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로 향한 운동, 건축물의 벽돌이 되겠다는 마음으로_김진억 희망연대노조 나눔연대국장

by 센터 posted Oct 31, 2016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 - Up Down Comment Files

인터뷰·정리 : 이혜정 기록 노동자


편집자 주 : 추석 연휴동안은 쉬시겠지, 하는 기대로 연휴 마지막 날 인터뷰를 잡았지만 인터뷰는 결국 농성장에서 이루어졌다. 티브로드 간접고용 비정규 노동자들이 부당해고에 맞서 노숙농성을 한 지는 229일째, 국회 앞으로 온 지는 18일째였다. 그늘 하나 제대로 드리워지지 않는 국회 앞 농성장에는 연휴임이 무색하게 많은 동지들이 마음을 나누려 하나 둘 모여들었다. 그이는 찾아온 동지들과 반갑게 인사와 안부를 나누면서, 연신 자랑스러운 동지들이라며 벅찬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자신의 이야기를 할 때보다 조합원들의 이야기를 할 때 목소리에 더 힘이 실렸다. 그이의 오랜 조직 활동 동력이 어디서 기인하는 것인지가 어렴풋이 짐작되었다. 사람 좋은 얼굴로 웃는, 희망연대노조 김진억 나눔연대국장을 만났다. 이야기는 두 차례에 걸쳐 싣는다.  


도입사진.jpg

김진억 희망연대노조 나눔연대국장(@희망연대노조)


 1호선 완공을 지켜본 서울 토박이 소년


고향은 서울 용두동이에요. 청량리 가기 전에 신설동 옆에 있는 동네예요. 서울서 나고 자랐죠. 어린 시절 기억은 잘 없는데 어머니 이야기로는 굉장히 개구쟁이였다고 해요. 짓궂게 놀고, 흙 뒤집어쓰고 놀고 그랬대요. 70년대 당시는 막 개발이 시작되던 때였거든요. 74년도엔 지하철이 놓이기 시작했고요. 초등학교 때였는데 막 포장이 깔리기 시작하고, 지하철 공사로 어수선하던 거리를 따라 학교를 오갔어요. 살던 곳은 1호선 라인이어서 1호선이 완성되어가는 모습을 목격하며 자랐죠. 거기서 10년 살았어요. 중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그 근방에서 나왔거든요.


동네에 개천이 있었어요. 안암천이라고 개운사에서 흘러나오는 개천이죠. 지금은 물이 거의 다 말랐지만 그때는 물도 많고 맑아서 뱀이나 개구리도 볼 수 있었어요. 개천을 가로지르는 다리들이 놓여있었고, 다리 밑엔 넝마주이 분들이 지내고 있었죠. 주민들이 천변에 밭을 일구기도 했고요. 달리기 시합을 하곤 했는데 개천을 한 바퀴 빙 돌아오는 거였어요. 어린 아이에겐 꽤나 장거리 코스였죠. 늘 저는 초반부터 선두를 치고 나갔는데, 이쪽 다리에서 저쪽 다리까지 돌아오는 동안 지치는 거예요. 오버페이스를 한 거죠. 나중에는 중위권으로 뒤처지게 됐어요. 어린 마음에 분하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했는데 생각해보니 내가 너무 과욕을 부렸구나, 싶더라고요. 그때 인생에 대해 뼈저리게 깨달았죠. 아, 겸손해야 하는구나. 나대면 안 되겠다.(웃음) 내 실력이 이거구나.


학교에서 집으로 가는 길에 부촌이 있었어요. 이층집들이 늘어서있고, 지나가다보면 피아노 소리가 들리곤 했죠. 그 동네만 지나가면 친구들이 초인종 누르고 도망가는 장난을 쳤어요. 오해하시면 안 되는 게, 친구가 했지 저는 안 했어요. 저는 저만치 뒤에서 지켜보고 있다가 같이 도망가곤 했죠. (웃음)


