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는 비정규직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이정아 센터 정책연구위원
2015년에 노벨문학상을 받은 벨라루스의 저널리스트 알렉시예비치는 1985년에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라는 제목의 책을 발간했다. 전쟁에서 살아남은 수백 명의 여성 생존자 인터뷰에 기반하여 당사자이자 주된 희생자이면서도 들리지 않는 여성의 목소리로 전쟁을 말하는 책이었다. 알렉시예비치는 “그들의 침묵도 듣는다.” 예기치 못한 감염병의 세계적 유행이 직접적인 감염자는 물론 병에 걸리지 않은 사람들의 사회경제적 삶까지 침식시키고 있는 현재 상황을, 알렉시예비치와 같은 관점으로 볼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면 과도할까?
감염병으로 인한 위기는 모든 이에게 찾아왔지만, 영향은 고르지 않다. 대부분에게 그 영향은 마스크 없이 활동하고 여러 사람과 모임을 하거나 여가생활을 할 자유의 저해라는 형태로 찾아왔다. 그리고 일부에게는 방역에 동원되거나 방역으로 인한 공백을 메우는 노역에 가까운 장시간 노동이, 또 다른 일부에게는 부분 해고, 해고와 실업으로 인한 소득 감소가 치명적인 위험이 되었다. 그러나 팬데믹 상황의 지속으로 정부 대처에 대한 불만이 커지는 동안에도 코로나19 확산 후 혹사당하거나 혹은 해고되었다는 이유의 소위 ‘방역 불복 투쟁’은 볼 수 없다. 혹사당하거나 해고된 비정규 노동자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스스로 만들지 않은 ‘위기’ 상황에 누구보다 큰 영향을 받았으면서도 막상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비정규직’의 침묵은 누가 들어줄까?
|
수(천 명) |
증감률(%) |
||||||
비정규직 |
정규직 |
비정규직 |
정규직 |
|||||
여성 |
남성 |
여성 |
남성 |
여성 |
남성 |
여성 |
남성 |
|
35세 미만 |
-21 |
-30 |
-80 |
-78 |
-1.8 |
-2.6 |
-4.7 |
-4.0 |
35~49세 |
-76 |
-42 |
-64 |
-84 |
-6.1 |
-4.3 |
-3.5 |
-2.4 |
50~64세 |
-61 |
35 |
117 |
86 |
-4.0 |
3.0 |
11.7 |
4.3 |
65세 이상 |
92 |
50 |
14 |
28 |
13.2 |
9.0 |
42.4 |
22.5 |
64세 미만 |
-158 |
-37 |
-27 |
-75 |
-4.0 |
-1.1 |
-0.6 |
-1.0 |
전 연령 |
-66 |
13 |
-13 |
-47 |
-1.4 |
0.3 |
-0.3 |
-0.6 |
자료: 통계청 경제활동인구조사 8월 고용 형태별 부가조사 각 연도 원자료 |
2019년과 비교하여 2020년에 연간 취업자 수는 -21만 9천 명, 임금 노동자 수는 -10만 8천 명 감소했다. 증감률로 계산하면 각각 2019년 대비 -0.8%와 0.5% 수준의 적은 수치로 보이지만, 미국발 금융위기 이후 10년 만에 처음 감소한 10만 명 임금 노동자의 불만이 작다고 할 수는 없다. 게다가 10만 명은 고령자 일자리 증대로 감소 규모가 상쇄된 결과이다. 위의 표는 2019년 8월과 2020년 8월의 임금 노동자 수를 비교하여 증감 수와 비율을 정규직 여부, 성별, 연령 구간으로 구분하여 나타낸 것이다. 코로나19 확산으로 사라진 65세 미만 임금 노동자 일자리 셋 중 둘은 비정규직이다. 그러나 임금 노동자 중 정부의 일자리 정책 효과로 추정되는 65세 이상 고령자 일자리가, 특히 비정규직을 중심으로 증가하였으므로 전 연령에서 비정규직 비중은 절반이 되지 않는다. 비정규직 일자리는 위기 국면의 완충재로서 타격을 받지만, 쉽게 사라지는 만큼 쉽게 만들어지기도 한다.
한국 노동시장의 완충재로서 위기의 직접적 타격을 받는 비정규 노동자를 위한 완충재는 여전히 미흡하다. 2020년 8월 기준 고용보험 적용 대상 임금 노동자의 고용보험 적용률은 정규직 72.6%, 비정규직 43.4%로 격차가 매우 크다. 고용보험 가입은 실업급여 수급 자격 취득의 대전제이다. 최소한 고용보험에 일정 기간 이상 가입 조건을 충족하지 못하면 실업을 하더라도 실업급여를 받을 수 없다. 실업의 위험을 더 많이 갖는 노동자 집단이 실업급여를 수급할 자격을 갖지 못하는 아이러니를 해결하기 위해 대통령이 직접 ‘전 국민 고용보험’을 언급했지만 빠른 전개를 기대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위기는 현재진행형이지만 해결은 불확정 미래형이다.
한편 ‘취업 취약계층 대상의 한국형 실업부조’인 국민취업지원제도가 올해 1월 1일부터 운영되기 시작했다. 전 국민 고용보험과 국민취업지원제도로 25년 이상 운영한 고용보험 제도가 진일보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겠으나 어쩐지 과녁을 빗맞힌 듯하다. 코로나19 확산의 대응책으로 정부가 내놓은 수많은 지원 정책 중 ‘비정규직’ 대책은 존재하지 않는다. 한국 노동시장의 고질적인 문제인 비정규직이 마치 허상인 듯 피하며 동 집단을 조준하니 사각지대의 존재는 필연적인 것이 된다. 우리 정부가 침묵까지 듣고자 하길 바란다. 비정규직이기에 경험하는 위기의 영향과 내용을 파악하고 고통을 경감시킬 방안을 고민함으로써 위기의 숨겨진 얼굴을 바라보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