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비정규직으로 일하면서 일상을 찾게 되었어요(1)_이태의 전회련 학교비정규직본부 본부장

by 편집국 posted Mar 08,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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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2012년 노동계에서 가장 주목을 받았던 곳이 바로 학교비정규직이다. 올 하반기 투쟁의 핵이었던 학교비정규직은 학교현장에서 최초로 파업을 성공시켰고, 4개의 노동조합이 함께 구성한 전국학교비정규직연대회의는 투쟁 속에서 그 규모가 4만 명까지 커지는 조직적 성과를 거두었다. 이런 성과가 나오기까지 많은 이들의 노력이 있었다. 그 중에서도 지역을 조직하고, 투쟁을 이끌어낸 전회련 학교비정규직본부의 이태의 본부장의 노력은 가장 돋보였다.

이번 '누가나에게이길을'은 두차례에 걸쳐 연재된다. 항상 신망 받는 선동가로, 조직가로서 기억되는 이태의 본부장의 삶의 궤적을 따라가보자.

 

 

아버지에 대한 기억

 

제 고향은 경기도 동두천이에요. 부모님은 1.4 후퇴 때 피난 내려오셨다가 만나셨어요. 원래 북에서 조금 알고 계시던 사이였는데, 피난 와서 부산에서 만난 인연으로 결혼하신 것 같아요. 월남은 하셨는데 막상 먹고 살게 없잖아요. 아버님이 그림을 그리셨어요. 그 당시에 그림 그리는 사람들 먹고 살기 어려웠죠. 그러니 미군들 초상화를 그리셨어요. 그게 그 당시에 유일한 수입원이었는데 서울에서 하시다가 안 되니까, 동두천에서 생계를 잇게 되면서 그곳이 고향이 된 거죠.

 

아버지는 서양화를 그리셨어요. 이름 있는 분은 아니고, 정식으로 미술을 배우신 분도 아닌, 그러니까 생계로 하기에 ‘아, 내가 이 정도는 그리겠다.’ 해서 생업으로 삼으신 분이죠. 그러다보니 초상화 같은 것. 옛날에는 데생이라고 하잖아요? 그리기 전에 사진을 인화기에 놓고 빛을 비추면 저 편에 그게 비쳐져요. 그럼 연필로 본을 뜨는 거죠. 그런 일은 어렸을 때 아버지와 함께 했죠. 그런 거 해주고 밑그림 그려주면 아버진 그림 그리시고. 국민학교 때 그림도구 가지고 가끔 야외로 나가서 같이 풍경화 그린 기억도 있어요.

 

근데 어른들이 술에 빠져서 가정폭력도 심하고 생계도 책임 안 지는 경우 있잖아요. 사실 저희 아버지도 술 드시다가 돌아가셨어요. 부모님 간의 부부싸움도 심했고요. 그래서 같이 풍경화 그리던 기억이 없었다면 저도 아주 폭력적인 사람이 돼있었을 거예요. (웃음) 아버지가 한 3개월 동안 곡기도 끊고 술만 드셨어요. 사회가 너무나 변해가는 걸 감당 못하신 거라고 전 봐요.

 

돌아가시기 전날에 어머니가 아버지를 싹 씻겨드렸어요. 누워계시니까 환자에게 하듯이요. 그 때 아버지가 어머니 손을 잡고 (우리 어머니 이름이 귀덕이에요.) “귀덕아 미안해.” 이렇게 말씀하셨거든요. 그렇게 부모님이 화해하면서 마지막을 정리하는 모습을 봤어요. 아버지 운명하시기 전에 목사님 와서 같이 기도하고. 어렸을 때 받은 상처들 보다는 그 모습이 더 기억에 강하게 남아있어요. 그런 잔잔한 기억들 때문에 제가 사람들에게 애정이 좀 더 많은 것 같아요.

 

 

말없이 자란 소년, 지역 공동체 운동을 만나다

 

어렸을 때는 불규칙적한 집안수입 때문에 안락한 가정생활도 전혀 없었고, 폭력도 보고 자랐죠. 아버지가 돌아가신 건 제가 중학교 입학할 무렵이었어요. 4형제인데 위에 고등학생 형 둘이 있었고, 동생은 국민학생이었죠. 아버지 여의고 한 푼도 없는 상황에서 어머니가 4형제를 다 기르셨어요. 뭐 필요한 게 있어도 집에다 뭘 요구할 입장이 못 됐어요. 그저 감사하며 자랐어요.

