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정으로, 희망으로 남아야 할 기륭투쟁_금속노조 기륭전자분회 유흥희 분회장

by 센터 posted Mar 19,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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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륭투쟁 경과

2005년 4월 30일 문자해고, 잡담해고 당한 노동자 문제제기
        7월 5일 노동조합 결성    
        7월 31일 계약직, 파견직 노동자에 대하여 계약해지 시작
        8월 3일 노동부로부터 불법파견 판정
        8월 24일 해고중단·성실교섭·정규직전환 요구하며 파업돌입
        10월 17일 구속됨. 공장 앞 천막농성 시작, 기륭전자 불법파견 벌금 500만 원 납부
2006년 30일 단식, 최대주주변경(이영수/ 에스엘인베스트먼트)    
2007년 최대주주변경(송재조/ 아이리스파트너즈)
2008년 최대주주변경(최동열/ 현 대표이사)
        기륭전자 본사 부지매각
        94일 단식, 구로역 cctv탑 고공농성 등 비정규직의 상징 및 사회적 문제로 대두됨.
        8월 본사 부지 매각 후 신대방동 이전
2010년 10월 단식농성 및 포크레인 고공농성 전개
        11월 1일 합의(국회에서 조인식진행)
2011년 10월 5:1 무상 감자 결정
2012년 12월 중국소주공장과 본사건물 매각
2013년 5월 2일 ‘8년 만에 현장 복귀’ 기자회견 후 10명 전원 출근함. 사측은 자리가 없으므로 회의실에 대기해 줄 것을 요청해 회의실에서 업무대기 시작함.
        5월 27일 임시주주총회 90%감자 결정
        6월 12일 노사협의회 진행함. 돈이 없어서 4대 보험가입 어렵고, 직원들도 다 임금체불 중인데 투자자에게 투자받으려고 하니 회사가 잘 될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함. 노동조합은 최소한 4대 보험만이라도 먼저 처리하고 논의하자 제안 했지만 이를 거부함.
        6월 20일 4대 보험 처리라도 먼저 하자는 요청에 회사가 안정되어야 한다는 주장만 하여, 회사가 안정되기 전엔 직원으로 보지 않는 것이냐는 질문에 답변을 피함.
        6월 26일 1/4분기 보고서 3억 7천 당기순이익 공시
        7월 9일 노사협의회 진행함. 여전히 회사가 정상화 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되풀이 함.
        7월 15일 소액 공모하여 6억 1천만 원 성사
        7월 18일 전환사채발행(BW) 13억 성사(3자배정방식)
        7월 24일 노사협의회 진행함. 직원(퇴사자)체불임금 해결함. 복귀자는 일을 해야 직원으로 인정한다고 하여 합의서를 지키지 않겠다는 것이냐고 항의하니 합의서가 헌법이냐며 정면으로 합의를 뒤집는 발언을 함.
        7월 31일 공문 발송함. 반기감사를 이유로 20여 일을 기다려 달라는 것은 합의서를 이행하지 않겠다는 것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고, 이에 따른 모든 책임은 사측에 있다는 것을 밝힘.
        8월 29일 주권매매거래정지(상장폐지 실질심사 대상여부 심사)
        9월 24일 상장적격성 실질심사 대상 결정, 재무팀 및 임원 본사 출근하지 않음.
        10월 10일 자체생산 LED TV 16억 공급계약 체결공시
        12월 4일 3/4분기 매출 5억 7천 4백만 원, 당기순이익 5억 8천만 원(포괄손익계산서)
        12월 16일 건물주 임대료체납과 임대차계약서 위반으로 12월 20일까지 건물에서 나가지 않으면 단전·단수 조치하겠다고 공고문 붙임.
        12월 30일 오전 9시 몰래 본사 이전함. 전 조합원 철야농성 돌입


 

