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N잡러’시대, 비정규센터의 역할
노성철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정책연구위원)
“데이터를 수집하고, 입력하고, 정리하고, 그것을 축적하고, 또 활용하는 방안을 만들고 이 작업에는 많은 수작업, 인력이 직접 해야 되는 작업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 일자리를 대폭 마련해서 지금의 고용 위기에도 대응하고, 그 다음에 디지털 경제에서 대한민국이 선도하는 나라가 되겠다라는 것이 우리가 지금 말하는 일자리 뉴딜, 한국판 뉴딜로서의 디지털 뉴딜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 취임 3주년 대국민 담화, 2020.05.10.)
대통령 담화에서 언급된 데이터 수집·가공작업을 수행하는 청년노동자의 노동조건과 인식을 조사하는 프로젝트를 동료연구자들과 함께 지난해 진행했다. 최근 수행한 연구 프로젝트 중 가장 흥미로웠던 동시에 가장 큰 고민을 안겨준 프로젝트였다. 데이터 산업에서 플랫폼 노동이 ‘디지털 뉴딜’ 일자리라는 이름을 달고 더욱 확산될 것이 전망되는 가운데 여기서 그 고민을 나누고자 한다.
사례조사 대상으로 점찍은 플랫폼 업체는 인공지능(AI)의 성능을 높이는데 필요한 학습데이터를 수집하고 가공하는 미세작업(microtask) 플랫폼을 운영하는 A사였다. 영상·음성·이미지 데이터에 AI가 인식할 수 있도록 속성값을 부여하는 데이터 가공작업을 위한 온라인 작업공간을 운영하고, 거기서 일할 작업자를 모집하고 관리하는 것을 사업모델로 갖는 업체였다. 예를 들어, 작업자는 자신의 스마트폰을 이용해 길거리 광고판을 촬영해 A사 서버에 등록하거나(데이터 수집), 자신이 편한 시간과 장소에 A사 시스템에 접속해 광고판 이미지 아 숫자와 문자를 식별해 입력하는 작업을 수행한다(데이터 가공). 작업 난이도에 따라 건당 수십 원에서 수백 원의 수수료를 포인트 형태로 받는다.
[그림: 웹기반 데이터 가공 플랫폼 A社 업무 흐름]
(출처: A社 홈페이지)
플랫폼 운영방식을 파악하고, 면접조사 참가자를 섭외하는데 협조를 구하기 위해 만난 A사 대표의 태도는 여타 플랫폼 업체 관계자들의 태도와는 사뭇 달랐다. 배달·택배와 같은 지역 기반 ‘긱 노동’ 플랫폼 노동자의 열악한 노동조건이 사회적 쟁점이 되면서 대부분 플랫폼 업계 관계자들이 외부 연구자의 접근을 부담스러워하던 시기였지만, A사 대표는 필자와 같은 노동연구자가 제대로 청년의 노동과 일자리에 대한 시각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면서 가감 없이 자기 생각을 들려주는 것을 시작으로 연구에 적극적으로 협조해주었다. 사실, 업체 측에서도 별다른 구인광고 없이도 입소문만으로 청년 작업자들이 몰려드는 것을 보고 자체적으로 면접조사를 진행하고 있던 터였다. ‘일자리 시대에서 일거리 시대’로의 이행은 현재진행형이고 A사 플랫폼 인기의 원동력은 요즘 청년들의 취향을 딱! 저격하는 ‘좋은 일거리’를 제공하는 데 있다는 설명이 이어졌다.
“데이터 가공작업 한 건당 20~30원 정도의 수수료, 많아봐야 월 20~30만 원 정도의 수입, 그나마 일거리의 공급도 일정치 않은 ‘4차 산업혁명 시대 인형 눈알 붙이기’ 플랫폼에 그렇게 사람이 몰리고 만족도가 높을 수가 있나?” 얘기를 듣는 내내 수 많은 물음표가 머릿속에서 소용돌이쳤다. A사 대표는 플랫폼을 통해 면접조사나 설문조사에 참여할 작업자를 모집할 수 있으니 직접 얘기를 들어보라고 권했고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의욕적으로 면접조사에 나섰다.
