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귀한(?) 노동의 시간과 약쟁이들의 시간, 그리고 노동의 ‘독고다이’화
김직수 (센터 정책연구위원)
게임업체 넷마블의 개발자, LG유플러스 현장실습생 등 과로사와 과로자살이 이어지고 있다. 새 정부는 공약사항으로 노동시간 주당 52시간 규제 및 노동시간기록의무제 등을 제시한 바 있는데, 이에 그치지 않고 1일 노동시간 규제 혹은 연속휴식시간보장(인터벌 규제) 등에 이르는 실효성 있는 규제가 이루어질 것인지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범죄적인 장시간 과중노동의 ‘범인’이 누구인지를 명확히 지목하는 목소리는 소수에 불과하다.
물론 재계와 개별기업들만이 문제는 아니다. 모두가 알다시피 한국사회는 엘리트주의가 지배하며, 한국의 직장은 남성사회이다. 많은 이들이 의식적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장시간 과중노동에 대한 문제제기를 ‘사람(남자)답지 못한 것’으로 보는 시각을 지니고 있으며, 그러한 문제제기를 ‘여자처럼’ 징징댄다고 여긴다. 사회생활(‘남자들의 세계’)이란 으레 다 그런 것이라 본다. 그리고 엘리트 지식인들은 저널리스트든 대학 교수든 밤에 일하거나 오래 일하는 것을 진심으로 죄악시하지 않는다. 지식인들의 노동의 특징은 불규칙적 노동과 창의적 노동이며 일종의 ‘장인적 노동’으로 볼 수 있는데, 이런 형태의 노동은 생체 리듬을 되찾는 시간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일정한 지위를 지닌 지식인들은 이런 여유를 자기들도 모르게 가질 수 있다. 장시간 과중노동의 범죄 구조를 파헤치는 지식생산이 미진한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다.
뜬금없지만, 장시간 과중노동과 유사한 범죄 구조를 지닌 문제 중 하나로 (마)약 범죄를 들 수 있다. 대체로 사회가 불안정하고 불평등해지면 마약중독자 혹은 일중독자가 늘어나는데, 이는 그 사회가 전쟁 상태임을 암시한다. 지난해 어느 국제심포지엄에서 장시간 노동 문제를 호소하던 한국측 발표자가 토론중 갑자기 “전쟁 같은 밤일을...”로 시작하는 민중가요 <노동의 새벽>의 한 소절을 불렀던 일이 문득 떠오른다. '임금노동'이든 ‘자발적 노동'이든 간에 누군가의 ‘밤일’과 무리한 노동은 전쟁과 같이 '죄악'시 되어야 할 것, 혹은 은둔 생활자에게나 허용될 수 있는 것이리라.
전쟁은 지치지 않는 병사를 필요로 한다. 메타암페타민(2차대전 당시 일본에서 판매되던 상품명은 ‘히로뽕’)을 국영 군수공장에서 대량으로 생산해 보급한 것은 세계대전 시기의 추축국 및 일부 연합국, 즉 전쟁국가들이었다. 알코올과는 달리 오늘날 보수든 진보든 ‘죄악시’하는 담배 역시도 지금처럼 간단히 피울 수 있도록 패키지로 대량 생산한 것도 전시 군수공장들이었다. 그런데 전쟁국가들이 막상 ‘마약’을 전장과 후방에 뿌려 보니, 당장은 좋았지만 후유증이 컸다. 전투와 노동 능력을 상실하게 되어 진짜 전사로든 ‘산업’ 전사로든 써먹을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전범들은 이제 약쟁이들을 감옥에 보내고, 감옥이 하나의 거대한 산업이 되었다.
나아가 전쟁국가와 그들의 실세인 기업들은 임금노예들을 한계치까지 부려먹는 데는 ‘알아서’ 무리하도록 하는 게 더 쉽고 이들에게 ‘비난할 대상’을 제공하는 것이 효과적임을 곧 깨닫게 된다. 여성들이 ‘애 낳는 것 빼곤 할 줄 아는 게 없는’ 이들로 비난의 대상이 되나, 다른 한편에서는 아이를 낳기 전까지는 동경의 대상이 되어야 했다. 따라서 여성들을 싸잡아 비난의 대상으로 만드는 것은 녹록치 않았다. 이에 더해 여성들은 후방의 군수공장에서 유용한 노동력이기도 하였다. 장애인들은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노동능력을 상실한 이들이므로, 이들이 비난의 대상이 될 경우, 일꾼들은 그것이 곧 자기의 미래일 수 있음을 알고 있기에 노동원리가 성립되지 않는다.