학교와 집 밖에 모르고, 세상에 참견할 줄 모르던 고등학생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는 정화여상이라고, 제기동에 있었던 학교에요. 물론 나는 인문계를 가고 싶었어. 지금 생각11_1.jpg 해보면 ‘공부도 못하고, 공부에 취미도 없으니 안가길 잘했다.’라는 생각이 들지만 그 당시에는 너무 인문계가 가고 싶더라고. 그런데 집안 형편도 인문계를 가기 어려운 상황이었고, 더군다나 내가 쌍둥이다 보니까 간다고 하면 둘이 같이 인문계를 가야 하는 거야. 그래서 포기하고 정화여상을 간 거지. 내가 살던 곳이 구파발이었으니까 학교까지 가려면 한 시간은 걸렸지. 당시에는 고등학교를 시험 봐서 갔는데 학교 선생님이 내 실력에 맞게 갈 수 있는 학교를 찍어줬는데 그 중 한 곳이 정화여상이었어. 그 당시 정화여상이 아주 잘나가는 학교는 아니었는데 나름 상고 중에서는 1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전통 있는 학교였거든.
학교생활은 그냥 순둥이 모범생이었어. 집, 학교, 학원만 왔다 갔다 하는. 친구가 없는 편은 아니었는데 무리지어서 노는 타입은 아니었던 것 같아. 당시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처음으로 학원에 가게 됐어. 주판을 배워야 했거든. 주판을 배우는데 초등학교 3학년 정도 밖에 안돼 보이는 아이들이 몇 단씩 암산을 하는데 돌아 버리겠는 거야. 정말 짜증났지. 생계를 위해 주판은 배워야겠는데 너무 다니기 싫었어. 그 때 주산2급이랑 타자2급을 땄는데 지금 생각해봐도 자격증 딴 건 기적인거 같아. 너무 하기 싫었는데 어떻게 땄을까.

 

세상에 ‘참견’을 하게 된 계기 정화여상 민주화 투쟁

김소연 동지를 처음 만난 건 정화여상 민주화 투쟁을 하면서야. 둘이 같은 학교였기는 했지만 투쟁 시작하기 전에는 얼굴도 몰랐어. 학교는 같지만 과가 달랐거든. 김소연 동지는 정보처리과, 나는 상과였지. 나는 주판으로 계산하고 두드리는 그런 걸 배웠고, 김소연 동지는 도스 프로그램을 짜는 교육을 받은 거지.
고2 때, 그러니까 87년 11월 4일 날이었을 거야. 당시에 이미 학교재단 비리나 여러 문제들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어. 그 전부터 영어말하기 대회가 학교에서 준비되고 있었고, 88올림픽 D-365일 이럴 때 동원되어서 써니텐도 하고.(당시 올림픽을 앞두고 관제행사에 학생들이 동원되어 열을 지어 손을 흔드는 것을 써니텐 음료의 광고카피였던 ‘흔들어주세요.’를 빗대 써니텐이라 불렀다.) 또 ‘젊음의 행진’, ‘쇼 비디오자키’ 이런 거 할 때 학생들이 대거 방청하잖아. 그렇게 학생들 동원하면 돈이 나오거든. 학교 재단이 그런 것을 착복하고 있다는 이야기들이 계속 나오고 있었어. 물론 별로 큰 관심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지.
그런데 11월 4일 선생님들이 대자보를 붙였어. 아침에 학교에 갔더니 대자보가 3개인가 붙어 있었어. 어디서 많이 본 글씨체였는데 알고 보니 당시 사회 선생님이었어. 그래서 ‘이거 뭐지?’ 했지. 학교에 대자보가 붙었으니 학교가 뒤숭숭하잖아. 그래서 교장선생님이 다른 선생님들 모아놓고 이야기를 한 거야. 우리는 교실에서 방송을 통해 그 이야기를 듣고 있었고. 교장선생님이 술렁거리지 말고 자리를 지키라고 이야기 하는데, 대자보를 쓴 선생님이 이의제기를 하신거지. 그랬더니 교장 선생님이 방송 스피커랑 마이크를 끊었어. 그러니까 학생들이 ‘이거는 뭔가 있다. 소문으로만 돌던 것이 사실이었다.’라고 반응하기 시작한 거야. ‘전학생을 돈 받고 받았다,’, ‘장학금으로 사용했어야 하는 돈을 다른 곳에 전용했다.’ 등의 이야기들이 진짜였다는 것을 알게 된 거지.
당시 젊은 선생님들이 중심으로 움직였거든. 특히 우리 학교는 재단이 오래되다 보니 친인척들이 다 해 먹는 구조였어. 고등학교랑 중학교가 마주보고 있었는데 교장, 교감 등 주요 요직은 재단 식구들의 사돈의 팔촌까지 다 되어 있었고, 거기에 걸리지 않은 선생님들이 서명을 하고 대자보를 쓴 거지. 처음에는 7~8명 정도의 선생님들이 나섰는데 나중에는 15명으로 늘었어. 내가 그 당시 투쟁 자료집을 20년 넘게 가지고 다녀.
아무튼 그때가 나에게는 나름 인생의 전환점이 된 거지. 사회를 보는 눈이 생겼다고 할까. 아니, 뭔가 문제가 있기는 한데 나와는 거리가 먼 문제였다고 느끼기도 했고, 참견하고 싶지 않았는데 참견하게 된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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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화여상에서 만나 가리봉까지 김소연과 20년을 함께하다

