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노동] 노동자가 되고 싶은 가사 노동자

by 센터 posted Mar 06,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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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상희 사회적협동조합 강북행복한돌봄 상임이사



나는 1959년생으로 올해 우리 나이로 60세이며, 가사 노동자로 살아온 지 만 10년이 넘었다. 가난한 남편을 만나서 살다 보니 아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너무 부족해 아이들을 위해서 돈을 벌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무엇을 해야 할지는 막막하기만 했다.

아이들이 다섯 살, 여섯 살이 되었을 때 시부모님께 아이들을 맡기고 동네 인근 봉제 공장에서 첫 직장을 다니기 시작했다. 인문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진학에 실패한 후 혼기가 되어 결혼을 하고 보니 사회생활이 전무했고, 이런 아이 엄마를 받아주는 곳은 동네 봉제공장 뿐이었다. 근무 시간은 오전 8시 30분부터 오후 7시 30분으로 종일 이어졌고, 지쳐서 퇴근하면 집안일과 아이들을 챙겨야 하는 일이 또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자정이 후딱 지나기도 했다. 생각해보면 참 고달픈 시절이었지만 그래도 젊었고 아이들을 위해서 뭐라도 해줄 수 있다는 기쁨에 힘든 줄 모르고 열심히 살았다.

그러다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시댁에서 분가를 하면서 하루 종일 봉제공장에 다니면 아이들이 방치될 수 있겠다 싶어 내 장사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평소 홈패션에 관심이 많았던 터라 이불 가게를 하기로 마음먹고 작은 가게를 열었다. 하지만 가게는 생각대로 잘 되지 않았다. 고객이 원가를 다 알고 있을 것만 같은 마음에 물건을 파는데 자신이 없었다. 장사는 점점 힘들어져 자주 원가 세일을 하게 되었고 결국 가게를 처분하게 되었다. 장사 수완은 아무에게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어느덧 아이들이 장성해 직장에 다녔지만, 남편은 실직하게 되어 내가 할 만한 일을 찾았다. 그러던 중 강북구 소식지에서 산모 도우미를 소개하는 글을 읽게 되었다. ‘아! 그래 그나마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이 이거구나!’라는 마음에 당장 전화를 해 면접을 본 후 담당자가 안내해주는 대로 2주간 교육을 받고 첫 서비스를 가게 되었다. 

그때 나이 48세. 갓난아이를 본 지 20년이 지난 터라 신생아 목욕시키는 것이 제일 두려웠다. 평소 낯선 사람과는 말도 잘 못하는 소심한 나였지만 생전 처음 방문한 산모와는 편하게 얘기할 수 있었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생겼는지, 아마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에 용기가 생긴 것 같았다. 산모와 이런저런 얘기도 하면서 식사, 세탁, 청소 등 편안한 산후조리를 위해 열심히 일했고 신생아 목욕시키기도 무사히 잘해냈다. 신입 교육 후 집에서 곰 인형으로 몇 번씩이고 반복연습하며 머릿속으로 아기 씻기는 시뮬레이션을 열심히 한 덕분이 아닌가 싶었다.


그렇게 한 일 년 반 정도 산후관리사로 일하다 보니 내가 있던 삼양주민연대 우렁각시사업단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다. 현장을 잘 알고 있으니 2007년 11월부터 사무실에서 함께 산후관리사와 산모를 연결하는 코디네이터 일을 해보면 어떻겠느냐는 것이었다. 사무직 업무는 생소했지만 한편으로 하나하나 배워가는 것에 기쁨을 느끼며 열심히 노력했다. 저녁에는 학원에서 문서 작성법, 엑셀, 파워포인트 등 컴퓨터 관련 기술과 상담에 필요한 심리상담사 자격증을 따면서, 태어나서 난생 처음으로 사무직 일을 시작한 것이다.

코디네이터 업무 일 년 뒤, 담당자가 퇴사를 하며 나를 추천해 산후관리팀장으로 승진을 했다. 기쁨 반 두려움 반으로 정말 열심히 최선을 다했지만, 일부 영리기관에만 국한되던 산모 바우처 서비스가 일반 영리업체로까지 확대되고 산모 본인 부담금이 생기면서 산후 관리 사업은 점점 내리막길을 치닫기 시작했고 산후관리사들은 일거리를 찾아서 하나 둘 떠나가게 되었다.

산후 관리 인원이 줄어들게 되면서 가사 관리 사업을 함께 담당하게 되었고, 생전 남 앞에서 노래 한 곡 못 부를 만큼 소심했던 내가 가사 관리 교육까지 맡게 되었다. 첫 강의는 정말 내가 생각해도 낯 뜨거울 정도로 형편없었지만 하면 할수록 점점 더 잘하고 싶은 욕심도 생겼고, 교육이 끝나면 다른 실무자들과 회의를 하여 서로 피드백을 주고받으며 함께 노력했다.