따라서 최소한의 노동능력을 지니되, ‘인간이 덜 되어서’ 빈둥거리는 이들이 필요하게 된다. 더욱이 더 이상 노동력이 부족하지도 않게 될 때 이런 비난의 대상이 절실히 필요하게 된다. 약쟁이, 주정뱅이, 골초들은 뒷골목과 도박장을 어슬렁거리며 드나들고, 임금노예들은 늦은 밤까지 공장과 사무실을 환히 밝히는 것이 오늘날 자본주의의 풍경이다. 자본은 시간을 ‘착취’한다기보다 ‘시간의 낭비’를 조직함으로써 시간과 화폐 간의 교환이라는 기초 조건을 안정적으로 확보한다. 자본은 시간낭비 집단을 만들어냈지만, 그들을 온전히 통제하지는 못하고 있고, 이런 애매한 상태는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 약쟁이들은 카르텔이나 갱의 형태로 조직화되어 국가의 애물단지가 되었고, 거대 제약회사들은 중동과 같은 새로운 현대전의 전장을 ‘합법적’ (마)약의 거대한 임상실험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다른 형태의 저항도 있었다. 베트남전 시기 미국의 젊은이들은 징병을 거부하면서, 네이팜탄을 만들던 화학지식을 역으로 이용하여 정신적 해방을 위한 약물들(LSD 등)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문화운동으로서의 ‘사이키델릭 운동’은 도처에서 전쟁을 벌이는 패권 국가 내부의 젊은이들의 상처입은 영혼의 표출이라는 수준을 넘어 의미 있는 사회변화를 이끌어내는 데까지 이르지 못하였다. 1960년대 베트남전 시기, (그리고 1990년대 걸프전 시기) 미국 사이키델릭 운동의 아이콘들이 줄이어 젊은 나이에 자살로 생을 마감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반면 살아남은 이들은 철이 들면서 ‘네트워크로 하나 되는 세상’을 내세웠으나, 정작 기축적 사회관계들을 개별화하는 데 앞장섰다.
한편, 보다 통제 가능한 ‘시간낭비 집단’도 등장했다. 알바나 하면서 적당히 살고 빈둥거리(는 것으로 보이는, 혹은 보여야 하는)는 집단인 ‘오타쿠’들도 등장했다. 이들은 ‘게으르다’고 낙인찍히는 복지혜택 수급자들과 마찬가지로 차별을 받곤 한다. 그런데 이들은 환금성도 없고, 경제발전에 쓸모 있는 것도 아닌 지식으로 자기들만의 세계를 만들기 시작한다. 오타쿠, 잉여, 혹은 ‘일회용 청년’들은 자신들의 언어와 세계를 만들어 나가고 있다. 자신들의 시간이 사회적으로는 ‘낭비’되고 있다는 사실을 은근히 즐기면서 말이다. 이러한 새로운 ‘세계 창조’를 기존 사회의 변혁과 연결시키고 싶어 하는 비판적 지식인들도 있지만, 여전히 그것은 어렵고 먼 길로만 보인다.
전쟁이 양산한 것은 (마)약뿐만이 아니다. 간접고용과 특수고용 같은 고용의 외부화의 가장 오래된 형태 중 하나가 바로 ‘용병’(현대전에서는 PMC)이다. 그런데 극단적인 군국주의적 총동원체제 하에서는 용병 활용의 원리가, 집단행동과 지휘관의 책임이라는 근대적 군대의 원칙을 무시하고 희생을 전제로 한 단독 임무수행과 이의 신화화로 나아간다. ‘독고다이’가 그것이다. 독고다이는 2차대전 말기 일본의 ‘특공대’를 말하는데, 고도로 훈련된 소수정예 특수전 부대 따위를 일컫는 말이 아니라, 당시 자국 젊은이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카미가제, 카이텐 등 자살특공대의 총칭이다. 그리고 이를 뒷받침한 것은 국가가 외부에서 벌이는 ‘신성한’ 침략전쟁을 지켜보며 ‘이제 좀 살림살이 나아지려나’ 하며 뒷짐 지고 동조 방관하던 소시민들이었다. 오늘날 고용관계의 외부화와 개별화, 그리고 강요된 자살로서의 과로자살의 증가는 노동의 ‘독고다이’화를 시사한다.
‘과로자살’은 강요된 ‘자살특공’이며 이를 막으려면 지긋지긋한 전쟁을 끝내야 한다. 전범들을 전범재판에 회부하고 전쟁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전쟁이 진정 죄악시되어야 한다. 그런데 오늘날 죄악시되어야 할 것이 죄악시되지 않는 이유 중 하나는 바로 (특히 제도권) 지식인들이 그런 척 하면서 실제로는 장시간 과중노동을 죄악으로 생각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아무도 그것을 진정 ‘문제’라 보지 않는다. 자본의 가장 약한 고리인 ‘시간’은 이렇게 여전히 가장 굳건한 매듭으로 유지된다. 궁여지책이긴 하지만, 일부 유럽 국가가 (마)약 문제 대책으로 시도해온 소지 및 이용의 제한적 비범죄화는 참고할 만하다. (마)약의 생산과 유통을 강력히 규제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이제 장시간 노동 문제에 대한 우리의 의지를 재확인 할 때쯤 되지 않았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