 

어렸을 때 동네에서는 제가 벙어린 줄 알았대요. 우리 집에 개를 키웠거든요. 개가 죽었는데 동네사람들이 잡아먹는 걸 봤어요. 예전엔 다 그랬어요. 키우던 개도 동네 사람들이 나눠 먹고 잔치하고. 난 그게 용납이 안 되는 거예요. ‘저 사람들 우리 개 잡아먹은 사람’ 어른들에 대한 시각이 그렇게 돼버렸어요. 그러니까 봐도 인사하고 싶지 않은 거예요. 소극적이었고 내성적이었고. 좋게 말하면 온순했죠. 사람들한테 피해 안 주고, 사고뭉치도 아니고, 말도 없고, 눈이 예뻐서 주변 사람들이 좋아했어요. 아버지 산소가 동네에서 한 20분 거리 산 속에 있었어요. 어머니 혼자 힘드니까 어머니한테 “학교에서 돈 안 내면 오지 마라더라.” 이런 얘기 한 번도 해본 적 없었어요. 나는 말 안하고 찔끔거리고 눈치만 보니까 어머니가 알고 먼저 챙겨줬죠. 그러다 혼자 감당하기 어려운 일 있으면 아버지 산소 가서 지내다가 오고. 그렇게 혼자 생각하고 혼자 판단하는 아주 내성적인 아이였어요.

 

저희 동네를 턱걸이라고 불렀거든요. 동두천에서도 버스를 타고 큰 고개를 하나 넘어야 됐어요. 원래 이름은 광암동인데 고개를 넘는다고 해서 턱걸이라고 불렀어요. 기지촌이 한창 번성할 때는 인구가 한 오천 명 정도 됐죠. 그런데 미국에 이민 가거나 왔다 갔다 하는 선배들하고 어울리면서 히피문화나 락 같은 새로운 세상을 접하게 되었어요. 또 80년대 초, 사회적 요구들이 쏟아질 때여서 지역사회운동, 문화운동, 독서클럽, 이런 것들이 자연스럽게 조성됐어요. 공동체 같은 것을 만드는 실험도 했죠. 군대 가기 전까진 교회나 주일학교 같은 데서 다양한 활동을 했어요.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정우회(뜻이 맞는 친구들끼리의 모임이란 의미였지만 실제로는 학생생활을 하면서 지역에 봉사도 하고 친목도 다지는 모임)’ 를 만들어 동네 친구들끼리 사회참여활동을 했어요. 바자회, 시화전을 열어서 수익금이 나오면 그걸로 양로원도 찾아가고 고아원도 찾아가고. 명절 때마다 4~50명이 몰려다니면서 친구 집에 인사하고 다니고. 추수랑 벼 베기 때는 가서 일 같이 해주고. 아내도 모교회라고 독서클럽 멤버 중 하나였는데, 몇 차례 봤다가 어울리게 됐어요. 같은 동갑내기니까.

 

죽음의 고비를 넘으면서 구체화된 사회문제

 

그런데 집안 사정이 그래서 군대까지 희한한 데 갔다 왔거든요. 집안이 워낙 어렵고 희망도 없고 어머니가 고생하니까 갔다 오면 돈도 준다, 직장도 알선해준다 선전하기에 지원한 거였어요. 그런데 다 사기였고, 지금 유공자가 된 것도 훈련과정에 반인권적인 행위를 당한 것에 대한 보상인 것 같아요. 우리 동기들이 한 20여명 되는데 안에서 사고로 희생당한 친구도 있지만, 나와서 자살하는 친구들이 꽤 많았어요. 저도 군대 갔다 오고 몇 년 동안 잠도 잘 못 자고 힘들었어요. 스스로 정신병원에도 가봤을 정도였죠. 젊은 사람이 말도 안 하지, 눈빛만 살아있지. 고집불통인데다 툭 건들면 팍 터지는 사람 있잖아요. 제가 그랬대요. 사회에 적응을 못 한 거죠. 공작원 생활을 했기 때문에 제가 술만 먹으면 막 이상한 노래 부르고 싸움도 하고, 새벽에 막 뛰어다니고. 정상적인 생활을 못 했으니까요. 그런데도 선배들이 다 받아줬어요. 덕분에 빨리 치유가 됐죠.