93년부터 김소연 동지랑 같이 살기 시작했어. 20년이 넘었네. 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우리가 정화학교 민주화투쟁 자료집을 만들게 됐어. 김소연 동지는 그 당시 ‘우리교육’을 다니고 있었고, 나는 운전학원 경리를 하다가 그만뒀을 때였는데 잠시 쉬는 동안에 책을 만들게 된 거지. 정화여상 민주화투쟁 끝나고 나서도 우리는 일주일에 두 번 이상 만나서 독서토론도 하고, 공부도 하고, 사장이랑 관리자 흉도 보고 했었거든. 그 때 모이던 친구들이 각자 자기 포지션으로 이동하기 시작한 거지. 공장으로 들어가는 친구들도 생기고.
처음 직장생활 하면서 공장에 대한 고민은 조금씩 했었어. 친구 중에 먼저 현장에 들어가서 활동한 친구를 가끔 보면서 현장 이야기를 많이 듣잖아. ‘정말 세상이 그렇구나. 월급은 착복당하면서 사는구나.’ 이런 생각도 들고, 나도 경리로 일했으니까 사무직이 얼마나 빛 좋은 개살구인지를 안 거지. 하지만 부모님들 기대가 있던 거잖아. ‘잘 가르쳐놨더니 결국은 공장이냐.’ 뭐 이런. 그런 것이 많아서 3년 고민하다가 92년에 가리봉으로, 공장으로 가게 된 거지. 김소연 동지가 92년 봄에 가리봉에 왔고, 내가 같은 해 가리봉으로 왔어. 내가 김소연 동지보다 한 달 정도 늦게 들어갔나. 아무튼 첫 직장을 김소연 동지랑 내가 같은 곳으로 들어간 거지. 왔으니까.
나는 QC(품질관리)부서에서 일했고, 김소연 동지는 생산부서에서 일했어. 그런데 김소연 동지는 한 6개월 정도 일하다 정리를 하고 다른 곳으로 간 거야. 그런데 나는 그만두지 못하고, 그 회사에서 3년 7개월을 일했지. 1년이 지나고, 독립을 해서 자취를 시작한 거지. 김소연 동지는 그 전에 기숙사 생활도 했었거든. 그런데 기숙사 생활은 정말 피곤해. 나도 두 달 정도 했었는데 정말 할 만한 것이 아니더라고. 그래서 기숙사 생활은 도저히 못하겠다 싶어 작은 방을 마련했지. 당시 소위 벌집(공단에 있었던 벌집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으면서 미로처럼 되어 있던 집)이라 불리던 곳에서 김소연 동지랑 둘이 자취생활을 시작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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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가들이 공장을 떠나던 1992년, 쉽지 않았던 첫 공장

