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감정노동센터
이정훈
센터 이사, 서울시 감정노동센터 소장
이야기의 시작은 이렇다. 2015년, 아주큰 대학병원 노동조합 위원장이었던 시의 원이 감정노동의 문제를 조금이라도 풀어 보고자 실태조사를 추진했다. 간호사로 근무하며, 또 위원장을 맡으며 체감한 감정노동의 강도는 보통 사람의 상상을 초월했기 때문이다. 당시 용역으로 운영되던 120 다산콜센터 역시 살벌한 악성민원인에게 속절없이 당하는 현실을 어떻게든 벗어나려 애쓰고 있었다. 서울시는 한국비정규노동 센터가 운영하는 서울노동권익센터에 애초 사업계획에는 없던 주제인 ‘공공부문 감정 노동 보호 가이드라인 연구’를 추가할 수 있겠냐고 물어왔다. 센터는 다른 실태조사 예산을 쪼개어 부족한 금액으로 연구진을 구성하고 과제를 마쳤다. 한국비정규노동 센터가 오랜 활동 속에 관계를 잘 맺어 온 연구자들이 선뜻 나서 연구를 도왔기에 가능했다.
그랬다. 시와 센터의 관계는 긴밀하고 유연했다. 필요한 일이라면 방법을 찾고 함께 해결하려 노력했다. 시의 행정력과 센터의 전문성, 빠른 의사결정 구조라는 민간위탁방식의 장점을 최대한 활용했다. 시는 공공부문 감정노동자의 인터뷰를 적극 주선하였고 센터는 구석구석 방문하여 현장의 의견을 청취하고 분석했다. 한 신문사는 그 과정을 따라다니며 아주 좋은 기획 기사를 만들었다. 그해 연구 보고서에 제시한 ‘공감(公感)센터-공공부문 감정노동센터’가 지금의 서울시 감정노동센터의 출발이다. 2016년에 공표된 「서울시 감정노동종사자 권리보호에 관한 조례」 역시 제정 과정에 현장의 참여가 활발히 이루어졌으며 많은 지방자치단체의 감정노동 조례 가운데 단연 구체적이고 체계적인 구성을 갖춘 조례로 평가되고 있다.
불현듯 돌이켜보니 조례 제정 이후 실제 사업까지 물 흐르듯 연결되는 사례가 흔한 일은 아니었다. 2016년 초반부터 시와 센터는 감정노동과 관련한 시범사업을 추진 하기 위해 예산과 인원 편성에 관한 협의를 시작했다. 시의 예산을 사용하는 일이기에 당연히 조직 담당 부서와 예산 담당 부서의 승인 과정이 필요했고 의회를 통과해야 하는 절차도 거쳐야 했다. 무엇 하나 그냥 넘기지 않았고 더 정확해야 한다는 강박에 가까운 상호 공감이 있었다. 시의 역할이 빛나던 순간이었다.
숨 가쁘던 시간도 생각난다. 세 명으로 시작해 2017년 한 해 동안 시범사업을 거치며 정책 수요를 확인하였으나 한편으로는 홍보가 부족하여 참여자가 많지 않아 예산이 적잖이 남는 사업도 있었다. 다른 사업으로 전환하여 예산을 소진할 수도 있었지만, 각 사업의 효과를 명확히 평가하기 위해서는 기록으로 남겨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야 다음 해 또 그 이듬해 사업과 연결하여 장기적인 평가를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시도 여기에 동의해 예산 반납을 승인하였고 센터 이름이 알려지면서 그 사업에는 신청자가 급증하게 된다. 이른바 ‘정공법’이 확인된 것이다.
2018년은 감정노동센터가 이름을 가지게 된 해이다. 다소 긴, 열여섯 자의 이름이지만 감정노동자의 권리를 보호한다는 뜻이 선명하게 들어있어 작명하는 동안의 작은 에피소드쯤은 견디기 충분했다. 3월에 출범하려는 계획에도 차질이 있었지만 앞으로 감정노동자와 사업장에서 이용할 수 있는 든든한 안전망이 생기는 일이었기에 그 또한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사무 공간을 마련하고 새로운 법인을 만들고 담당자를 뽑고 팀을 구성하는 일 등 무엇 하나 쉬운 일이 없었지만, 힘 모아 정성을 다했다. 그리고 우리가 지금까지 보고 경험한 바와 같이 감정노동센터의 사업은 중요하고 유익하고 필요했다.
광화문에서 열린 첫 캠페인에는 서울시 노동국장이 참석하여 힘을 실었고 주무과 공무원이 손수 피켓과 현수막을 들었다. 작은 불씨들이 모여 점점 더 큰 불꽃으로 나아가는 시간이었다. 센터 구성원들은 예방책을 잘 갖추길 바라는 사업장, 마음 치유를 제대로 받고자 하는 노동자, 현장감 있는 교육이 필요한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수요를 직접 확인하며 하늘 아래 새로울 것이 있겠냐만 그래도 뭔가 해내고 있다는 보람과 긍지를 갖기 충분했다.
그러나 집인 줄 알면서 지었던 감정노동 센터가 모래성처럼 허물어져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파도가 몇 번 철썩거리면 ‘악’ 소리도 못 내고 그냥 바다에 몸을 맡겨야 하는 모래성을 그동안 집인 줄 알고 지냈다. 염원까지는 아니어도 많은 사람의 기대와 노력으로 달려온 서울시 감정노동센터가 그간의 성과를 통해 앞으로 해야 할 일을 확인하는 단계에 이르렀지만 이젠 그 이름을 접어야 한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그 과정에 긴밀하고 유연했던, 그리고 상호 공감했던 민간위탁의 장점은 보이지 않았다. 일방적이었고 때로는 다른 경로를 통해 소식을 접하게 되는 안타까운 일들이 자주 생겼다.
사업은 그대로 이어지니 무슨 문제냐 하겠지만 정체성과 비전을 명확히 가진 조직을 만들어 가는 일이 늘 성공적이거나 당연하진 않기에, 또 거기서 생산되는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역할과 활동의 파급력은 가늠할 수 없기에 센터가 만들어질 때보다 더 고민하고 신중했어야 한다. 다시 어떤 모습으로 소환될지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당분간은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어느 드라마의 대사처럼 ‘불꽃 같은 6년이었다. 환하게 탔다가 지는’.
이사하는 날
텅 비워진 집이 내 집이건 남의 집이건
손때 묻은 벽지와 문고리, 아이들의 낙서와 부엌에 찌든 자국들
방구석에 뒹구는 먼지뭉치와 현관에 깨진 타일에서도
새겨진 이야기와 추억이 또렷하던 그 하루
집에 들어오는 또 다른 식구
새로운 이야기와 추억을 쌓겠지
어디선가 가져온 또렷했던 그 하루 희미해질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