 

그러면서 지역생활공동체처럼 선배들이 돈을 좀 모아서 가게를 하나 만들고, 거기서 수익금이 나오면 또 다른 친구도 밀어주는 방식으로 ‘두레’라는 생맥주집을 했어요. 첫 번째 가게를 만들 때 같이 해서 한 2년 정도 운영했어요. 광주문제라든가 사회문제, 군부독재 문제들을 그 술집에서 나눴죠. 처음엔 지역공동체 활동을 하고는 있지만 속은 막 곪아있으니까 대화에는 참여를 못해. 어쨌든 ‘두레’라는 공동체 활동을 내가 운영하니까, 여러 친구들과 함께 하는 과정에서 치유한 거죠.

 

86년도에 인천에서 처음으로 대규모 집회가 열릴 때가 있었어요. 그 때 처음으로 집회에 가봤어. 사회문제가 조금 더 내 안에 구체화되었던 경험이었어요. 6월 항쟁 전에 구로공단 쪽에서 기획한 메이데이 행사에 갔다 잡혀간 적이 있어요. 집시법으로 한 달 정도 살다가 나왔는데, 사실 그때까지도 사회에 대한 목적의식이 명확하지 않았어요.

 

87년 노동자 투쟁을 보고 나도 현장에 가야 되겠다는 생각을 했죠. 아내하고도 뜻이 맞아서 노조활동도 좀 해봤어요. 당시에 도봉동에 삼영모방이라는 데가 있었어요. 예전에 단병호 위원장이 있던 동아건설 바로 옆 현장이었어요. 그때만 해도 동아건설에서 교육이라든가 공연이 있으면 우리 조합원들 데리고 한 4~50분 거리를 걸어갔죠. 조합원들 대다수가 지역에서 중학교까지 마치고 와서 기숙사 생활하면서 야간에는 고등학교 다녔어요. 친구들하고 같이 동아건설에도 가보고, 노동조합 투쟁이나 대학에 집회 있으면 다녔었죠. 그런데 90년도에 해고당하면서 1년 정도 싸우다가 갑자기 확 흐트러지게 되더라고요. 와중에 애가 생겨서 그냥 정리됐어요. 그 이후로 노동조합 활동을 안 하고 생계에만 신경썼죠.

 

 

가족에게 소홀했던 남편, 그리고 아빠

 

제가 62년생, 쉰 이제 둘 됐네요. 예전엔 더 젊어 보였어요. 노조 일 하면서 흰머리도 생기고 엉망이 돼 버렸어. 내가 집에서는 상당히 게으르고요. 푼수 짓도 많이 하고 삐치기도 잘 삐쳐요. 우리 딸이 볼 때는 아빠가 권위가 전혀 없는 거야. 우리 딸이 초등학교에 근무하는 우리 조합원이에요. 근데 내가 자기 아빠란 얘긴 절대로 하지 말래.(웃음) 자기가 볼 때는 내가 항상 부족한 사람으로 보이나 봐요.

 

집사람은 더하죠. 젊었을 땐 엄청 싸웠어요. 아내는 사회생활 없이 집에 묶여있었으니까요. 저도 어떤 것이 행복한 가정인지 몰랐고요. 어머니 일하는 것만 봤지. 부모가 애들한테 어떻게 해야 한다, 남편이 가장으로 어떤 역할을 해야 된다, 이런 걸 보고 자라야 하잖아요. 그런 경험이 없으니까 집은 그저 안식처라고 생각한 거예요. 바깥에서 일하고 집에 오면 쉬어야 되는 거야. 항상 집사람한테 뭐 시키기만 했죠. 귀찮은 일 되돌아오면 짜증내고. 나름 같이 운동했다고 하는 사람인데, 나는 직장생활하고 밤늦게 들어오고, 자기는 집 지키고 애 어르고 이렇게만 살다 보니 상당히 심각해졌던 것 같아요. 아내의 우울증도 심해지고 공격적으로 변하더라고요. 저는 몰랐죠, 원인이 저한테 있는 줄. 차라리 대판 한판 붙어서 싸웠다면 모르겠는데 풀 겨를도 없이 오래 쌓인 거죠. 게다가 형이 건설회사 하니까 자연히 저도 건설업 쪽으로 갔는데, 건설계통은 남자들 돈 씀씀이도 험하고 널널해요. 그러다 집에 가면 그런 분위기가 싫으니까 늦게 들어가고 안 들어가기도 했죠.

