 없어요. 빅 클레임(Big-claim). 이걸 고객들이 걸면 기사들에게 나오는 건 이천 원 밖에 안 돼요. 온전히 손해를 기사들에게 떠넘기는 거지요. 잔인한 제도예요. 삼성은 피도 눈물도 없어요.

 

고객과의 마찰, 그러나 우리는 삼성 서비스 기사다

고객과 빚어지는 마찰은 잘 사는 분들과 더 많아요. 우리 집 제품이 전부 삼성인데 출장료 정도는 서비스를 해 줘야 한다며 요금을 주질 않는 거예요. 어떤 사람은 60평짜리 집에 살면서 디자인이 맘에 안 든다며 무조건 바꿔달라고 때를 써요. 참 난감하죠. 제 동료는 이런 경우를 당했어요. 고객이 수리비, 출장비를 못 준다고 해요. 그래서 저는 자갈, 논밭 팔아가지고 일하는 줄 아십니까?” 했더니, 고객 센터에 전화를 해서 높은 사람 바꾸라고 했대요. 직원 교육을 어떻게 시키느냐, 직원이 자신에게 협박을 했다고 해서 이 동료는 바로 해고가 됐어요. 이걸 보면서 감정노동자의 방어권이 문화적으로 안착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또 이런 경우도 있어요. 수리비가 27만 원 나왔다고 했더니 지갑을 안 가져 와서 계좌이체 시켜주겠다고 해요. 회사는 계좌이체를 못 하게 합니다. 그래도 돈이 없으니 어떡해요. 알았다고 하고 그냥 와야지요. 하루, 이틀, 일주일 지나도 입금이 되질 않아요. 전화를 하면 온갖 트집을 다 잡아요. “기사 당신 말이야, 제대로 고쳐 놓지도 않고 무슨 돈을 달라고 해!” 하며 생떼를 써요. 이렇게 해서 손해 보는 액수가 한 달에 2~30만 원가량 됩니다. 우리 삼성서비스 기사들은 고객과의 마찰로 생기는 애환은 웃으며 넘길 수 있습니다. 현장에서는 우리 서비스 기사들이 삼성을 대표해서 고객을 만난다는 책임감 때문이죠. 삼성은 서비스 기사들이 이런 마음을 갖고 있는지 알기는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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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진 자부심을 스스로 일으켜 세우다

삼성에 다닌다는 자부심은 처한 노동환경에 의해 무참히 무너졌습니다. 성수기와 비성수기가 있어요. 성수기는 6, 7, 8월입니다. 냉방 기구 사용이 잦다보니 고장이 많은 거죠. 이때는 월 300만 원 정도 벌어요. 나머지가 비성수기인데 이때는 최저임금도 못 벌어요. 성수기 노동 시간은 최소 10시간에서 15시간입니다. 아침 7시에 출근해서 밤 11시에 퇴근을 해요. 최저임금은 물론 시간외 수당도 없고, 일요 휴무도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내가 1970년대 전태일 시대를 살고 있는지 1인당 국민소득 25천 달러인 2014년을 사는지 헛갈립니다. 삼성전자 서비스 노조에 대해 잠시 말씀을 드려야겠군요. 삼선전자 서비스 AS기사들로 이루어진 노동조합입니다. 앞서 얘기했듯이 저희는 최저임금, 일요휴무, 근로기준법이 지켜지고 있지 않은 상태였어요. 기본급도 없고 건별 수수료로 급여가 정해져 있었습니다. 저는 노사협의회 위원장으로 있으면서 이에 대한 문제 제기를 하다가 해고가 되었어요. 노동조합을 만들려고 한다는 이유로요. 해고는 위장 폐업을 통해 나와 간사를 고용승계 하지 않는 방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이 내막이 전국적으로 알려지면서 AS기사들이 들고 일어섰습니다. 센터의 체불 임금을 조사해 보았더니 6억 원 정도 나왔어요. 소송을 걸겠다고 얘기했지요. 그게 싫다면 체불 임금을 지급하든가, 우리 요구안을 받아들이라고 했습니다. 결국 최저임금, 시간외수당도 보장받게 되었습니다. 조직을 확대하는 데 결정적으로 작용한 것은 국회정론관에서 가졌던 기자회견이었던 것 같습니다. 국회의원들도 관심을 갖고 있구나, 이길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AS기사들이 하게 된 것이지요. 그러면서 나머지 센터들도 결합을 하게 되었습니다.현재 조합원 수는 1,500명입니다. 2,000명까지 갔다가 조금 준 상태입니다. 사 측의 방어 수준에 따라 조합원 수가 늘어났다 줄었다 하지요. 사 측의 방어 방법은 타겟 감사입니다. 감사는 분기별 혹은 일 년에 두 번을 합니다. 보복성 감사는 10년 전 것까지 합니다. 옛 속담에 털어서 먼지 안 나는 놈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나올 때까지 하는 거죠. 결과가 한두 명일 때는 날리고, 많을 때는 이걸로 협박합니다. 집에 갈래, 노동조합 탈퇴하고 다시 일할래. 그리고 조합원에게 일감을 안 주는 방식으로 생계를 옥죕니다. 어떨 땐 술 사 먹이고 회유도 합니다. 조합비는 월 15,000원입니다. 거기에 투쟁 기금을 합해서 30,000원입니다. 금속노조의 규약, 규정에 따라서 걷고 있습니다. 상근자는 타임오프를 받아서 총 6명입니다. 전임자는 3, 3명은 반상근입니다. 현재 임금 체계는 건별 수수료에서 기본급+건별 수수료로 바뀌었습니다. 비수기에도 생활이 조금 안정되었습니다.

