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테이너의 가치와 직무분석
노성철 (센터 정책연구위원)
평소에 알고 지내던 연구자들과 활동가들이 밀려드는 공공부문 비정규직 노동자 정규직화 연구 프로젝트 및 컨설팅
업무에 행복한 비명을 지르면서 머리를 짜내고 있다. 지난 10년, 아니 그 전부터 쌓여온 비정규노동-노사관계의 적폐를 허무는 첫삽을
뜨는 일이 만만치 않기에 다크서클이 얼굴을 뒤덮을 기세이지만 노동자들의 삶에 실제로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정책개발에 참여하는 자부심과 보람을
회의 후 뒷풀이에서 느낄 수 있다.
박사과정 때 인사∙조직분야를 전공했다는 배경으로 몇몇 프로젝트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직무분석 일을 맡게 되었다. 부끄럽게도 학위과정에 있었을 때는 최근 각광받는 주제들에 정신이 팔려 직무분석, 평가, 보상과 같은 인사관리의 고전적 주제들은 이미 이론적으로 포화된
화석취급했던 기억이 난다. 최근 프로젝트들을 하면서야 직무분석이론이 갖는 심오함과 그것이 노동자들의
삶에 미치는 묵직한 영향력을 느끼고 있다. 이 글에서는 프로젝트를 하면서 품게 된 직무분석에 대한 지극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생각들을 최근 활발해지고 있는 ‘메인테이너’의
사회적 가치 논의와 연결 지어서 풀어보고자 한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정규직화에 있어 직무분석의 의미와
바람직한 방향을 함께 고민하는데 기여할 수 있기를 바란다.
직무분석과 직무가치평가 개요
직무분석(Job analysis)은 직무의 요소, 성격, 자격요건에 관한 정보를 수집, 분석, 구조화하는 과정을 가리킨다. 그 결과물은 채용, 배치, 교육훈련, 보상, 직무설계, 업적평가, 그리고
사회적 약자 우대 정책까지 인사 및 조직관리 전반에 거쳐 폭넓게 활용되어 왔다 (Ash, 1988). 직무분석은
그 가정과 방법론에 있어 상당부분 테일러리즘[1] 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즉, 하나의 직무(Job)은 다른 직무와 명확히 구분할 수 있는 경계를 가지고 있고, 내부적으로는
그것을 구성하는 여러가지의 과업(Task)으로 쪼갤 수 있다는 가정이다. 다시 말해, 각각의 직무는 독립적으로 정의되고, 분석되고, 계량할 수 있는 단위이고, 그것을 수행하는 노동자가 아닌 직무가 조직운영의 기본단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반영해서 실제 직무구성의 절차는 요구분석, 직무분석, 과업검증, 과업분석의 네 단계로 구성된다. 직무분석이 본격적으로
미국 제조업 현장에 도입되기 시작했을 때, 그것을 통해 작업효율 향상을 기대하던 사용자측뿐만 아니라
노동조합 역시 이를 손해보는 장사로 인식하지는 않았다 (McCune
et al. 1988)[2]. 노조 입장에서는 각 조합원의 명확한
과업의 목록을 산출하고 관리자들이 과업·직무명세서 이외의 업무를 강요하는 것을 막기 위한 안전장치로 직무분석의 역할을 기대했고, 그 결과 그것이 조합원들의 노동조건을 개선하는 데 기여할 것이라고 생각했다[3] (Sanchez, 1994). 직무분석에는 여러가지 기법이 사용된다. 가장 역사가 오래된 직책분석설문지(position analysis questionnaire)부터 기능적 직무분석(functional
job analysis), 핵심 사건 기법(critical incidents techniques),
그리고 최근에 많이 사용되는 DACUM[4]
(Developing A CurriculuM)까지 직무분석의 구체적인 목적에 따라서 다른 기법들이 사용된다. 직무분석의 결과는 크게 두 가지, 각각의 직무를 구성하는 과업이나
활동들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직무명세서, 그리고 그 직무를 수행하기 위해 요구되는 노동자가 자격요건과
특성을 기술하는 작업자명세서의 형태로 산출된다. 이 두 가지 결과물은 인사 및 조직관리에 있어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는데, 최근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맥락에서 주목받는 것은 바로 직무평가(Job evaluation)를 위해 동원되는 것이다. 즉, 직무분석을 통해 나온 과업특성 및 작업환경, 해당직무에 투입되는
노동자들의 역량 등을 기초자료로 직무들 간의 상대적 가치를 평가하는 것이다. 그 결과는 대체로 경영합리화라는
명목 하에 임금격차나 고용형태의 차이 그리고 특정 직무의 외주화를 정당화하는데 사용되었다. 공공부문에서의 직무분석. 최근 공공부문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프로젝트나 컨설팅에서도 직무분석은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직무가치 평가를 통해 핵심직무와 비핵심업무를 나누고 이는 고용주체(직접고용
또는 자회사) 그리고 임금테이블을 결정하는데 중요한 논거로 사용된다.