내가 거기 들어갔을 때가 스물 세 살에서 네 살이었는데 공장은 그 당시만 해도 스물 넷 만 넘으면 되게 나이 많은 사람 취급을 받는 거야. 시골에서 열아홉에서 스무 살 된 친구들이 올라오니까. 거기서 오는 스트레스가 첫 번째였어. 특히 내가 스물 예닐곱 살이 되니까 얘들이 거의 노땅 취급을 했지. 또 하나는 공장에 있으면서 소모임이나 이런 것을 했는데 제대로 안 굴러가고, 내용도 잘 안 채워지는 거야. 뭔가 하고 싶은 것이 구도대로 나오지 않고, 사람도 계속 바뀌니까.
회사도 워낙 감시가 심했어. 어느 날 관리자가 나를 불러내서 나에게 김소연을 아냐고 물어보는 거야. 그래서 모른다고 했지. 이름도 들어본 적 없다고. 그러기에 관리자가 과를 물어보더라고. 상과라고 말했더니 “과가 달라서 모르나.”라며 넘어갔지.
그날 집에 들어가니 김소연 동지가 “관리자에게 불려갔었냐?”라고 물어보더라고. 그러면서 하는 얘기가 김소연 동지가 부서 사람들이랑 쉬는 날 자전거 타러 놀러갔는데 그 중 한 언니가 학출노동자였던거야. 그리고 그게 걸려서 자기가 사표 쓰고 나갔나봐. 그래서 회사가 김소연 동지랑 나를 불러서 조사했던 거지. 회사가 굉장히 철두철미하게 노동자들을 감시했던 거야.
생각해보면 92년은 원래 현장에 있던 활동가들도 현장에서 나와 제 먹고 살길 찾아가던 때였잖아. 그래도 그 당시 내가 현장을 갈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아무것도 모르는 초짜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 같아. 어쨌든 먹고사는 문제는 어디서든 해결해야 한다는 마음이 반 이상이었지. 거기에 의미 있게 살려면 활동이라는 것이 필요할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만 있었던 거지. ‘나는 꼭 이 활동을 해서 노동조합을 건설할 거야.’ 이런 마음으로 들어가지는 않았어.
그래서 버티는 것은 쉬웠는데 하면서 욕심이 생기게 되더라고. 그런데 그 욕심만큼 사람 마음 얻는 게 쉬워? 다 거짓말이지. 특히 뭔가를 결의해야 하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거고. 그래서 그런 벽에 부딪히면서 현장을 정리하게 됐지. 현장은 나의 역량에 맞는 사업이 아니라고 생각했지.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누구를 챙겨줘야 한다는 잘못된 생각이 생긴 것 같아. 사람 만나는 것이 일이 된 거지. 처음에는 사람 만나면 즐겁고, 밤새도록 놀아도 좋았었는데 어느 순간 일이 된 거야. 아무튼 내 주변이 발전되는 모습, 변화되는 모습도 없고, 의지할 곳, 같이 했던 사람들이 다 떠나다 보니 지쳐 도망치듯이 현장을 나온 거 같아.

