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미는 손에 대한 믿음으로_영등포 산업선교회 홍윤경 노동선교부장

by 센터 posted Jan 06,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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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전태일 열사 44주기였던 지난 11월 13일, 대형마트 비정규노동자들의 문제와 투쟁을 담은 영화 〈카트〉가 개봉되었다. 2007년 「비정규직법」 시행을 앞두고 홈에버의 비정규노동자 700여 명을 외주 용역으로 전환하겠다며 일방적으로 해고를 통보하자 해고 노동자들이 상암동 홈에버 월드컵점을 점거하고 농성에 들어간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이다. 이 투쟁은 여러 가지 의미를 갖고 있지만 무엇보다도 비정규직과 정규직이 연대한 대표적인 사례로 남아 있다. 당시 홍윤경 노동선교부장은 이랜드일반노조 사무국장으로 투쟁에 적극적으로 결합했던 정규직 노동자였다. 홈에버 면목점을 점거했을 때는 직접 파업을 이끌어 구속도 감수해야 했다. 험난한 투쟁의 한복판에 있었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미소가 밝은 홍윤경 노동선교부장을 센터 글쓰기 모임 '쉼표하나' 고현종 회원이 만나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영화 〈외박〉을 보고 집으로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어요. 이랜드 여성노동자들의 싸움을 담은 영화지요. 화면에 나왔던 언니들이 너무 보고 싶었어요. 옆에 있던 이남신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소장이 손수건을 내밀더군요. 서로에 대한 믿음을 갖고 싸워온 동지가 내미는 손.



누군가 나를 지켜주고 있다
엄마는 피부병을 심하게 앓았어요. 유명한 피부과에 가도 치유되지 않았죠. 그때 할머니가 교회에 가서 기도를 권유했어요. 마지못해 간 교회에서 기도를 했는데 피부병이 싹 나았더랬죠. 이걸 계기로 온 가족이 교회를 나가게 되었습니다. 교회 문을 열고 들어서자 등 뒤에서 들어오는 햇살이 나를 포근히 안아 주더군요. 하느님이 살아계신 것 같았고 나를 보호하시는 것 같았어요. 10살 나이에 믿음을 경험한 셈이죠. 지금 생각해 보면 노조 활동을 하다 떠나는 사람을 보면 관계에 실망해서 떠나는 사람이 많았어요. 사람이 배신하고 떠날지라도 별로 욕하지 않고 이해를 하는 편이었어요. 그게 신앙의 힘이었을지 모르겠어요. 나는 2녀 1남 중 둘째예요. 어려서부터 성격이 씩씩했죠. 덕분에 친구들은 남자가 대부분이었어요. 남자아이들하고 놀아도 골목대장은 여자인 내 차지였습니다. 성격이 정 반대인 언니와는 초등학교 2학년 때까지 많이 싸웠어요. 어느 순간 언니가 나와 다르다는 것을 느꼈고, 그것을 인정하는 순간 싸움은 일어나지 않았죠. 고등학교 시절엔 교사가 꿈이었어요. 서울대 사범대 가기엔 점수가 조금 낮고, 고대나 연대 사범대 가기엔 점수가 아까웠어요. 그러던 차에 주위에서 전산과가 취업이 잘 된다고 해서 고려대 전산과에 입학했습니다. 당시 선택이 올바른 것이었는지 잘 모르겠어요. 대학교 때 학생운동은 하지 않았습니다. 87년이라는 격변기에도 시위에는 참여하지 않았어요. 복음을 전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터였죠. 복음 동아리 활동, 선교 활동을 열심히 했습니다. 여자 중·고등학교를 나와서 미팅 한 번 하지 못했던 한은 대학에 와서 풀었어요. 4년 내내 남자가 끊이지 않았어요. 첫사랑도 만났지만 이루어지진 않았죠. 대학 1학년 때 같은 과 4학년 선배를 사랑했어요. 내가 더 좋아 했지만, 과에서는 선배를 도둑놈이라 불렀어요. 어린 후배를 유혹했다며. 선배의 과묵하면서 자상한 스타일이 맘에 들었어요. 지금의 남편은 말이 많아요.



