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들의 국민 투표에서 발견한 희망

by 센터 posted Dec 02,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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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홍인택 센터 자원활동가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저는 오늘, 우리 경제의 기초를 튼튼히 하고, 재도약을 위한 정부의 국정 운영 방안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그 계획과 추진은 국민 여러분의 동의가 있어야 하고 적극적인 동참이 있어야 성공할 수 있습니다, 오늘 제가 이 자리에 선 것도 국민 여러분의 협조와 협력이 절실하기 때문입니다.”


익숙한 목소리가 익숙한 얼굴로부터 흘러나온다. 익숙한 얼굴을 둘러싼 붉은 옷이 뒷면의 푸른 색 커튼과 대조를 이루어 자못 강렬한 인상을 주기도 한다.


지난 8월 6일에 박근혜 대통령이 4대 개혁에 대한 대국민 담화를 발표하는 순간이다. 박 대통령은 담화문 서두에서부터 국민의 동의가 있어야 개혁이 성공한다고 밝혔지만, 이후의 행보는 이와 달랐다. 한국노총과의 노사정 ‘합의’, 임금피크제의 강제적 도입, 관련 노동법 개악 시도···. 정부의 불통 행보는 시민의 저항에 부딪히고 있다.


‘을들의 국민 투표’도 여기서부터 시작됐다. 10월 7일 시작된 ‘을들의 국민 투표’는 일반해고 요건 완화, 비정규직 사용기간 연장 등의 정부추진안과 해고 요건 강화, 상시업무 정규직화 등의 노동자·서민 안 중 찬성하는 쪽에 투표를 하면 된다. 투표는 1만 개 투표소 설치를 목표로 전국 각지에서 진행 중이다.


투표함이 도착하기까지


‘위이잉’ 오전 10시쯤,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이남신 소장님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인택 씨, 혹시 오늘 일정이 따로 있어?”

소장님이 친근한 목소리로 묻는다.

 “아뇨, 딱히 없습니다.”

이렇게 해서 국민 투표 준비 작업을 도우러 가게 됐다. 12시가 넘어서 민주노총 건물 앞에 도착하니, 점심시간이 됐는지 지나가는 직장인들로 거리가 붐볐다. 잠시 기다리니 국민 투표와 관련하여 실무를 담당하고 있는 ‘비정규직없는세상만들기’의 오진호 활동가를 만날 수 있었다.

“식사 안 하셨죠? 일단 같이 먹고 시작합시다.”


근처 식당으로 이동해 투표 준비 작업을 마치고 오는 이들을 기다리기로 했다. 식당으로 모인 이들의 표정을 보고 투표 준비 작업의 고단함을 상상해볼 수 있었다. 기륭, 쌍용차 등 이들의 출신은 다양했다. 금속노조 기륭전자분회 소속 유종희 씨에게 기륭분회에서 투표 준비를 맡고 있는 것인지 물어봤다. 유 씨는 웃으며 “우리가 맡고 싶어서 맡은 게 아니라 우리밖에 맡을 사람이 없어서 맡는 거죠”라고 대답했다.


식사를 마치고 민주노총 사무실로 이동하니 복도에 누런 박스들이 높게 쌓여있는 게 보였다. 오전에 포장해놓은 투표함이었다. 투표 준비 작업은 믹스커피 한잔을 마신 뒤에 곧바로 시작됐다. 첫 번째 작업은 오전에 포장한 투표함을 발송하는 것이었다. 투표함은 두 종류가 있는데, A세트는 기표소가 있는 것이고 B세트는 투표함만 있는 것이다. 이미 포장된 투표함이 어느 종류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대부분 묵직한 게 기표소가 포함돼있을 것 같았다.


수레에 상자를 차곡차곡 싣고서 1층으로 내려가니 비어있는 1톤 트럭 한 대가 대기 중이었다. 발송할 투표함을 차곡차곡 트럭에 실었다. 트럭에 박스를 다 옮겨 실은 후, 같이 작업을 하던 ‘비정규직없는세상만들기’의 박점규 집행위원이 다른 짐을 챙기러 엘리베이터 앞으로 갔다. 유종희 씨가 큰 소리로 박 집행위원을 불렀다.

 “여기로 금방 올 거야.” 

무엇이 오는지가 궁금할 새도 없이 다음 트럭엔 기표소의 기둥 역할을 하는 철제 봉이 실려 있었다. 지름이 5밀리미터쯤 되는 봉이었지만 수십 개가 다발로 묶여있었기 때문에 박스와는 비교할 수 없는 무게였다. 그 봉들은 금속 가공업체로부터 저가에 들여온 물건으로, 겉에 있는 기름기를 제거한 후에 포장해야 했다. 두 번째 작업은 투표함의 구성물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한 쪽에서 헌 옷을 이용해서 철제 봉의 기름기를 닦아냈고 다른 쪽에서는 현수막이나 포스터를 포장했다. 


세 시간 가량을 가만히 앉아서 진행해야 하는 작업이었기에 결코 쉽지 만은 않았다. 하지만 기륭분회 조합원들의 유쾌한 수다는 일의 지루함을 덜어주었다. 대화는 연예인 이야기에서 시작해서 박근혜 정부가 왜 노동 정책을 밀어붙이는지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졌다. 기륭분회 조합원들은 일손을 도우러 온 남자들보다 빠른 속도로 작업을 했다. 기륭분회 박행란 조합원은 웃으며 “우리 이렇게 일을 잘하는데 왜 해고됐지?”하고 농담을 던졌다. 뼈있는 그녀의 농담에 웃음보다는 숙연한 마음이 들려는 찰나에 유종희 씨가 “잡담을 많이 해서 그래, 지금도 우리가 얼마나 말이 많아”라고 받아쳤다.