 

노동단체 상근활동을 거쳐 7년만에 다시 공장으로

회사를 그만둔 후 사회단체 활동을 하기 시작했어. 구로지역에는 반달 도서관(반달 도서원)이라고 되게 큰 도서관이 있어. 무료로 도서대여를 하면서 노동문화, 소모임 단체를 했던 나름대로 역사가 오래된 곳이야. 거기에서 지역 노동자 문화사업을 담당하는 상근을 했지. 당시 활동비가 30만원이었나, 40만원이었나. 거의 무보수 상근이었어. 그런데 97년 즈음에 거기가 망했거든. 당시 상처가 커서 이후 두문불출했어. 한 1년 동안은 아무 일도 안하고 쉬었어. 그냥 돌아다니면서 쉬다가 필요할 때 알바해서 돈 벌었던 거지. 다시 안 되겠다 싶어 현장을 갈까 했었는데 당시 현장은 도무지 엄두가 안 나더라고.
그래서 당시 인쇄노조가 취업알선 센터라고 무료취업알선 사업들을 했었거든. 그 때 상근자로 갔지. 거기서 3년 넘게 일했나. 그런데 그 곳이 노동조합으로서의 기능보다는 후원사업의 의미가 큰 거야. 만날 대표님이랑 말싸움해야 하고. 그게 너무 힘들었어. 워낙 연배도 있으신 분이었거든. 이건 아니다 싶어 정리하고 나왔지. 그게 2000년대 초반이야.
그 후 잠깐 아르바이트를 했어. 거기는 파견회사였거든. 휴대폰 케이스를 만드는 조그만 회사였지. 그런데 휴대폰 케이스가 워낙 소모품이고 단종되면 끝이야. 6개월 쯤 일했을까. 하루는 갑자기 점심시간에 불러 모으더니 오늘은 청소를 하재. 아무 생각 없이 대청소를 했지. 일을 하고 말고는 우리가 따질 것도 아니고, 이전에 주야로도 일하고 했었으니까 좀 쉴 수도 있다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청소가 끝나고 5시 쯤 우리를 모아놓더니 조장 언니가 파견 사람들은 내일부터 나오지 말라는 거야. 우리가 항의했지. 장난하지 말라고. 왜 우리가 나오고 말고를 언니가 결정하냐며 싸운 거지. 그 때 싸울지 말지 고민했어. 그런데 같이 일했던 얘들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별로 싸울 생각은 없었던 거야. 나도 혼자 싸우기는 더 싫었지. 그래서 최소한 제대로 된 사과는 받아내자고 해서 원청 차장이 와서 사과했어. 그리고 파견업체에 항의전화를 했지. 그래서 파견업체 과장이 와서 우리에게 사과를 하고, 해고예고수당을 주기로 한 거지.
그때 나는 긴 시간 쉬다가 다시 일하게 된 거였는데 일하다보니까 괜찮았어. 그 때 같이 일했던 친구들이랑 지금도 연락하거든. 그래서 그냥 일을 해도 되겠다 싶었고, 다시 공장으로 취업을 하게 된 거지. 다시 공장으로 들어갈 때까지 7년이 걸린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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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견노동자, 취업과정부터 해고까지 황당한 이름