돌아돌아 왔지만 이번 글을 통해서 함께 고민해보고 싶었던 것은 ‘공공서비스를 제공하는 특히
그 서비스가 사람들의 생명 및 안전과 직결되는 조직에서 이러한 직무가치결정방법의 한계 또는 문제는 무엇일까?’ 하는
물음이다. 여기서는 사측에서 사용하는 직무분석 방법의 절차적 그리고 규범적 정당성에 초점을 맞추어 논의해보고자
한다. 먼저 난이도와 가치에 있어 직무간 차이를 드러내기 위해 각 직무를 과업 및 활동단위로 쪼개는 환원주의적 접근의
특성상, 직무수행을 위해 요구되는 직무간 협업은 직무가치평가에 반영되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 (Shippmann et al., 2000). 비슷한 맥락에서, 최근
조직행동이나 인적자원관리 학자들이 강조하는, 직무외 과업을 자발적으로 수행함으로써 조직내 기능적 유연성과
조직 성과를 높이는 조직시민행동과 같은 비공식적 기여가 직무명세서에는 반영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즉, 공항이나 병원과 같이 안전이나 공공서비스의 품질향상을 위해 직종간에 일어나야 하는 유기적인 협업이 어떤 직무에도
포함되지 않고 누락되는 것이다. 이러한 부분을 반영하기 위해서는 비참여관찰(쉐도잉) 또는 직무수행자가 함께 참여하는 직무분석 워크샵 등이 필요하지만
그동안 경영진 주도의 조직 컨설팅에서는 그 누구보다 자신의 직무를 가장 정확하게 기술하고 정의할 수 있는 당사자들의 목소리가 배제되어 왔다. 특히 비정규직 노동자의 직무분석의 경우 직무재설계의 목적보다는 인소싱-아웃소싱을
결정을 하기위해 동원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러한 배제가 더욱 두드러졌다. 비슷한 맥락에서, 직무분석을 위한 정보 출처로서 비정규 노동자들이 제공하는 공공서비스의 수혜자인 시민들의 의견이 들어가는 경우도
거의 없다. 다시 말해,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제공하는 노동이
공공서비스의 질에 기여하는 정도를 측정해야하는 직무가치분석에 있어서 서비스의 제공자와 수혜자의 직접적인 경험이 모두 배제된 채, 오로지 관리자의 관점에서 평가만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처럼 절차적
정당성을 확보하지 못하는 직무분석은 조직재설계 과정에서 구성원간 갈등만을 키우게 된다. 메인테이너의 사회적 인정을 위한 직무분석과
조직설계 공공부문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과정에서 직무분석과 그에 기반한 조직재설계는 위에서 언급한 절차적 정당성 뿐만 아니라
규범적 정당성(Normative legitimacy)도 확보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다. 우리나라에서 유지·보수 직무를 맡고 있는 비정규 노동자들의 노동이 응당 받아야 할 사회적 인정을 받을 수 있는 변화를 유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최저임금을 만원으로 올리는 것을 단지 경제적 논리로만 다루는 것이 아니라, 노동의 정당한 가치를 인정하는 한 사회의 윤리적 문제이자 인권의 문제로 접근해야 한다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최근 미국에서는 ‘메인테이너(Maintainer)’의
사회적 가치를 재평가 해야 한다는 과학사회학자들의 칼럼이 화제가 되었다[5]. 저자들은 변화와 혁신, 그리고 그것을 이끌어내는 '창업가 정신'을 지나치게 찬양하는 최근 미국의 자본주의 문화가 유지보수
업무와 그것을 매일 묵묵하게 해내는 노동자들의 노동가치에 대한 정당한 인정을 가로막고 있다는 것이다. 즉, 소수의 혁신가들을 부를 창출하는 주체로 보고 사회의 다수를 구성하고, 우리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메인테이너를 주변화시키는 경향이 갈수록 강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최근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 이러한 경향이 세계 어느 곳보다 뚜렷한 곳이 우리나라라고
생각한다. 정확한 의미도 불분명한 4차 산업혁명이 신문들의
경제면을 도배하는 한편, 메인테이너들이 겪어야 하는 일터에서의 차별과 부당한 대우는 사회면을 도배하고
있다. 국회의원의 학교 급식노동자 비하발언, 대기업 총수의
운전기사에 대한 폭언, 지상파 방송사들의 독립PD에 대한
갑질은 우리의 일상을 지탱해주는 노동의 가치에 대한 인정이 낮아도 너무 낮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편견을
강화시키고 재생산하는데 경영학, 그 중에서도 앞서 살펴본 인사관리의 직무가치평가을 둘러싼 이론과 그것을
입맛에 맛게 실행해 온 대기업들이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유지보수에 들어가는 자원은 혁신과 재무성과로
측정되는 기업성과와 배치되는 것으로 보고 그것을 최소화 하거나 아웃소싱 해야한다는 패러다임이 지난 30년을
지배했다. 메인테이너들은 숙련도와 전문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언제든지 교체할 수 있는 자원으로 비정규직화
