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를 통해 본 최근 일본의 노동 문제 2_그나마 좀 더 나은 지옥

by 센터 posted Jan 26,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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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직수 센터 정책연구위원



파견법 개정 : 평생 파견 시대의 도래


지난 1월 일본 후생노동성의 한 간부가 파견업협회 회의에서 ‘그간 일본 사회가 파견 노동자들을 일회용 물건 취급해 왔는데, 파견법 개정이 성사되면 드디어 파견 노동자들을 인간답게 대우할 수 있을 것’이라는 내용의 발언을 했다. 이 발언은 지난 3월 한 민주당 국회의원에 의해 공개되었고, 해당 간부는 후생노동성 장관으로부터 엄중한 주의를 받았다고 한다. 이 한편의 촌극이 보여주는 것은 일본 정부와 여당이 파견법 개정이 이루어지면 진정 파견 노동자들의 처우 개선이 이루어질 것이라 믿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지난 9월, 파견법 개정안은 전국민적인 안보법안 반대 여론 확산 속에 소리소문 없이 통과되었다.


개정 파견법은 전문성이 높은 26개 업무를 제외하고는 최장 3년까지로 제한되어 있는 파견  노동자의 파견 기간 제한을 사실상 폐지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물론 한 파견 노동자가 한 부서에서 일할 수 있는 기간은 3년으로 제한되며, 파견업체로 하여금 파견 기간이 3년에 도달한 노동자를 무기계약으로 직접고용하도록 하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기업들이 3년마다 사람만 바꾸어 가며 파견 일자리를 계속 유지함으로써 파견 노동이 고착화되는 현상이 나타날 것이 불 보듯 뻔하다.


무엇보다 간접고용 형태가 본질적으로 파견 사업주보다는 사용 사업주, 노동자보다는 사용자에게 월등한 힘의 우위를 부여하고 있음을 고려할 때, 대등한 관계를 전제로 하는 몇몇 고용안정 조치는 실현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1) 아쉽게도 후생노동성의 한 간부가 기대했던 ‘물건’에서 ‘인간’이 되는 일은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을 것 같다. 만 3년이 되기 일주일 전쯤 파견 노동자는 해고되거나, 혹은 유사하지만 ‘동일하지는 않은’ 부서로 배치된 후 업체만 변경되고, 이에 파견 노동자들은 파견업 노동 시장을 떠돌거나 평생 이등시민인 파견 노동자로 살아가는 모습···. 이런 모습들을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다. 왜냐하면 어디선가 많이 봐온 풍경이기 때문이다.


채용 관행의 변화


블랙기업 대책?


최근 일본 후생노동성은 블랙기업 대책의 일환으로 잔업 수당 체불과 장시간 노동 등 노동기준법 위반이나 성희롱 등 남녀고용기회균등법 위반으로 행정지도를 받은 이력이 있는 기업의 구인정보를 ‘헬로워크’(한국의 고용센터/워크넷에 해당)에서 접수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제시하였다. 그밖에 잔업 수당이 고정 잔업 수당 형태로 지급되는지 여부도 구인표에 기록하도록 요구할 것이라 밝혔다. 나아가 최근 3년간의 채용자 및 이직자수, 평균 근속연수, 육아휴가 및 초과 근무 시간 등의 정보를 구직 활동 중인 학생이 요청할 경우 해당 정보를 기업 측이 제공하도록 요구한다는 방안을 제시하였다. 문제는 이상의 제도가 민간 취업정보사이트에는 적용되지 않으며, 각종 정보 제공 또한 권고사항에 불과하여 실효성이 의심된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구인구직 단계에서부터 블랙기업 문제에 대한 대책을 마련한다는 발상 자체는 의미 있다고 생각된다.


정치 참여와 취업 불안


아베 정권의 안보법안은 결국 통과되었지만, 지난여름 도쿄 국회의사당 앞을 연일 가득 메우며 전쟁 반대와 평화를 부르짖었던 수만 명의 일본 시민들의 모습에 아시아는 물론 전세계 많은 사람들은 희망과 감동을 얻었다. 특히 안보법안 반대시위에서 가장 두각을 드러냈던 이들로 실즈(SEALDs)라는 단체를 꼽을 수 있는데, 정식 명칭은 자유민주주의를 위한 학생긴급행동, 즉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단체였다. 그런데 같은 시기, 인터넷 공간을 중심으로 학생들 사이에서 ‘시위 참여로 인해 취업에 불이익을 받지는 않을까’ 하는 불안이 확산되었다.


