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회가 노동존중사회 일까?
정흥준 (센터 정책연구위원)
박근혜 정부가 물러난지 3개월이 다 되어 간다. 지난 겨울 내내 시민들은 광화문 길거리에서 주말 마다 정권퇴진을 요구했고, 새 봄과 함께 새 정부가 들어선 것이다. 박근혜 정부의 몰락은 표면적으론 최순실 등 국정농단에 대한 국민적인 즉각적인 분노로 이해할 수 있으나 보는 시각에 따라 우리 사회의 구조화 된 정치적, 사회적 모순에 근거한 사건으로도 평가할 수 있다. 학생들은 대학을 졸업해도 먹고 살만한 일자리가 없고, 장년층은 평생을 일하고 은퇴한 노후에도 다시 생계를 걱정해서 일자리를 찾아 해메야 하는 어쩌면 보통의 시민들은 지금의 사회에서 희망을 찾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돈과 권력이 있으면 노력없이도 대학과 취직, 그리고 삶이 보장되는 시스템은 사람들로 하여금 분노을 느끼게 만들었고, 이를 해결하지 못하는 정치적 무능력은 불신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던 차에 최순실과 그 딸을 둘러싼 정치인, 공무원, 재벌오너 간의 얽히고 섥힌 부정부패가 시민들을 거리에서 촛불을 들도록 불을 지핀 것이다.
어쩌다가 우리 사회는 희망을 잃어버리게 되었을까? 우리나라는 한국전쟁 이후 60~70년대 고단한 산업화를 지나 그나마 80년대 후반 민주화를 겪으면서 희망을 보았다. 그런데 87항쟁으로 어렵게 달성한 정치적, 경제적 민주화는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90년대 급속도로 진행된 세계화는 우리 사회에 전례 없는 경쟁을 요구하였고, 97년 외환위기의 경험은 구조조정과 비정규직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하는 사회적 압력이 되었다. 잘 알고 있듯이 이 때 정리해고와 파견법이 도입되었고 기업에서는 성과주의가 확산되었다. 그렇게 십여 년이 흘러 2000년대 후반이 되었을 때 노동시장은 이미 전쟁터가 되어 버렸다. 비정규직 노동자가 전제 임금 노동자의 절반이 되어 버렸고, 비슷한 일을 하지만 처우는 절반에도 못미치는 등 차별이 일상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체 노동자에게 힘이 되어야 할 노동조합은 자신들의 조합원들을 보호하기에도 벅차 했다.
그러나 경제적 성장이란 과실은 늘 공정한 분배와 궤를 같이할 때 의미가 커진다. 사회를 유지·발전하는데 있어서도 ‘노동’은 다른 물적 기반과 함께 중요한 역할을 해 왔다. 굳이 마르크스 등을 거창하게 언급하지 않더라도 현대사회에서도 노동하는 자가 없으면 기업도 사회도 유지될 수 없다. 따라서 상식적이면서 바람직한 사회는 노동하는 사람들이 노동을 통해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건강한 삶을 유지하는 것이다. 그런데 전쟁터가 되어 버린 우리 사회에서 그 동안 노동에 대한 존중과 배려는 익숙한 주장이 아니었다. 비정규직의 삶이 특히 그러했다. 예로써 시간제 노동자들은 주휴수당 등 정당한 보상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였고, 위장 자영인에 가까운 특수고용 노동자들은 노동기본권을 무조건 박탈당했다. 기간제 노동자들은 2년 단위로 해고를 감내해야만 했다. 일상적인 고용불안과 저임금, 낮은 복리후생과 빈약한 사회적 보호 아래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결혼도, 출산도 쉽지 않았다. 그렇다고 정규직 노동자들이 특별히 존중을 받은 것도 아니었다. 특히 노동조합이 있는 사업장에서 사용자들은 노조파괴 컨설팅업체와 손 맞고 불법적인 노조탄압을 아무렇지 않게 자행해 왔다. 한 두 곳에서 이러한 불법행위가 성공하자 여기저기 번져 나가기도 했다. 정규직, 비정규직 가릴 것 없이 사회 전반적으로 ‘노동’에 대한 멸시와 폄훼가 확산되어 온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시민들의 촛불항쟁으로 탄생한 문재인 정부가 노동존중사회의 실현을 내걸고 있다. 반가운 일이다. 노동자들이 존중받고, 노동에 대한 사회적 가치를 제고하는 정책을 정부 차원으로 추진하겠다는 것으로 지난 시기 우리 사회의 부족한 부분을 메울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으로 기대하면서 노동존중사회의 실현을 위한 구체적인 정책방향을 제시하고자 한다. 노동존중사회가 되려면 크게 두 가지의 방향이 보완되어야 하는데 노동자 개인들에 대한 노동인권의 보호가 하나이며 집단적으로는 노동조합의 활동을 보장하는 것이다. 