A사에 따르면, 플랫폼 작업자 대부분은 20~30대 중반 여성 작업자라고 한다. 면접조사에는 휴학 중인 대학생, 정규직 공채 준비하는 취준생, 육아를 위해 그만둔 경력 단절 여성 등 다양한 경력단계에 있는 20여 명의 작업자가 참여했다. 인터뷰는 낮은 보수와 단순반복 작업이 대부분인 웹기반 플랫폼 노동에 작업자가 높은 만족도를 보이는 이유를 이해하는데 초점을 맞춰 진행했다. 유사한 외국 플랫폼을 살펴본 선행연구들이 보여준 것처럼 작업자가 웹기반 플랫폼 노동에 매력을 느낀 주된 이유는 자신의 노트북 컴퓨터와 스마트폰을 사용해 원하는 시간과 장소에서 쉽게 부수입을 올릴 수 있는 부업이라는 답이 많았다. 구체적으로 A사 플랫폼에서의 일 경험을 물었을 때, 면접참가자들은 과거 ‘오프라인 일자리’ 경험을 비교 대상으로 가져왔다. 편의점, 카페, 음식점에서 일한 후 임금을 제대로 받지 못한 사례는 거의 모든 참가자가 언급할 만큼 보편적이었다. 파견사원이나 파트타임으로 일을 하면서 정규직 직원이나 점장으로부터 폭언이나 성희롱 등 직장 내 괴롭힘을 당한 경험, 장시간 노동으로 다니던 직장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던 경험, 스펙 부족으로 인해 반복되는 입사시험 실패 경험 등 청년 노동시장의 민낯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경험담이 이어졌다.
오프라인 일자리에서의 불쾌한 경험과 비교했을 때, A사 플랫폼은 청년 여성 노동자에게 쾌적하고 깔끔한 경험을 선사했다. 면접참가자는 작업을 마치면 보수가 포인트 형태로 즉시 자신의 계정에 쌓이는 것이 A사 플랫폼의 매력이라고 답했다. 처음에는 혹시 돈을 떼일까봐 포인트를 즉시 현금화했지만, 지금은 목표인 300만 원에 도달할 때까지 현금화하지 않고 포인트로 모으고 있다는 작업자도 있었다. 작업 자체는 지루하지만, 포인트가 실시간으로 쌓이는 재미에 매일 작업에 참여한다는 답변도 있었다. 자신이 노력한 만큼 보상이 들어오는 지극히 당연하고 단순한 운영 규칙만으로 A사 플랫폼은 임금 체불의 흑역사에 찌든 청년들 사이 ‘꿀알바’로 자리 잡고 있었다. 비슷한 이유로 면접참가자는 웹기반 플랫폼이 제공하는 비대면 노동에 환호했다. 오프라인 일자리에서는 남자친구 있냐고 물어보는 상사, 태도가 불량하다고 진상부리는 고객, 자신의 업무를 어영부영 떠넘기는 선배와 ‘사회적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반면, 웹기반 플랫폼은 질척거리는 사회적 관계로부터 해방돼 오롯이 일에만 집중하고 돈을 벌 수 있는 환경을 제공했다. 월 200만 원이 넘는 월수입을 올리는 작업자도 있었지만, 그 비율은 전체 작업자의 1%를 넘지 않았다. 하루에 3~4시간씩 주 5일 꾸준히 해도 월 30~50만 원 정도의 수입에 그침에도 불구하고, 면접참가자는 A사가 책정한 보상수준에 별다른 불만을 표현하지 않았다. 애당초 웹기반 플랫폼 노동에는 오프라인 아르바이트 수입을 보조하는 ‘세컨드 부업’ 정도의 기대만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그 정도 수입이라면!?’ 마침 같은 시기 서울시 청년활동지원센터 활동가로부터 청년수당에 대해 여러 가지 배우고 있던 터였고, 아르바이트 시간을 줄이고 그 시간에 다른 활동을 할 수 있는 여유를 주는 것을 목표로 설계된 청년수당을 당사자인 청년 플랫폼 작업자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안타깝게도 청년수당을 들어본 적이 없다는 대답이 압도적 다수였다. 청년수당·취업성공패키지·청년구직활동지원금 등을 알고 있는 참가자조차 신청과정이 복잡할 것 같아서 또는 신청해도 심사에서 탈락할 것 같아 지원하지 않았다고 했다. 복잡한 신청서류를 준비하는 시간에 플랫폼에서 작업을 하나라도 더해서 확실한 돈을 버는 것이 마음이 편하다고 답한 참가자도 있었다. A사 플랫폼에 대한 신뢰와 만족감과 정부 청년지원제도에 대한 무관심 또는 부정적 반응이 선명하게 대비됐다.