일본에서 사상에 따른 취업 불이익 문제와 관련된 대표적인 사례로는 과거 미쯔비시수지(三菱樹脂)가 임시 채용한 학생을 신원조사한 뒤 조사 내용에 근거해 본채용을 거부했던 사건을 들 수 있다.2) 1973년 일본의 최고재판소(대법원)는 미쯔비시수지 측의 손을 들어 주었으나, 여론 등을 고려하여 후일 해당 학생을 고용했다고 한다. 게다가 이후 법원에서도 사상과 같이 노동자의 업무 능력과 관계없는 전인격적 요소를 근거로 임시채용자의 본채용을 거부해서는 안 된다는 견해가 널리 받아들여졌고, 현재까지도 사상과 같이 업무와 무관한 개인 정보 수집은 일본에서 원칙적으로 금지되어 있다.


그러나 문제는 ‘현실적으로’ 시위 참여로 인한 취업 불이익은 학생들에게 불안의 근거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예로 유명 대기업에서조차 채용 면접 시 위법한 질문들이 제시되고 있는 현실을 들 수 있다. 1999년 개정 직업안정법의 5조 4항 및 관련 고시에 따르면 업무에 직접 관계없는 개인 정보 수집은 불법이다. 아사히신문이 취재한 노동 감독 기관의 행정지도 사례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외식을 얼마나 자주 하느냐 하는 질문은 의도와 관계없이 위법이다. 응답에 따라 생활 수준이나 가정 환경을 유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집이 어디인가를 묻는 것도 의도와 관계없이 위법이다. 일본 내에는 다양한 소수 집단들이 집단 거주지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에, 주거지를 묻는 것 자체가 소수자를 특정하려는 시도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성 친구가 있는지 여부, 결혼 계획이 있는지 여부 등을 묻는 것 또한 남녀고용기회균등법을 비롯한 실정법 위반이다. 그런데 2013년 한 해 동안 이루어진 채용 면접 중 후생노동성이 행정지도를 실시한 사례만 989건이라 한다.


그밖에도 안보법안 반대 시위 등 정치 참여에 따른 취업 불이익을 둘러싼 불안의 배경으로 SNS를 중심으로 한 인터넷 이용 확산을 들 수 있다. 과거와 달리 한 개인의 성향과 활동내역을 파악하는 것이 훨씬 손쉬워진 것이다. 한국 역시 예외가 아니다. SNS를 이용하지 않으면 사회성을 의심받아 취업에 불리하고, SNS를 이용하고 있으면 채용 단계에서부터 온갖 개인 정보가 기업 측의 손에 넘어간다. 그리고 취업 이후에는 각종 SNS 서비스를 통해 근무 외 시간에도 업무지시를 받으며 직무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구직 활동 중단 강요


최근 들어 일본의 ‘파와하라’(권력형 직장내 괴롭힘)라는 용어와 문제의식이 국내에서도 논의되고 있는데, 벌써 그새 일본에서는 ‘오와하라’라는 신조어가 등장하고 있다. 오와하라란 채용 면접 시 내정을 조건으로 구직 활동 중단을 강요하는 행위를 말한다. 대다수의 국내 언론에서는 ‘오와하라’를 최근 일본의 청년 취업 활성화에 따라 나타나는 현상으로 소개하면서 국내의 청년 실업 심화 등을 언급하며 ‘부러울 따름’이라 하고 있는데, 이는 오와하라의 이면에 놓여 있는 블랙기업 확산이라는 문제를 외면하는 일면적 보도이다.


오와하라, 즉 구직 활동 중단 강요가 이루어지는 방식은 채용 면접이 끝난 뒤 즉시 내정을 제시하며 그 조건으로 바로 그 자리에서 내정을 받은 다른 회사 측에 거절 전화를 할 것을 강요하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행위를 일삼는 기업들 중 다수가 이른바 ‘블랙기업’이라는 점이다. 구직자의 불안정한 지위를 이용하여 입사 이전의 내정 기간 동안 막상 문제가 있는 기업임을 알게 되더라도 입사를 거절하고 내정을 받은 다른 업체에 입사할 수 없도록 하는 직업 선택의 자유 침해 행위인 것이다.