순둥이라 배우게 된 태권도


어렸을 땐 개구쟁이였지만 굉장히 순했어요. 한번은 여자 친구한테 꼬집힌 채 집에 돌아 왔는데 어머니가 화가 많이 나셨죠. 그 이후로 태권도를 다녔어요. 어려운 형편에도 어머니가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으셨나 봐요. 중학교 2학년 때까지 6년 정도 다녔어요. 다쳐서 병원에 입원했을 때를 제외하고는 중, 고등학교 다 개근이었어요. 어릴 때 굉장히 크게 다쳤던 적이 한번 있어요. 야구를 하다가 발에 걸려 넘어졌는데, 하필 나무 그루터기로 고꾸라진거예요. 위장하고 척추가 부딪쳐서 천공이 생겼어요. 그것 때문에 2주 동안 입원하고 수술하느라 학교를 못 갔어요. 그게어린 시절 중 제일 큰 사건이라면 사건이었어요. 그 일을 제외하곤 웬만큼 아파도학교는 꼭 갔어요. 일탈도 없었고, 일상도심심한 편이었어요. 어른들이 하지 말라고 하는 건 안 했거든요. 크게 반항한 적도 없고요. 무난하고 무탈하게 어린 시절을 보낸 편이죠.


저는 삼남매 중 둘째고, 부모님은 저와누나, 여동생을 비교적 차별 없이 키우셨어요. 어렸을 땐 누나가 저를 많이 챙겼어요. 집안이 어려워서 학교급식을 누나만했거든요. 급식비를 내면 학교에서 빵하고 우유를 주는데 누나가 그걸 안 먹고 집으로 가져와서 저와 여동생을 챙겼어요.어린 마음에도 고마웠죠.


어린 시절 기억 속 부모님은 살기 위해아등바등하시던 모습으로 남아있어요. 다들 못살았던 때니까요. 아버지는 오랫동안 철공 일을 하셨고, 어머니는 안 해본 장사 없이 별별 장사를 다 해보셨다고 해요. 이것저것 받아다가 파는 거죠. 어머니는 그 시절 이야기는 잘 안 하세요. 너무 힘든 시절이어서···. 아버지는 20년간 철공 일을 하면서 모은 돈으로 제가 중학교 들어갈 무렵엔 작은 철공소를 차리셨어요. 직원들이 적을 땐 두세 명, 많을 땐 네다섯 명 정도 규모였죠. 철공소를 차리고서야 어머니는 장사를 그만두고 함께 철공소를 운영하셨죠. 직원들에게 식비를 줄 수가 없어서 밥을 해서 줬거든요. 김장하고 반찬 만드느라 어머니가 많이 고생하셨죠.


마음에 생긴 작은 파문, 그게 옳은 건가?


초등학교 때 한 가지 기억나는 것은, 대통령 선거 때 박정희가 잘하니 찍어야 한다고 아버지에게 이야기를 했던 거예요.학교에서 선생님이 그렇게 시킨 거죠. 반공교육도 많이 받았고, 국기 게양식, 하강식할 때마다 애국가가 운동장에 울려 퍼졌어요. 그럴 땐 축구를 하다가도 멈춰 서서경례를 해야 했어요. 안 하면 혼나거나 벌점 먹거나 그랬거든요. 전반적으로 강압적인 분위기에서 학교생활을 보냈죠.


그게 전부 옳은 건가? 그런 생각을 중학교 때부터 어렴풋이 했던 것 같아요. 세계사, 역사, 철학 과목을 좋아했는데, 어느 날 도덕 선생님이 성선설이 맞냐, 성악설이 맞냐 물어보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당연히 성선설이다”라고 대답했어요. 사람이라면 본성에는 착한 마음이 있다는 확고한 믿음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 외에도 세상을 알아간다는 것에 재미를 붙였고, 차츰 그 속에서 진로를 생각하게 됐죠. 어렸을 때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을 했는데, 고등학교 진학하면서 사회사업가라는 직업으로 좀 더 구체화되었어요. 특별한 경험을 해서라기보다 텔레비전 봉사프로그램을 보면서 그런 생각들을 키워왔던 것 같아요.


제가 고등학교 때 광주항쟁이 있었거든요.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일어난 일이긴 하지만 당시 계엄령이 떨어지면서 서울에서도 차가 다니지 않았거든요. 신문도 온통 암흑 천지였으니까요. 언론 통제를 하면서 기사가 삭제된 채로 신문이 발행되었던 거죠. 간혹 진실을 이야기해주시는 선생님들도 있었고, 광주가 고향인 친구들로부터 건너건너 전해 듣기도 했어요. 뭔가 문제가 있다, 깨달은 거죠. 내가 사는 사회가 정상적인 곳은 아니다.