취업을 하게 됐는데, 예전에 취업할 때에는 공장 앞에 취업공고 붙어져 있는걸 보고 이력서를 써서 합격하면 들어갔거든. 그런데 이제는 무가지를 봐야 한다는 거야. 그렇게 안하면 취업이 안 된데. 취업공고가 붙어있는 회사가 없어. 그 때는 그게 파견인지도 몰랐지. 나중에 그게 파견이라는 것을 알았지. 당시에는 그냥 희한하게 바로 취업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회사를 거쳐야 하고, 내가 거치는 회사와 실제 일하는 회사가 다른 곳이라고만 생각했지.
당시 워커스스테이션이라고 하는 파견회사를 통해서 들어갔는데 이력서를 내고 나니 얼마 지나지 않아 전화가 왔어. 조금 기다리라고 하더니 나를 데리고 가리봉으로 가더라고. 근데 가리봉에 한 떼거지의 사람들이 있는 거야. 그리고 그 사람들을 다 봉고차에 태웠어. 처음에는 이렇게 인신매매가 되나 싶었지. 그 차가 우리를 내려다 준 곳이 기륭전자였어. 여기가 일할 곳이라는 거야. 황당했지. 이런 회한한 취업이 있을 수 있을까 싶었고. 월급 명세서를 보니까 기륭전자가 아니라 워커스스테이션이라고 써 있었어. 그 사람들이 해줬던 것은 나한테 그냥 봉고차로 태워다가 데려다 준 것 밖에 없고. 심지어 월급이 어떻고, 근무조건이 어떻고 이런 것도 물어본 적 없거든. 오히려 기륭에 와서 총무부장이랑 면담하면서 일하고 싶을 때까지 일해도 된다고 해서 근로계약서도 안 쓰고 일한 거니까.
그 때가 2005년 6월이었거든. 당시 김소연 동지는 원래 기륭에 오래 다니고 있었거든. 그런데 파견업체를 통해 취업을 하다 보니 내가 기륭에 입사한 지도 몰랐지. 둘이 서로 공장에서 만났는데 서로 황당하더라고. 이후 내가 제대로 일한 건 한달 반 정도 됐나. 불법파견 판정도 나고 하니까 회사가 귀찮아서 3개월 계약해지 했던 거지.
들어가자마자 아줌마들이 나한테 제일 많이 이야기한 것이 “앞에만 보고 일해라.”, “딴 데 보지 말아라.”, “짤린다.”였어. 짤린다는 이야기를 제일 많이 들어서 이 아줌마들이 거짓말 하는 줄 알았어. 옆에 쳐다봤다고 짤린다는 것이 가당키나 한 이야기냐고. 심지어 못 생기면 짤린다는 말도 있었거든. 그런데 실제 기륭에서 벌어진 일이지.

 

2008년 단식투쟁 그리고 연대투쟁의 의미

연대투쟁은 나의 투쟁의 동력이기도 했어. 기륭투쟁하면서 답이 잘 안보이고, 답답하고 어려울 때 연대투쟁을 가면 힘이 나고,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하게 된 거야. 투쟁하는 사업장은 하루를 싸우든 백일을 싸우든 5년을 싸우든 힘겹기는 매한가지거든. 그런데 어떤 마음으로 투쟁하느냐가 그 힘겨움을 덜기도 하고 더하게도 하는데, 연대투쟁을 다니면서 그런 점들에서 많은 힘을 얻었어.
2008년 단식투쟁이 투쟁이 없었다면 내가 정말 그렇게까지 연대를 하려 했을까, 연대의 소중함을 그렇게 가슴 깊이 느꼈을까 하는 생각도 해. 그리고 연대가 나에게 그렇게 큰 힘이 된다는 것도 2008년 단식투쟁하면서 느꼈어. 우리의 투쟁이 그냥 그렇게 사람들에게 유명세를 탈 투쟁이었나 싶었거든. 물론 고공농성 하고, 긴 시간 투쟁 한다고 하면 사람들이 안타까워하지. 하지만 그런 투쟁이 없었던 것이 아니잖아. 그런데 시류를 잘 탔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투쟁이 TV에서 나오고 하면서 진짜 듣지도 보지도 못한 사람들이 엄청 많이 찾아왔어. 우리가 단식투쟁하고 있을 때 올라와서 만날 손잡고 우시는 동지들도 많았지. 단식 그만하고, 살아서 싸우자고. 그런데 그 사람들의 진심이, 그 사람들의 애절함이 눈에서 느껴지는 거야. 정말로 울고 매달리면서 단식 그만두라고 하는 사람들의 진심이 보이고, 마음이 읽혀졌던 거지. 그때 연대의 마음을, 그들의 진심은 읽으려고 해서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거지. 처음 남의 일을 내 일처럼 느낀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되었고. 아무튼 그 때 정말 큰 힘을 받았지.
그럴 때 느꼈던 것이 뭐냐면. 금속노조나 민주노총과 같이 투쟁하는 동지들은 우리처럼 투쟁하는 곳이 한두 곳이 아니잖아. 챙겨야 할 곳이 많아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약간 의무방어 같은 느낌으로 연대를 하지. 실제로 우리가 단식할 때 금속노조 서울지부도 한 달이 넘어서야 나타났어. 그래서 되게 서운했고, 원망의 대상이었지. 남보다도 못하다는 서러움도 있었고.
그런 것들을 다독여주고, 불식시켜줬던 것이 연대의 힘이었어. 다른 투쟁현장에 가서 나의 싸움을 돌이켜보고, 내가 그런 생각 할 때가 아니라는 생각도 하게 되었고. 아무튼 나의 자세의 변화를 느끼게 했던 거지. 그러면서 생각도 바뀌었어. 투쟁사업장 간의 연대는 연대가 아니라 우리 안의 단결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 거야. 민주노총, 금속노조는 우리 안의 단결로 봐야 하는데 당시에는 연대라고 생각했던 거지. 내가 그 사람들과의 관계를 잘못 해석하고 있었던 거야. 그들에게 늘 연대를 요구하다보니까 안 보이면 서운하고, 안하고, 이런 것으로 표현되고. 오히려 그 안에 단결을 찾았다면 달랐을 텐데. 
어쨌든 다른 곳에 가면서 나의 싸움을 돌이켜보는 것도 생기게 되고. 다른 사람을 만날 때 내가 어떻게 변해야 하는지,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와 같은 나의 자세의 변화를 느끼게 된 것이 연대였거든. 촛불시민이나 새로운 사람들과의 만남. 예술인들을 만나거나, 종교인들을 만나거나 이런 거는 하루하루 설레였어. 이런 생각도 한편으로는 했고,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다고 할까. 내 평생 언제 변호사를 얼굴 맞대고 볼 기회가 있었겠어. 가수들도 그렇고. 유명인사들도 그렇고. 국회의원들도 코앞에서 만나고, 악수하고. 이런 과정들 속에서 나도 힘을 받았고, 또 내가 변화되기도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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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으로, 긍정으로 남기 위한 투쟁