3.가사.jpg

2015년 11월, 가사 노동 입법화를 요구하며 국회 정문 앞에서 고용노동부를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한국가사노동자협회)


그러다가 2013년 서울시 마을기업에 선정된 이후 우리만의 독립된 법인이 필요하게 되어 협동조합을 설립하게 되었다. 협동조합 설립은 시작에서부터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농협이나 노동조합 같은 것은 많이 들어봤지만, 막상 우리 손으로 협동조합을 설립하려니 협동조합에 대해 너무나 무지해 서류 준비부터 참으로 막막했다. 그러나 돌봄서비스협동조합 설립에 대한 교육을 받고 주위 도움 끝에 드디어 우리만의 독립된 법인인 협동조합을 설립하게 되었다. 세무서에 사업자 등록까지 마치고 오던 날은 내 생애 몇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기쁜 날이었으며 발걸음은 날개를 단 듯 가벼웠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언젠가 우리 관리사님께 “일반 영리업체에서 일할 때와 저희 협동조합 조합원으로 일할 때와 다른 점이 있으신가요? 고객 집에서 일하는 것은 다 똑같지 않으신가요?”라고 물어봤더니 관리사님 말씀이 “아, 물론 있지요~ 일반 영리업체에서 가면 파출부 대우를 하지만 여기서는 관리사 대우를 하지요”라며 고객이 관리사를 대하는 태도가 다르다고 한다.  


나도 가난한 남편을 만나서 나름대로 고생하며 살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는데 가사관리사들과 함께하다 보니 마음 아플 때가 참 많이 있다. 부업 삼아 주 2~3회 4시간 정도로 가볍게 하는 분들도 계시지만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정말 어렵게 일하는 분들도 많다. 엄마, 아빠가 없는 손녀를 떠맡아 핏덩이 때부터 길러서 중3이 된 할머니 관리사, 아픈 자녀 치료비에 가족의 생계비까지 책임지고 있는 관리사, 홀로 자녀들을 교육시키고 결혼까지 시킨 관리사 등 정말 어려운 분들도 많다. 이런 분들에게 일거리가 끊기게 해서는 안 된다. 


관리사들도 정말 최선을 다해서 서비스를 제공한다. 하지만 가끔은, 아주 가끔은 고객으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받을 때 “내가 여기가 막 아파”라고 하며 가슴을 쓸어내린다. 이럴 때는 나도 함께 마음이 아파온다. 아무리 더운 날도 선풍기조차 마음대로 틀지 못하고, 고객들은 해외여행을 간다, 애들 방학이다, 시어머니 오신다, 외출을 한다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약속된 서비스 일정을 취소하곤 한다. 어떨 때는 고객 집까지 갔다가 문 앞에서 그냥 돌아올 때도 있다. 하루의 서비스 취소가 고객에게는 별것 아닌 것 같지만 가사 노동자들에게는 그들의 월급이고 가족의 생계가 달려있다. 하지만 그 누구에게도 보상 받지 못하고 가슴만 쓰릴 뿐이다.


일하다가 다치는 것은 또 어떤가. 고객의 아이들을 위해 국수를 삶다가 국수물을 쏟아서 배 부분에 화상을 입었지만 치료비 한 푼 받지 못하고 고스란히 본인이 부담해 치료해야 하며, 고객 집에 출근하다가 겨울 빙판에 미끄러져 다리를 다쳐도, 의자 위에 올라가 일하다가 넘어져 허리를 다쳐도 산재보험 혜택이 없다. 부상으로 인한 공백기에는 수입 또한 전혀 없다. 이런 분들과 함께하면서 최대한 관리사들께 도움이 되고자 노력하고 있으나 그리 큰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 같아 때로는 가슴이 답답해진다. 물론 모든 고객이 다 그렇지만은 않다. 함께 신뢰와 정을 쌓으며 오랫동안 함께하는 고객도 있고, 본인 형편상 중단을 할 때도 관리사의 일자리를 걱정하며 나중에 사정이 나아지면 다시 꼭 연락하겠다고, 많이 미안해하면서 인사를 잊지 않는 고객 등 좋은 고객이 훨씬 많다.


우리는 협동조합으로 사회적경제기업이자 한국가사노동자협회 지부로 활동한다. 우리는 조합원의 일자리, 교육뿐 아니라 가사 노동자의 노동 인권, 법적 보호 연대 운동 등을 함께하고 있다. 가사관리사의 좀 더 나은 노동 환경을 위해 지부 실무자들과 머리를 맞대고 함께 고민하면서 이용요금, 서비스 이용약관 등을 고치고 또 고치려고 노력했다. 매년 6월 16일 국제가사노동자의날에는 한국가사노동자협회를 비롯한 대표적인 비영리 돌봄기관들과 함께 기자회견, 성명서 발표, 퍼포먼스 등을 진행하며 가사노동자법 제정과 가사 노동자의 근로자성 인정, 사회적 인식 개선을 위한 행사를 함께해 왔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크게 달라진 것은 없어 보인다. 함께하는 동료가 없었다면 이 일은 참으로 외롭고 어려운 일이라 생각한다. 그래도 우리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가사 노동자도 노동자로 인정받을 수 있는 날까지 함께 힘을 모아 노력하고 또 노력할 것이다.


우리 협동조합에서 함께 일하는 조합원들은 나의 언니, 동생이자 나의 가족이며 나의 삶의 원동력이다. 일에 지쳐 힘들 때에도 조합원들과 함께할 때면 막 힘이 솟구치고 아이디어가 솟는다. 때문에 조합원들에게 항상 감사함을 느낀다. 가사 노동자도 노동자로서 노동자성을 인정받는 것이 우리의 소원이다. 그래서 고용보험과 산재보험, 연금보험, 퇴직금 등 노동자로서, 이 나라의 국민으로서 당연히 누려야 하는 최소한의 국민의 권리인 사회보험 적용을 받을 수 있는 날을 꿈꾼다. 언젠가는 가사 노동자도 노동자로 인정받는 그날이 꼭 올 것이라 믿으며 돌봄서비스에 종사하시는 가사 노동자 여러분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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