 

삼성이 뒤로 숨다

하청업체 사장들은 바지사장입니다. 월급만 달리 받았지, 모든 지시 사항을 삼성 차장급 인사가 직접 했어요. 회의도 같이 했습니다. 어느 날 센터장이 작성한 일지 형식의 보고서가 발각되었어요. ‘몇 월 몇 일 몇 시에 누가 누굴 만나 무슨 얘기를 했다’, ‘얘는 아주 독한 놈이라 노조 활동을 그만둘 것 같지 않다같은 개인 성향을 조사해서 원청에 보고한 내용이었어요. 때마침 내가 근로자 확인소송을 하게 되자 삼성은 불리해질까봐 숨어 버리더군요. 전에는 삼성에서 각 센터에 내려 갈 돈에 꼬리표를 달았어요. 이 만큼은 노동자 월급, 이건 사장 월급, 요건 운영비라고 지침을 하달했어요. 지침을 위반할 시에는 삼성에서 센터에 감사를 했어요. 각 센터에서는 노동자들 월급을 가지고 장난을 칠 수 없었지요. 그런데 삼성이 뒤로 숨게 되면서, 돈에 꼬리표를 달지 않고 통으로 내려 보냈어요, 센터장들은 돈에 꼬리표가 없으니 자신들 월급을 더 챙기기 시작했죠. 자연히 노동자들 급여는 전보다 40~50만 원이 줄었어요. 서비스 기사들이 분노했죠. 이것이 노동조합 설립에 불을 지핀 배경이 되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이웃 사랑을 더 실천하듯

삼성이라는 거대 자본과 벌이는 싸움에는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모든 것을 걸어야 했으니까요. 모든 것을 건 싸움에서 실패를 해 본 터라 더욱 두려웠습니다.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신앙적 힘이었습니다. 진보 진영에서 좌파 동지들이 가지고 있는 신념과 흡사한 거죠. 오랫동안 대형 교회를 다녔어요. 그곳에서 교회 반주도 하고 열심이다 보니 사랑도 많이 받았어요. 그런데 삼성에 노조를 만든다고 언론에 이름이 나기 시작하자 그딴 걸 왜 하느냐며 등을 돌려 버리더군요. 노사협의회 위원장 할 때까지만 해도 좋은 일한다고 하던 사람들이···. 삼성과의 싸움을 결정하기까지 힘이 돼 준 신앙의 모태인 교회가 나를 버린 것이지요. 기독교인으로서 항상 소외받고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했던 예수의 삶을 본받고 싶었어요. 대형 교회는 소외받는 사람들과 말로만 함께 했어요. 대형 교회를 나와서 교인이 30명 남짓한 작은 교회에 들어갔습니다. 부자들보다 가난한 사람들이 이웃 사랑을 더 실천하듯, 작은 교회가 대형 교회보다 훨씬 소외받은 이들을 환대하고 지지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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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조합 활동을 하면서

노동조합 깃발을 날리며 창립총회를 할 때 가장 보람 있었습니다. 그땐, ‘! 다 됐다!’ 하고 생각했는데 그때부터가 더 힘들 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노동조합을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열사들의 죽음이었지요. 나보다 10년 이상 어린 친구들이었는데···. ‘내가 가야할 길인데 왜 니들이 가나.’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어요.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 전에 주여, 나에게서 이 잔을 거두어 가실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해 달라는 이야기가 꼭 제 얘기 같았어요. 제정신으로 극복한 것 같지 않아요. 마음을 추스르고 둥지를 옮겼습니다. 부산에서 서울로. 지금은 신촌에 보증금 3백에 35만 원짜리 월세방에 삽니다. 내가 선택을 했는데도 두려웠어요. 한고비를 넘기면 또 다른 두려움이 몰려왔죠. 그때마다 예수를 생각했어요. 그 누군가에게 희망을 줄 수 있다면 그게 예수의 삶을 실천하는 것이라고요. 나는 이가 없습니다. 모두 임플란트, 브릿지입니다. 노조를 하면서 삼성 측에서 집요하게 협박과 회유를 해 대는 통에 스트레스가 엄청나더군요. 거기에 더해 노동조합 설립을 도원결의했던 이들이 어머니가 걱정하신다, 아이들이 어리다는 이유로 떠나갔을 때 그 아픔이 치아로 전달 된 것입니다. 그래도 희망은 있었습니다. 내 주위 사람들은 몸을 사렸지만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 노동조합으로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가입 원서가 하루에 400장씩 들어왔습니다.

 

누가 나에게 이 길을 가라 했나

이념이 아닌 사람에 대한 연민과 인내심은 삼성이라는 거대 괴물과의 싸움을 지속시키는 힘입니다. 예수가 차별받고 천대 받았던 이들에게 복음을 전파 하듯이, 삼성 서비스 노동자들에게 조그마한 희망이 될 수 있다면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넘었듯이 삼성이라는 언덕을 넘어서겠습니다. 오래 전부터 꿈꿔온 예수 제자가 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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