한국의 경우 주로 대기업을 중심으로 채용 내정 제도가 있기는 하나, 갈수록 수습, 인턴, 기간제 등이 일반화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일본의 구직 활동 중단 강요 현상을 소개하면서 제기해야 할 문제는 ‘일본 청년들은 취업이 너무 잘 되어도 걱정이라던데, 한국에선 왜 청년 실업이 심화되고 있을까’ 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에서는 청년 취업률이 높다는데, 왜 한편에서는 블랙기업 문제가 심각해지고 있을까’ 하는 문제, 그리고 일본과 달리 ‘한국에서는 왜 한편으로 청년 실업이 만연하는 동시에 다른 한편에서는 수습, 인턴, 기간제 같은 청년 비정규 고용이 확대되고 있을까’ 하는 문제이다. 올해 초 수습사원에게 정규직 수준의 일을 시킨 뒤 몇 주 만에 해고한 ‘갑질 파문’을 계기로 최근 수년 간 정규직 노동자들에게도 사직을 강요해 온 일이 드러났던 모 인터넷 쇼핑몰이 자꾸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일본, 그나마 좀 더 나은 지옥


이상과 같이 지난 한 해를 비롯하여 최근 수년 간 일본사회에서 쟁점이 되고 있는 노동 문제에 대해 몇몇 키워드들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그밖에도 몇몇 주목할 만한 일들이 있었는데, 그 중 하나로 도요타의 가족 수당 재검토를 꼽고 싶다. 지난 7월 도요타자동차는 노사 합의를 통해 가족 수당 제도를 재검토하여 전업주부 배우자 몫으로 지급되던 수당을 폐지하고 자녀 몫으로 지급되는 수당을 대폭 증액하였다. 현실적으로는 자녀를 1~2명 둔 중고령 정규직 노동자들의 경우 가족 수당 수령액이 증가하지만, 자녀가 없는 홑벌이 노동자의 경우 기존에 받던 가족 수당을 한 푼도 못 받게 된다. 여성 취업을 촉진하고 육아를 지원하겠다는 것인데, ‘교육자금이 드는 양육 세대에 대한 배분’에 보다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정책은 여타 대기업들로도 확산될 전망이다.


한편, 최근 한국 정부가 발표한 제3차 저출산·고령화 기본계획(안)이 정작 중요한 육아 및 교육비용 부담 문제는 비껴간 채 임신·출산비용 감축에 초점을 맞추면서 많은 비난을 받은 바 있는데, 이를 고려하면 가족 수당 조정은 좀 더 현실적인 문제에 근접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는 어디까지나 저출산·고령화 시대에 대한 ‘기업사회’ 일본 특유의 대응방식이라는 점이다. 가족 수당 혜택은 도요타와 같은 대기업의 정규직 노동자들에 한해 적용될 것이며, 일본 정부는 보편적 복지의 확대보다는 배우자 소득 공제 폐지와 같은 사안에나 매달리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정책 도입을 머지않아 국내 제조업 부문의 대기업들도 검토하게 될 가능성이 있다. 다행히도(?) 한국 정부는 ‘단체미팅 주선’을 택했다. 기업복지 중심의 저출산·고령화 대책이 구체화되기 전에 시급히 사회적 대응방안이 논의되고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블랙 아르바이트, 장시간 노동 및 과로사와 관련된 ‘이름뿐인 관리직’ 문제, 정신질환 산재의 증가, 만연한 재택 잔업, 블랙기업 대책의 실효성 논란, 정치 참여에 따른 취업 불이익 불안 확산, 구직 활동 중단 강요, 그리고 저출산·고령화 문제 등 간략하게나마 이 모든 것들을 살펴보고 나서 내릴 수 있는 결론은 한국 사회가 ‘지옥’이라면, 일본 사회는 ‘그나마 좀 더 나은 지옥’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천국이 제 스스로 내려오지 않을 것을 알기에, 지금 우리 앞에 놓인 길은 텅 빈 듯한 지상세계로의 여정, 그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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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안주영, 일본의 노동 시장 개혁에서 한국이 얻어야 할 교훈, 〈프레시안〉, 2015.8.18

2)   일본에서 이른바 ‘과도적 고용 관계’ 형태 가운데 대표적인 것으로 채용내정과 임시채용을 들 수 있는데, 기본적으로 이 둘 모두 고용 관계로 인정되고 있으나, 기업 측은 다양한 조건에 따라 해약권을 지니게 된다. 앞의 미쯔비시수지 사건 역시 본질적으로는 ‘임시채용 기간 중 추가적인 신원조사를 통해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을 이유로 고용 계약을 해지할 수 있는가’의 문제에 관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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