평신도 사역을 꿈꾸다
대학 4학년 때 케냐에 단기 선교를 다녀와서 평신도 선교사역을 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직장도 이 기준에 따랐지요. 선교와 일을 함께 할 수 있는 곳. 이랜드가 내가 찾던 곳이었습니다. 당시에 이랜드는 급성장 하고 있었어요. 취업 경쟁률도 높았고요. 감사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일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라고 생각하고 3년간 열심히 일했습니다. 우연찮게 선배의 권유와 추천으로 노사협의회 활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노사협의회 활동을 통해 회사 내 불평등한 처우, 불합리한 조건을 보게 되었어요. 샘플사, 배송기사, 물류센타에서 분배하는 사람, 직영매장 판매하는 사람이 비정규직이었죠. 전문직이라 불렸지만 현장직이었어요. 이들은 승진도 대리 이상은 할 수 없었어요. 급여는 정규직의 50%에도 못 미쳤습니다. 경력도 축소해서 인정을 했고요. ‘하느님의 회사라면서 노동자들의 처우에 관해서 이렇게 인색할 수 있나? 이건 아니다.’ 하는 생각으로 노동조합 결성까지 하게 되었습니다.이랜드 노조 초창기 멤버는 신앙인이 많아서 회사 측 행동을 안타까워했어요. 당시 주된 요구가 직장 민주화였습니다. 그렇게 되면 노동 환경이 좋아질 거라 생각했지요. 회사 발전에도 도움이 될 거라고 자부했고요. 그런데 회사는 노조는 사탄이 하는 일이라고 악귀 대하듯 했습니다. 주변에서는 노사협의회 활동이나 노조 활동에 대해 우려를 나타냈어요. 하지만 나의 신앙적 기준에서 노조 활동은 가난한 이웃에게 전하는 하느님의 복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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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랜드 그룹 회장 박성수



조합원들에게 전한 복음
복음이란 기쁜 소식을 말하죠. 함께 일하는 동료들에게 노동조합 결성은 복음과도 같았습니다. 마치 전태일이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며 노동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듯이. 노동조합을 만들면서 전태일을 알게 됐는데 그의 활동에서 예수를 느꼈습니다.1991년에 입사해서 1993년 10월에 노조를 결성했어요. 가입 대상자 1,500명 중 13명이 창립 발기인입니다. 창립총회에는 5~60명이 참석했고요. 처음에는 노사협의회가 잘 안 풀려서 13명이 등산가고, 라면 끓여먹고, 함께 책을 읽으며 결속을 다졌습니다. 이때 읽은 책은 맑스 책이 아닌 《몬드라곤에서 배우자》라는 협동조합 책이었어요. 노조를 만들자고 결정한 뒤 한 달 만에 후다닥 만들었지요. 그땐 민주노총이 없던 시절이라 전노협, 서노협과 같이 활동해서는 노조 필증을 받을 수 없었어요. 한국노총에 가입해서 노조 필증을 받고 바로 탈퇴했습니다. 노조설립 후 일주일 만에 조합원이 800명으로 늘었어요. 직장 민주화, 차별 없애기, 처우 개선, 직원들의 의견을 존중하고 수렴해 달라는 요구가 임시 단협을 통해 이루어졌어요. 조합원 정서와도 잘 들어맞았지요. 전임자도 7명을 따냈어요.



첫 파업을 하다
97년 회사가 3년간 유지되던 임시 단협 폐기를 일방적으로 통보했습니다. 전임자 7명 전원 현장 복귀를 명령했지요. 현장 복귀 거부하고 파업에 돌입했어요. 57일간 파업한 끝에 단체협약을 체결하고 무노동 무임금까지 다 받아내는 승리를 했어요. 이때 만들어진 단체협약은 타 노조에서 모방할 정도로 내용이 좋았습니다. 조합원들은 성과에 민감했어요. 임시 단협과 단체협약을 통해 처우가 개선되는 것을 본 조합원들은 노동조합에 무한 신뢰를 보냈죠. 신뢰한 만큼 조합원 수도 늘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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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홈에버 면목점 점거 당시 발언을 하고 있는 홍윤경 사무국장



첫 여성 노조위원장이 되다
회사는 IMF를 맞아 2,000명을 해고했습니다. 해고된 사람들은 대부분 비조합원이었어요. 명령을 거부한 조합원들은 오히려 살아남았고요. 노동조합에 판매직 조합원들의 비중이 커졌어요. 판매직은 대부분 여성들이었습니다. 변화된 구성을 감안해서 2005년에 첫 여성 노조위원장이 되었죠. 아이가 어린 것이 맘에 걸렸어요. 남편도 심하게 반대했지요. 남편은 조합 간부들에게 “이렇게 사람을 혹사 시키면 안 된다.”며 후배들을 혼냈습니다. 남편은 일주일간 말을 하지 않았어요. 죄인 된 심정으로 내가 먼저 화해를 청했죠.  남편은 입사 1년 선배예요. 개인 사업을 하고 싶어 해서 1999년에 퇴사를 했죠. 노동조합 설립 초창기 멤버 13인 중 한 명이었어요. 노동조합 하는 사람들을 다 잘 알고 있었기에 후배들에게 야단을 친 거였어요. 남편과 나는 스타일이 달랐어요. 남편은 속도를 중요시 여기고, 행동이 빨랐습니다. 나는 한 번 더 생각하는 신중한 스타일이고요. 그리고 예측 가능한 일을 좋아합니다. 그림을 잘 그리고 문학적 감성이 뛰어난 남편과 비슷한 건 활달한 성격뿐이에요. 남편은 노동조합 만들면서 라면 먹을 때 김치를 썰고 있는 내 뒷모습에 반했다고 했어요.