건대항쟁.jpg

1986년 10월 28일, 1,288명이 구속된 건대항쟁


‘불온서클’ 멤버가 되다


재수를 해서 사회학과로 대학 진학을 했어요. 고등학교 때까지 이어져 온 고민들의 연장선에서 내린 선택이었어요. 재수할 때 신문에 모모 대학의 불온서클 명단이 실린 걸 봤어요. ‘정보가 통제되고 왜곡되고 있다’라는 경계심과 ‘불온’이라는 이름에서 오는 막연한 두려움이 있었는데, 막상 대학에 들어와 언더서클에서 가입을 권유받자 덜컥 가입해버렸어요. 아마 이미 들어가기로 마음먹고 있었나 봐요. 선배가 들이밀던 책이 어떤 책인지 이미 알고 있었거든요. (웃음) 선배 자취방에서 7명 정도 모여서 학습을 했어요. 학년이 올라가면서 멤버 수는 줄었어요. 아무래도 계속 갈등하고 두려워하는 거죠. 제가 운동권이라는 걸 부모님은 모르셨어요. 그러다가 86년 건국대 애학투련(애국학생투쟁연합) 투쟁 때 구속되면서 부모님께서 알게 되셨죠. 1,200여 명이 구속되었고, 당시 단위사건으로는 최대 구속 사건이었어요. 언론에서 진압 장면을 생중계했고, 정말 군사 작전을 방불케 했거든요. 토끼몰이를 하며 치고 들어오니까 건물로 몰려 들어갔어요. 바리케이드 치고 돌 던지고, 최루탄 쏘고, 거의 전쟁터였어요. 그렇게 대치하다가 3일 만에 진압됐죠. 당시 저는 최루탄 파편에 맞아서 다치는 바람에 병원에 일주일간 입원했다 조사받았어요. 그때 부모님이 많이 놀라셨죠. 치소에서 30일 살다 기소유예로 나왔는데, 그 30일 동안 아버지가 연탄가스 중독으로 쓰러지셨어요. 의식이 없으셨어요. 아버지 병간호를 하다가 군대를 갔는데, 마음이 편치 않았어요. 형사가 어머니께 그냥 두면 운동할 게 뻔하니 저를 군대에 보내라는 전화를 하기도 했어요. 학교에서도 압박이 계속됐고, 결국 강제입대를 한 거죠. 4월에 들어가서 11월에 첫 휴가를 나왔는데, 그때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어쩌다 보니 하게 된 노동 운동


그 상황에서 또 운동을 할 수는 없었어요. 제대하고 바로 복학했어요. 이미 제가 속해있던 서클은 없어진 상태였어요. 27개월 사이에 많은 것이 변한 거죠. 저도 가장이 되어서 복학했죠. 취업을 해야겠다는 생각 밖에 없었어요. 아버지가 운영하시던 철공소를 처분한 돈으로 생활하면서 일자리를 알아보기 시작했어요. 하고 싶었던 활동이나 계획했던 삶이 현실과 계속 마찰이 생겨서 힘들었어요. 그러다 찾아낸 것이 야학이었어요. 야학은 학업과 취업 준비를 병행하면서도 할 수 있겠다 싶었거든요. 제가 다닌 곳은 ‘세민야학’이라는 곳이었는데, 이른바 생활야학, 노동야학이라고 불리는 곳이었어요. 검정고시 과목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 대한 인식, 삶의 방향에 대한 것들을 나누고 배우는 곳이었어요. 주변 공단에서 학생들을 모집했는데, 졸업생들이 소개해서 오기도 하고, 광고전단을 보고 오기도 하고, 길거리 모집을 통해 오기도 했어요. 야학교사로 일하면서 동부지역야학협의회에서 활동을 하게 되었고, 야학 졸업생들로 구성된 동부지역노동자회라는 모임을 만드는 데까지 이어진 거예요. 하다보니까 노동 운동을 하게 된 거죠. (웃음) 그렇게 운동의 방향을 찾게 되었어요.