이를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개인 수준에서의 노동인권의 보호이다. 노동인권의 보호란 추상적이고 광범위한 개념이지만 노동자 개개인들이 생활속에서 존중받는 정책을 의미한다. 이를 위해 우선 일을 하고도 돈을 못 받는 일은 근절되어야 한다. 정부는 사용자가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도록 더 많은 수단을 강구해야 한다. 체불임금이 1조가 넘는 현실을 시급히 바로 잡지 않고서는 노동인권을 논의하기가 어렵다. 특히 일을 시키고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 임금체불은 남의 물건을 훔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남의 노동력을 도둑질한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에 임금체불을 해결할 수 있는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 노동인권의 보호를 위해 노동교육도 체계화하고 확대해야 한다. 우리나라는 노동이란 용어 자체에 대해 지나치게 금기시하고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여 왔다. 이해는 되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 사실 노동은 다른 무엇보다 정직하고 중요한 삶의 일부이다. 따라서 노동에 대한 기본적인 상식을 갖는 것이 이후 중요하다. 노동이 무엇이고 왜 노동기본권이 보호받아야 하는지를 초, 중, 고등학교에 더 많이 가르쳐야 하고 전문가들도 더 많이 양성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노동인권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근거 없는 차별을 줄여야만 한다. 이를 위해 최우선으로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을 조속히 제도화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일에 대한 공정한 보상이야말로 차별을 줄이는 최선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둘째, 집단적인 수준에서의 노동조합 활동을 보장하는 것도 노동존중사회를 실현하는 밑거름이 될 수 있다. 가끔씩 잊어버리지만 노동조합을 만들고 활동하는 것은 노동자들의 이해를 대변하는 활동에 앞서 헌법에 보장된 국민기본권 중 하나로 지극히 정상적이며 노동시장을 균형을 유지하는데 도움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비이성적인 반노조정서가 강해 일부 사용자들은 때로는 불법을 자행하여 정상적인 노조활동을 방해할 정도로 왜곡된 인식을 가지고 있다. 이에 대해선 사회적 교정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사용자들이 부당노동행위를 사업의 존폐를 가르는 중대한 불법행위로 받아들인다면 아마도 불법적인 반노조 행위는 사라질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 정부는 가끔식 하는 특별근로감독 외에 부당노동행위에 대한 상시적인 근로감독을 수행해야 한다. 문재인 정부에서 근로감독관의 정원을 늘린 이유도 이같은 이유에서라고 본다. 특히 사용자의 불법적인 반노조행위가 반복적으로 나타날 경우 노동시장 전체를 어지럽히고 노사관계를 경직되게 만들 수 있음로 사업 자체를 유지하지 못하도록 엄단할 필요가 있다. 한편 노조활동의 보장은 기존 노조에 대한 활동보장만이 아니라 노동조합을 필요로 하는 노동자들이 쉽게 노동조합에 가입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특히 특수고용노동자처럼 임금노동자와 크게 다르지 않음에도 노동3권이 부정되고 있는 것은 법개정을 통해 시급히 개선해야 한다.
노동존중사회는 현실에서 버겁게 살아가는 노동자들에게 새로운 삶의 희망을 줄 것이다. 그럼 위의 두 가지만 실현되면 노동존중사회가 만들어지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우리는 이제 막 노동존중사회를 위한 첫 발을 내딛고 있을 뿐이다. 일제에서 해방되어, 한국전쟁의 폐허에서, 산업화의 고된 시기를 지나, 민주화 시기에서도, 세계화의 공간에서도 실현하지 못했던 노동존중사회를 실현하기 위해 진짜 필요한 것은 새 정부에게만 책임을 넘기는 것이 아니라 노동하는 자들이, 노동조합이, 진보적인 지식인들이 좀 더 책임감을 가지고 논리와 대안을 개발하고 실천하면서 정부보다 앞서 사회 전체를 이끌어가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