 

그런데 12년 전, 아내가 마흔 되던 해에 나한테 선언을 했어요. 대구에 미술치료 하는 데 일주일 동안 공부하고 오겠다고 데려다달라는 거예요. 1주일 후에 서울에서 만나 같이 차 타고 오면서 얘기를 하는데, 그동안 왜 남편한테 의지만 하면서 자기 스스로 삶을 개척하지 못 했나 반성하고 왔대요. 더 이상 모든 책임을 나한테 떠넘기지 않겠다. 대신 공부를 시작하고 경제적으로 독립하겠다. 그걸 마칠 동안은 자길 적극적으로 지지해라. 이렇게 얘기를 던지는 거예요. 좋다. 네가 공부를 하겠다는데 밀어주마. 그때부터 아내는 6년을 공부했어요. 방통대부터 시작해서 야간대학도 다니고, 사회복지사 1급을 땄어요. 그리고 지금은 노인복지회관의 사회복지사로 근무해요.

 

 

학교비정규직으로 일하면서 찾게 된 희망들

 

저는 집사람 공부할 때만 해도 여전히 건설회사 토목 소장이었으니까 전국을 다녔죠. 어떨 때는 일 년 동안 겨울이나 장마철, 한 두 달만 집에 왔을 정도로 가정에 소홀했어요. 이 생활이 15년을 가니까 아내는 극한까지 왔다 판단했나 봐요. 2007년 봄에 하던 일을 다 그만두고 갑자기 학교에 들어가라는 거예요. 직접 말을 못하고 고등학생이었던 딸을 통해서 하더라고요.

“아빠, 엄마가 이렇게 안 하면 우리 헤어질 수도 있대.” 심각하게 받아들여지더라고요. 진짜 하던 일 정리하고 학교에 들어갔어요. 학교가 어떤 곳인지도 몰랐어요. 그저 아내가 보기에 내 생활이 그렇게 신뢰가 없었던 거죠. 저 사람 저렇게 놔두면 우리 가정 어떻게 될지 뻔하다. 아예 생활 패턴을 바꾸지 않으면 저 사람 안 바뀐다. 그랬던 것 같아요.

 

건설회사에 있었으니까 시설 쪽을 잘 알잖아요. 그래서 시설 일을 맡아 했어요. 학교라는 데가 참 좋아요. 건설회사 있을 때는, 최대 목표가 더 많은 이윤을 내는 거잖아요. 대부분이 거의 하도급을 줘요. 적게 주고 더 많이 찾아와야 회사의 이윤이 많아지잖아요. 이게 일상이에요. 그러니 편법, 불법이 많죠. 하도급 직원들 형편도 어렵고. 내 딴에는 그래도 젊은 시절 그런 과정을 거쳤으니까 다른 소장에 비해서는 그 사람들 먼저 챙겨줬지만요. 최대한 이윤을 내기 위해서 아부도 해야 되고요. 그런데 학교는 그런 게 없어요. 마음이 너무 편한 거야. 그리고 학교는 정해진 시간에 출근해 정해진 시간에 퇴근하잖아요. 학생들이 행정실 가서 뭐 고쳐달라고 하려면 용기를 내서 오거든요. 그런데 미리 각 교실이나 특별 활동실을 점검해요. 그러니까 같이 있던 교직원이나 학생들이 좋아하는 거죠. 내가 하는 노동에 대한 대가들이 표정으로 바로 바로 나타나거든요. 나도 웃게 되고 웃으니까 학생들이 가깝게 대해주고. 표정부터 사는 방식까지 완전히 바뀐 거예요. 사실은 학교가 절 사람으로 만들었어요. 1년 지나니까 다음 해에는, 아내가 밤새 공부하고 자격증 따는 모습을 보니 나도 아내에게 지지 않으려면 공부해야겠다 싶어서 야간대학도 다녔어요. 예전에 못했던 취미생활도 하고. 스스로를 위한 투쟁을 하게 되고요.

 

예전엔 먼 훗날을 기약하지 못했어요. 그런데 ‘내가 앞으로 어떻게 하면, 그 다음엔 이렇게 바뀔 것이다.’ 이런 미래에 대한 희망이 있으니 사람들이 대하는 게 달라지더라고요. 전 큰 건설회사 소장 일을 하다가 학교에 비정규직으로 왔어요. 사회적 신분은 오히려 나빠졌는데, 사람 사는 삶이라든가 가족관계, 일상의 계획을 찾게 되었어요. 놀러 갈 계획이 잡히고 취미를 같이 생각해보고 가끔 영화도 같이 보게 되고. 이게 가능하더라니까. 저한테는 학교가 진짜 인생의 전환점이 된 거죠.(다음호에 계속)

 

정리 │ 서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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