활동이 재밌었어요. 사람들과의 관계에 집중하면서 보람과 의미도 많이 찾게 되었고요. 당시에는 강학(학문을 가르치면서 학강들에게 삶과 지혜를 배우는 이)과 학강(삶과 지혜의 경험을 나누면서 강학들에게 학문을 배우는 이) 사이의 거리감을 없애기 위해 ‘벽 깨기 프로그램’을 많이 했어요. 공동체 놀이나 집단 놀이를 많이 했죠. 문화모임도 많았고 활발하게 운영된 편이었는데, 이후 생계 문제 직장 문제 등 여러 가지 내부 문제 때문에 몇 년 뒤인 96년도에 해산을 했어요. 안타까웠죠.강학과 학강이 매우 친밀한 관계였는데도아마 처지와 조건에서 오는 괴리감들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학강 가운데 한 분이 어느 날 갑자기 화를 내면서 “결국 너희는 떠날 거 아니냐”라고 했던 말이 떠오르네요. 실제로 많이들 떠나가곤 했으니까. 당시에 학강들 가운데는 지금도 활동하는 친구들이 더러 있어요. 가끔 만나서 옛날이야기도 많이 하죠. 그때 같이 활동했던 친구 가운데 윤주형이라고 있어요. 동부지역에서 야학을 했거든요. 그 친구가 기아자동차 비정규직 공장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어렴풋이 들었던 기억이 나네요.


노동운동.jpg

노동 운동의 길로 들어선 김진억 국장(@희망연대노조)


운동의 기반이 된 1년 6개월의 현장 경험


92년부터 94년까지 동부지역노동자회에서 상근을 하다가 94년도에 현장에 들어갔어요. 성수동에 있는 금수정밀이라는 사업장이었어요. 훌라후프 등 플라스틱 제품을 생산하는 기계 만드는 공장이었어요. 기술이 없으니까 시다로 들어갔죠. 주물틀을 만드는 부서가 있고 기계를 조립하는 부서가 있었는데 저는 조립부에 들어갔어요. 드릴 작업, 그라인더 작업, 용접을 주로 했죠. 용접을 하면 처음에는 눈이 엄청 아파요. 불빛이 너무 강해서, 보호구를 쓰고 하는데도 눈이 빠져나올 것 같이 아프더라고요. 장님 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그라인더 작업을 하면 덜덜덜 거리니까 손목 통증 때문에 고생했고요. 쇠먼지를 종일 먹으니까 일마치고 나면 소주에 돼지고기를 많이 먹었죠. 씻겨 내려가라고. 사고도 많았죠. 손가락이 없는 선배들이 많았으니까. 그러고도 산재 처리는 안 해주고 대부분 공상 처리하죠. 부품 사출하는 곳의 작업반장 손가락이 네 개가 없었어요.


일을 하면서 동부지역노동자회 모임을 격주로 나가야 하니까 잠이 많이 부족했죠. 1년 6개월 동안의 현장 경험은 정말 만만치 않았어요. 잘 버티는 편인데도 힘들더라고요. 거기는 정말 ‘노동의 새벽’이 존재하는 공간이었어요. 그래도 여름에 쇳일 하면서 삼겹살에 소주 한 잔 하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어요. 현장 정서도 많이 이해하게 되었죠. 그 1년 6개월의 시간이 이후 노동 운동의 힘과 근거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운동을 시작할 때 다짐했던 것들을 다시금 되새기는 계기가 되었어요. 학생 운동할 때 선배들로부터 배웠던 것 중 하나가 ‘가장 낮은 곳에서 헌신하는 자세’였거든요. 집이 지어지려면 기초공사부터 해야 하잖아요. 벽돌을 하나하나 쌓아서 지붕이 올려지는 거니까요. 아래로부터, 벽돌이 되겠다는 자세로 운동해야겠다고. 그런 마음을 다지게 되었던 것 같아요.(다음호에 이어집니다.)


나눔글꼴 설치 안내


이 PC에는 나눔글꼴이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사이트를 나눔글꼴로 보기 위해서는
나눔글꼴을 설치해야 합니다.

설치 취소

Designed by sketchbooks.co.kr / sketchbook5 board skin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