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라잇] 배달을 하지 않으니 좋은 것들

by 센터 posted Jun 28,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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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달을 하지 않으니 좋은 것들

촛불.jpg

외대앞역 광장에서 열린 윤석열 정권 심판 5·10 동대문 지역 시국 촛불 @우리동네노동권찾기

 

오늘은 배달 경험이 아니라 배달을 하지 않았을 때 일상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최근에 부쩍 배달 노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고등학교 노동인권 교육이 계속 잡히면서 교안 준비를 해야 했고, 교육을 오가는 시간도 있었습니다. 보통 2시간 교육을 하는데 마치고 나면 은근히 피곤합니다. 제가 워낙 말을 하면 에너지 소모가 많기도 해서 그냥 쉬고 싶어집니다. 한 번 다녀오면 보통 일주일 배달 노동을 해서 버는 수입 정도를 확보할 수 있어서 굳이 더 피곤하게 일하지 않게 되더군요. 무엇보다 1년 중 가장 비수기인 4, 5월을 지나기도 했기 때문에 큰 수익을 내기가 어려웠던 것도 영향을 미쳤으리라 봅니다. 

 

배달 노동 대신 선택한 것들

일하지 않으니 체력과 시간의 여유가 생겼습니다. 당연히 내가 하고 싶은 일, 해야 할 일에 더 집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첫째, 가족과 보내는 시간이 늘어났습니다. 옆지기와 주말 내내 집에서 오붓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올해부터 계획한 캠핑도(그 어렵다는 우중 캠핑) 다녀왔습니다.

둘째, 내가 본래 해야 할 일에 더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동네 시국 촛불을 잘 준비할 수 있었고, 미루어만 두었던 사무실 창고 청소도 말끔히 했습니다. 

노동인권 교육을 위한 자료 준비와 교육 내용도 이전보다 훨씬 긴 시간을 들여 최선을 다했다는 느낌을 오랜만에 느끼기도 했습니다. 여유가 있다 보니 온갖 아이디어와 새로운 시도를 해볼 수 있었습니다.

셋째, 책 읽는 시간이 많이 늘었습니다. 도서관에서 긴 시간을 보내며 책도 읽고 졸기도 하고 생각도 하며 하루를 보내는 걸 해보고 싶었는데, 최근에 자주 할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나의 미래에 대해 고민하는 시간이 늘면서 새로운 시도를 했고, 요즘엔 이것 때문에 빨리 노트북 앞에 앉고 싶어집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프로그래밍 언어 배우기와 AI 기술을 활용한 이미지(사진) 제작입니다. 우연히 노트북도 맥OS가 설치된 맥북을 새로 구매하면서 컴퓨터로 무언가를 잘 배워보자는 결심을 하던 차에 큰맘 먹고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프로그래밍 언어를 잘 배워 시민사회단체를 위한 앱을 만들고, 노동인권 그림책 이미지 제작에 도전해볼까 고민 중입니다. 잘될지 누가 알겠습니까만 저는 요즘 기분이 참 좋습니다. 매일 새롭고 기다려지는 느낌이랄까. 어쩌다 TMI(Too Much Information, 너무 많은 정보)가 되어 버렸습니다. 양해 바랍니다.

 

N잡 시대, 굶어 죽을 자유도 없는 시대

투잡, 쓰리잡을 넘어 직업이 몇 개가 될지 모르니 심지어 N을 붙이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런 현상 자체에 대해 제가 할 수 있는 말은 많지 않습니다. 저도 적어도 쓰리잡을 하는 것 같은데요. 특히 배달 노동을 하면서 자주 들었던 생각은 ‘자본주의는 굶어 죽을 자유도 허락하지 않으면서 일을 시키는구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배달만 하더라도 요즘엔 핸드폰만 있으면 배달 가방이 없어도 누구나 일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올리브영 상품은 음식이 아니기 때문에 그냥 들고 다녀도 되고 이동 거리가 길지도 않습니다. 하루에 열 개 정도는 누구나 할 수 있고, 그렇게 일하면 한 건당 2천 원이니까 2만 원은 벌 수 있습니다. 심지어 카카오T는 당일에 출금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진짜 손가락 하나 까닥하기 어렵지만 않으면 어떻게든 살아지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살아는 지겠지만, 그 이상을 바라거나 꿈꾸기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건당 2천 원을 벌어서 어느 세월에 문화생활을 하고, 사랑하고, 공부하고, 안정적인 삶을 위한 준비를 할 수 있을까요? 남는 것은 장시간 노동입니다.

 

시간을 돈으로 살 수 있는 세상

어느 드라마에 이런 대사가 나옵니다. 

“기차를 타도 부자들은 비싼 KTX를 타고 한두 시간 안에 목적지에 갈 수 있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무궁화호를 탈 수밖에 없으니 네다섯 시간을 가야 한다.”

저는 단기이긴 하지만, 안정적인 강사료로 인해 배달 노동 시간을 줄여 나의 현재와 미래를 위해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시간이 한 달이 아니라 두 달, 석 달, 넉 달··· 1년이 되는 날이 오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최근에 배달의민족과 교섭대표노조 사이에 투쟁이 있었고, 투쟁의 결과로 소중한 합의를 하였다고 합니다. 기본 배달료를 올리는 데 실패한 대신 일정한 조건을 충족하면 수당을 지급하는 것 같습니다(물론, 도자킥은 해당 안 되지만···). 그런데 문제는 이 합의가 자칫 노동자들을 더 많은 경쟁과 더 길게 일하게 만드는 시작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아 걱정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배달 노동자들은 자신들만의 현재와 미래를 위한 여유를 가질 수 없을 것입니다. 그것이 행복한 삶으로 이어지기 어렵지 않을까 싶어 걱정입니다. 제가 최근 느꼈던 그 행복감을 우리 사회의 모든 배달 노동자가 안전하게 짧은 시간만 일하더라도 느끼길 바랍니다. 그 길을 찾는 것이 노동조합을 포함해 노동운동을 하는 모두의 과제일 것입니다.

 

김창수 우리동네노동권찾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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