조합원들 모두가 지치고 힘들지만 우리 안의 승리하고픈, 제대로 정리하고픈 마음으로 버티고 있어. 스스로도 ‘내가 지금 건널 수 있는 강을 건너는 걸까.’ 하는 질문을 수도 없이 하게 돼. 그런데 어쨌든 지금은 최선을 다해보자는 거야. 내가 강을 건너야 한다는 명제 자체가 틀렸다면 모르지만, 틀리지 않았다면 건너기 위한 최선의 방법을 만드는 것이 이것이 우리의 일이라고 생각해. 해보지도 않고 정리하면 우리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꿈 까지도 정리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거지.
또한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투쟁은 내가 어려웠을 때 다른 사람이 나에게 어떻게 했는지에 대한 연대의 보답이기도 해. 무엇보다 포기할 수 없는 것은 이렇게 길게 투쟁했고, 승리했다고 동네잔치까지 벌였는데, 사람들에게 그 마지막이 ‘끝내 안 되는구나.’로 남을 수는 없는 거지. 이게 제일 두려워. 우리의 투쟁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염원이 담겨 있는데. 나는 사람들에게 기륭투쟁이 하나의 긍정으로 남았으면 좋겠어. 투쟁하는 모든 이들, 연대하고 함께해 준 모든 사람들에게 우리의 투쟁이 희망이었으면 좋겠어. 이 투쟁을 통해 기륭조합원들이 손에 쥘 수 있는 금전적인 것이나 여러 가지 물질적인 이득은 없어. 하지만 긍정으로, 희망으로 이 투쟁을 남기고 싶어. 우리는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는 거야. 사회적 토론회도 해보고, 기업의 투기화를 정리해보고, 이런 것들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것들을 하자는 것이 우리의 마음이라고 생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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