되었고, 그들이 공공편익에 가지는 중요성은 경제적으로 보상받기 보다는 근로시간 특례업과 같은 굴레로
착취를 정당화하는데에 동원되었다. ‘메인테이너를 찬양하며’의
저자들은 혁신과 메인테이너들의 일이 상쇄(Trade-off)관계에 있다는 시각에 의문을 제기한다. 한 발짝 더 나아가 혁신과 유지보수의 합성어인 ‘메인터베이션 (maint-ovation)’을 슬로건으로 메인터넌스 노동과 산업이 저성장 추세에 접어든 세계경제와 낡아가는
인프라를 고려할 때 새로운 경쟁력의 원천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숙년된 메인테이너들이 조직경쟁력에
직접적인 기여를 한다는 것은 12년 연속 세계공항서비스 평가에서 1위를
차지한 인천공항의 사례가 잘 보여준다. 노동자성 인정을 둘러싼 여러가지 논란이 있지만, 최근 떠오르고 있는 플랫폼 경제 또는 플랫폼 노동 역시 메인테이너들의 가치를 재발견하고 그것을 혁신으로 이끈
사업모델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의 일상을 굴러가게 하고 경제적 잠재력도 가지고 있는
메인테이너에 대한 사회적 인정을 재고하는 것이 시급하다. 즉, 최저임금인상을
통해서 메인테이너들이 그들의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댓가를 지급받아야 하고 더불어 신분제처럼 작동하고 있는 ‘메인테이터=비정규직’의 틀을 깨야한다. 바로
이것이 공공부분 비정규직의 정규직화가 갖아야 하는 당위적 의미라고 생각한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에
무기계약직이라는 꼼수가 가져왔던 부정적 요인들을 생각해 봤을 때, 최소한의 절차적 정당성을 갖추지도
않은 직무분석을 통해 메인테이너들의 직무가치를 주변/비핵심 업무로 평가하고, 이를 별도의 고용형태나 조직을 통해 그들을 수용하는데 악용하는 과거의 적폐가 반복되서는 안될 것 이다. 참고문헌 Ash. R. (1988). job analysis in the world
of work. In S. Gael (Ed.). The job Analysis Handbook/or Business (pp. 3-13).
New York: john Wiley and Sons. McCune. J.. Beatty. R.. & Montagno. R.
(1988). Downsizing: Practices in manufacturing firms. Human Resource
Management. 27. 145-161 Sanchez. J. (1994). From documentation to
innovation: Reshaping job analysis to meet emerging business needs. Human
Resource Management Review. 4(1).51-74. Singh, P. (2008). “Job Analysis for a
Changing Workplace.” Human Resource
Management Review, 18(2): 87–99.
[1] 산업공학분야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프레드릭 테일러는 노동자의 채용, 동기부여, 훈련의
효율성을 극대화하기 위한 ‘과학적 관리’의 네 가지 원칙
중 첫번째로 체계적인 직무분석을 내세웠다. [2] 물론 이는 미국 제조업 기업들의 노조에 한정한 얘기이고, 일본의 경우 임금하락의 우려로 노동조합이 직무분석 및 직무급의 도입에 강하게 반대했다. [3] 업무자율성 또는 유연성이라는 이름 하에 직무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듦으로써 노동력을 착취하는 것은 최근에도 여전히, 특히 특수고용노동자들을 상대로 폭넓게 나타나고
있다. 예를들어 방송사의 ‘막내’작가, 영화산업의 연출부 ’보조’ 등등 명확한 직무명세 및 직무 명칭없이 컨텐츠제작과정에서 발생하는 모든 허드렛일을 처리해야하는 직군의 젊은
노동자들에게 가해지는 착취를 예방하는데 있어 세밀한 직무분석이 첫걸음이라고 생각한다. [4] 직무를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는 현업내용전문가(Subject Matter Expert, 해당직무를 담당하는 전·현직
노동자, 해당직무에 대한 전문가 등으로 구성)들이 참여하는
워크샵을 통해서 직무를 구성하는 요소와 이를 수행하는 데 필요한 능력을 산출하는 방법이다. 비교적 빠른
시간에 높은 정확도로 직무분석의 결과물을 산출해내는 장점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Norton & Moser, 2008). (자세한 내용은 http://www.dacum.org/ 참조) [5] Lee Vincel & Andy Russel (2016). “메인테이너를 찬양하며” Aeon. 2016. 7.
29. (https://aeon.co/essays/innovation-is-overvalued-maintenance-often-matters-more). 이 컬럼이 주목을 받은 이후에 저자들과 뜻을 함께 하는 이론가, 실무가들이 다양한 분야의
메인테이너들에 대한 연구를 함께 진행하고 있다. (http://themaintainers.org/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