끝으로, 작업조건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거나 작업조건 개선을 요구하기 위한 수단으로 노동조합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웹기반 플랫폼 작업자에게 노조는 청년수당보다 몇 광년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미지의 영역이었다. 자신은 물론 친구나 가족 중에서도 노조에 가입한 사람이 없어서 잘 모르겠다는 답이 많았다. 노조에 대해 딱히 반감이 없는 것을 위안으로 삼아야 할까? 아니면 무관심이 더 암울한 것일까? 음식배달이나 택배와 같은 지역 기반 플랫폼 노동과 달리, 웹기반 작업자는 플랫폼에 대해 이렇다 할 공통의 불만 자체가 없었다. 앞서 서술한 대로, A사의 마찰 없는 플랫폼 운영 노하우와 ‘부업의 부업’일 뿐이라는 작업자의 낮은 기대치가 결합 된 결과였다. 물론, 개인 수준에서 불만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작업이 요구사항에 맞게 완료됐는지 플랫폼 업체 측에서 검수 작업을 진행한 후에 포인트를 지급하는데, 점수가 잘못되거나 늦어져서 지급이 지연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해 개선됐으면 한다는 소박한 바람을 밝힌 참가자들이 있었다. 하지만, 포인트 지급이 지연돼도 A사에 항의했거나 할 계획이 있다고 말한 이는 없었다. 몇십 원 가지고 실랑이를 할 시간에 다음 작업을 수행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아직 대부분 작업자가 ‘오프라인 주업+디지털 부업’ 또는 ‘오프라인 부업+디지털 부업’의 조합으로 수입을 올리고 있었다. 하지만, A사 플랫폼을 통해 웹기반 디지털 노동에 호감을 가진 작업자 중 일부는 후발 데이터 가공업체를 조사해 3~4개의 앱을 스마트폰에 설치해 놓고 있었다. 이들은 가능하다면 디지털 부업만으로, 즉 ‘디지털 N잡러’로 생활을 영위해 갈 수 있기를 원했다. 특히, 신종코로나 사태는 비대면 노동이 가능한 웹기반 플랫폼 부업에 대한 관심에 기름을 부었다. 그들의 바램은 디지털 뉴딜의 물결을 타고 조만간 현실화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노동이 지역성과 물질성을 잃고 더 미세한 단위로 끊임없이 쪼개지면서, 기존 제도적 안전장치도 해체될 가능성이 많은 디지털 뉴딜 시대에 지역비정규센터가 청년노동자의 권익증진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저녁이 있는 삶’ 대신 불어 닥치는 ‘저녁을 불태우는 N잡러’ 열풍에 노동운동은 어떻게 대응해야 하나? 웹기반 플랫폼 노동 프로젝트를 시작한 이후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고민이다. 함께 답을 찾아 나갔으면 한다.
지난해 연말, 웹기반 플랫폼 노동에 대한 추가조사를 위해 한국에 머무는 동안 운 좋게 이 고민에 실마리를 던져주는 경험을 했다. 동대문구에 뿌리를 내리고 활동하고 있는 민간센터인 ‘우리동네노동권찾기(이하 우동)’의 청년취업자 동아리 ‘처음처럼’의 1박 2일 총회에 따라갈 기회를 얻은 것이다. ‘처음처럼’에 대해서는 이전부터 관심만 잔뜩 가지고 있었다. 고등학교에서 청소년 노동인권 교육을 들은 학생들이 취업 이후 청년노동자로서 모임을 이어가는 모델이 매력적이었다. 지역 비정규센터 대부분이 주요 사업 중 하나로 노동인권 교육에 참여하고 있는데, 그 사업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보여주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10대 후반~20대 중반 청년노동자들이 2020년에 함께 연대할 집회를 결정하고, 공부할 주제를 정하고, 새 지도부를 선출하는 과정을 우동 김창수 대표와 상추를 씻으면서 바라보는 답은 여기에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노동자와 노동자 모임의 정체성을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당사자가 학습과 경험을 통해 만들어 나갈 수 있도록 무려 4년 동안 자리를 만들어 주는 역할에만 충실했던 우동 활동가들, 그러한 지원 속에서 이제는 각자 일터에서 경험하는 잘못된 관행들에 대한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센터 활동을 기획하는 당사자 사이 선순환을 만들어 내는 것이야말로 플랫폼 노동 속으로 청년이 진공청소기처럼 빨려 들어가는 이 시기 지역 비정규센터가 참고행 할 모델이 아닐까 한다.
노성철 연구위원님 건강 조심하시구요! 다음 처음처럼 총회도 놀러오세용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