“엄마 미국 갔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남편은 내가 노조위원장을 맡는 걸 반대했어요. 육아 문제가 큰 걸림돌이었죠. 난 아이들이 똥오줌을 가리는 나이였기에 노조위원장을 해도 되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당시 아이들 나이는 여덟 살, 네 살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엄마로서 아이들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어요. 큰딸은 형님이 봐 주시고, 둘째는 이웃집에 살던 권사님이 봐 주셨어요. 그러다 시어머니, 어머니가 번갈아 가면서 아이들을 봐 주셨지요. 2008년 시아버지가 대장암에 걸리면서 어머님이 시아버지 병간호를 하시게 되자 남편과 함께 육아를 하게 됐습니다. 파업으로 60일간 구속되었을 때 시어머니가 아이들에게 엄마는 미국에 갔다고 거짓말을 하셨어요. 시어머니와 남편으로부터 10살, 6살 두 딸이 엄마가 보고 싶다고 빨리 오라고 하라면서 눈물을 흘렸다는 이야기를 듣고 큰딸에게 편지를 썼어요. 큰딸은 “엄마, 존경하고 사랑해요. 커서 엄마처럼 훌륭한 어른이 되겠어요. 동생도 잘 돌볼게요.” 하며 답장을 했습니다. 그 어느 것보다 큰 위안이 되더군요. 대견스러웠죠. 나중에 보니 그게 다 진실은 아니구나 하는 생각에 절로 웃음이 나곤 합니다. 감옥에 있던 두 달은 길게 느껴지지 않았어요. 가장 보고 싶은 사람은 아이들이 아닌 남편이었습니다. 남편은 매일 왔어요. 조합원들이 남편을 원망했을 정도였어요. 우리도 면회 좀 하자고 하면서. 감옥 생활은 양가 부모님들에게 큰 상처를 주었을 거예요. 초기에 노동조합 싸움이 언론에 많이 나오면서 양가 부모님들은 옳은 일 한다고 지지해 주셨지만, 시간이 길어지고 구속이 되니 시아버지는 이 나이에 이런 데까지 와야 하느냐며 눈물을 머금으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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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홈에버 월드컵점을 점거한 노동자들의 모습




새로운 도전, 그리고 목표
비정규직 계약 해지와 외주화에 맞서 시작된 ‘아줌마들의 반란’은 510일 만에 끝이 났습니다. 조합원들은 다 복직하고 나를 비롯한 핵심 간부 몇 명이 해고 됐어요. 안식년으로 생각하고 아이들과 지내며 2년 정도 가정에 충실했어요. 긴 파업으로 인한 후유증으로 나는 심리 상담을 6개월간 받았습니다. 아이들도 10개월간 놀이 치료를 받았고요. 이 상담이 너무 좋았어요. 아이도, 나도 치유와 회복을 할 수 있었던 힘이 되었죠. 노동자들에게 심리 상담, 정서 지원 같은 것이 꼭 필요하다는 걸 절감하던 차에 영등포 산업선교회(이하 ‘산선’) 목사님이 같이 일을 해보자고 제안을 했고 승낙했습니다. 산선에서 50주년을 기념해 만들었던 〈효순 씨, 윤경 씨 노동자로 만나다〉라는 다큐에 주인공 중 한 명으로 출연하면서 산선과 더 가까워 진 것도 목사님 제안을 받아들인 이유 중 하나예요. 많이 지치기도 했고, 민주노총처럼 현장에서 직접적으로 부딪히는 일보다 한 발 떨어져서 일하고 싶기도 했어요. 산선에서 내 직책은 노동선교부장입니다. 노동자들이 의식화·조직화 교육은 많이 받는데, 자신을 돌아다보고, 상대방을 이해하고, 공감을 넓혀가는 교육은 부족해요. 이 부분을 메워가는 것이 내 역할이지요. 노동·생명·살림 연구원을 설립해서  노동자들을 위한 상담, 치유, 교육을 집중적으로 하고 싶어요. 평생 하고 싶은 일을 찾은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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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등포 산업선교회 전경




손에 깃든 믿음
영화 〈카트〉가 상영되니 또 이랜드 언니들이 보고 싶어져요. 손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점거농성 중인 언니들 사이에 수배 중이던 내가 얼굴도 안 가리고 농성장에 나타나자 검거 당한다며 자신의 하얀 손수건을 건네던 그 언니. 누가 나에게 이 길을 가라 했을까 묻는다면, 아마도 자신의 얼굴을 보호하고 있던 손수건을 나에게 내 밀던 조합원의 손, 택시 안에서 눈물을 닦으라며 건네던 이남신 소장 같은 동지의 손. 그 손에 대한 믿음이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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