일이 지루해질 때에는 새참을 들고 찾아오는 이들이 있었다. 권영국 변호사가 간식거리와 맥주를 작업하는 이들에게 나눠주었다. 권 변호사를 따라서 온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의 인턴 학생들도 작업에 큰 도움을 주었다. 그렇게 기표소 1천 개 분량의 철제 봉을 닦고서 두 번째 작업이 끝났다. 


세 번째 작업은 투표함 포장이었다. 기륭분회 오석순 조합원의 지시에 따라 순식간에 작업라인이 만들어졌다. 회의실 책상은 작업대가 됐고, 민주노총 사무실 복도는 작은 공장이 됐다. 빈 박스를 조립하고, 투표 용품을 챙겨 넣고, 박스에 테이프를 붙이고, 쌓아서 정리하는 작업을 분업으로 진행했다. 기륭분회 조합원들의 속도를 맞추느라 정신없이 움직여야 했다. 이날 저녁에만 100개가 넘는 투표함을 포장했는데, 기륭분회 조합원만의 노하우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투표함 하나하나에 이들의 땀방울이 스며들어 있다.


현장속으로2.jpg

금속 가공업체로부터 저가에 들여온 철제 봉에 묻은 기름기를 헌 옷으로 닦고 있다.


시민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다


정부는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노동개악을 향한 발걸음을 옮기고 있지만, 정작 이 문제에 대해서 지각하고 있는 시민은 적다. 이런 상황에서 국민 투표는 시민의 뜻을 반영하는 역할 말고도 교육의 역할도 수행한다.


10월 20일과 21일 이틀간 서울대학교 안에 국민 투표소가 설치됐다. ‘자하연’이라는연못 앞에 작은 투표함과 기표소가 설치됐다. 투표소를 지키는 학생들은 지나가는 학우들에게 연신 국민 투표에 참여할 것을 외쳤다. 서울대학교 내에 투표소를 연 ‘노동자계급정당추진위원회’의 장인하 씨는 “박근혜 정부의 노동개악이 비정규직 확대, 일반해고 허용으로 이어질 것인데 학내에서는이것이 공론화되지 않아 알리기 위해서 설치했다”라고 말했다. 12시부터 2시까지 하루 2시간 동안, 총 4시간 진행된 투표에 많은 수의 학생이 참여했다. 심지어 학교로 견학 온 중고생들도 투표소에 관심을 보이고 설명을 듣기도 했다.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역시 투표소를 운영하고 있다. 투표소 설치 장소는 센터와 인접한 영등포구청 앞이었다. 영등포구청 앞에는 공원이 있어 노인, 점심시간을 맞은 직장인들이 많이 지나다닌다. 또 지하철역이 부근에 있기 때문에 통행하는 인구도 많은 ‘천혜의 요지’다. 먼저 사람이 많이 지나는 인도 부근에 간이 테이블을 펼치고 투표 물품들을 올려두었다. 그 후 센터 상근자들이 곳곳으로 흩어져서 팸플릿을 나눠주며 열심히 호객(?)행위를 했다. 마이크는 이남신 소장님의 몫.특유의 친근감 있는 멘트로 홍보를 시작했다.

“영등포 구민 여러분, 요새 먹고 살기 어려우시죠?”


상근자들의 노력에 힘입어 지나가는 시민들이 발길을 멈추고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팸플릿을 나눠주는 손길은 할아버지, 할머니, 아저씨, 아줌마를 가리지 않았다. 가장 많이 관심을 보이는 젊은 층에게는 꼭 투표해달라고 이야기를 했다. 정차된 택시에서 기사들이 무슨 투표인지 묻기도 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잘 모르는 이들에게는 국민 투표를 하는 목적, 정부의 안과 노동자·서민의 안이 무엇인지를 차근차근 설명하고 투표에 참여해달라고 말했다.


그러나 모든 시민이 호의적인 것은 아니었다. 인상을 쓰며 지나가다가 팸플릿을 받지 않고 욕을 하며 지나는 할아버지가 있는가하면, 차창 밖으로 얼굴을 내밀고서 “차라리 박근혜를 퇴진시켜!”라고 외치는 택시기사도 있었다. “나는 무조건 정부 편이야!”라고 말하는 할머니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말들에도 상근자들은 낯빛하나 달라지지 않고, “그럼 투표해주세요!”라고 말했다. “이걸 한다고 달라지나?” 하고 의문을 제기하는 시민도, “나쁜 정부 정책을 막아야 해요”하고 분명한 목소리를 내는 시민도 투표에 참여했다. 이처럼 국민 투표는 시민들이 자신의 의사를 표출하게 한다는 점에서 개표하기 전에도 충분히 의미 있는 시민운동이다.


현장속으로1.JPG

센터는 월요일 점심시간 영등포구청 앞 공원에 투표소를 설치했다.


노동재앙을 막아내자


(가까운 미래에)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저는 오늘 우리 경제의 기초를 튼튼히 하고, 재도약을 위한 정부의 국정 운영 방안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오늘 제가 이 자리에 선 것은 그동안 노동 정책을 추진하는데 있어서 국민 대다수인 노동자와 서민의 의견을 반영하지 않은 것을 사과하기 위함입니다.”익숙한 얼굴로부터 익숙하지 않은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그녀 뒤의 푸른색 커튼이나 화려한 옷차림은 변한 게 없지만 어쩐지 표정은 자신감 없어 보인다. 전국의 국민 투표소에서 수많은 시민들이 정부·재벌 추진안에 반대했기 때문이다. 모든 시민들이 처음부터 노동 정책에 많은 관심을 두지는 않았다고 한다. 다만, 투표를 통해 퍼져나간 민의는 장작불처럼 점차 세차게 타올랐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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