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희 센터 정책연구위원
“어떻게 그게 가능했어?” 민주노총 보건의료노조가 11월 29일부터 12월 1일까지 사흘 동안 진행한 정책대회를 두고 다른 산별노조 간부들이 던진 말이었다고 한다. 한국 노동운동 역사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운 보건의료노조의 정책대회는 크게 세 가지 점에서 특기할 만하다. 첫째, 산별노조가 사업계획 결정이나 임원 선출 등과 같은 ‘의결사항’ 없이 노조의 미래전략을 논의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정책대회를 개최하였다는 점, 둘째, 하루도 아니고 사흘 동안 그 정책대회가 진행되었다는 점, 셋째, 전임·반전임 간부 400여 명이 그 사흘 동안의 행사에 꼬박 참석하여 열띤 토론을 벌였다는 점이다.
‘의결사항’ 하나 없이 토론, 또 토론… 비전과 목표 공유
정책대회는 국제단체 강연과 연대사, 간호인력기준ratio 국제컨퍼런스, 산별운동 미래전략에 관한 5개 주제별 국내 컨퍼런스 등으로 구성되었다. 국제노동기구(ILO)와 국제산별노조(UNI, PSI), 미국·일본·독일·호주 4개국 보건의료노조 관계자들이 참석한 첫째 날 행사에서는 정의로운 전환과 건강안보 관점에서 바라본 코로나19 위기 교훈, 간호인력기준 및 보건의료인력 정책과제 등에 관한 국제적인 관점과 각국의 경험이 발표되었고, 질의응답과 토론이 진행되었다. 둘째 날과 셋째 날 행사에서는 국내 노동연구자들이 지난 1년 동안 진행한 보건의료노조 조직 진단(전임간부 활동과 현장 활동), 청년세대(보건의료청년 노동자의 삶과 일터, 그리고 산별노조), 조직 강화(산별노조의 다양성, 연대 및 더 큰 단결), 조직 확대(모든 보건의료 노동자와 연대하는 조직 확대 전략), 단체교섭(산별노조 초기업(산별) 교섭 추진전략과 과제) 등 5개 과제별 연구결과를 발표하였고, 이 연구 과정에 함께한 현장 간부들이 보조 발제를 하고 전체가 토론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사흘 일정 어디에도 ‘의결’을 요구하는 안건은 없었다. 조직에서부터 교섭,투쟁에 이르기까지 조직 전반을 아우르는 다양한 주제들에 대한 발표와 토론이 이어졌을 뿐이다. 이 과정에서 참석자들은 돈보다 생명이 우선되는 사회,불평등·양극화 극복을 통한 더불어 사는 복지국가,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 모든 보건 의료 노동자의 고용안정·생활임금·노동안전·사회보장 등과 같은 산별노조로서 보건의료노조의 비전을 공유하였다. 이 비전은 정책대회 슬로건인‘도약 2030! 20만 조합원-30만 단협 적용률 시대’에서 드러나듯이 작은 사업장과 돌봄 영역 등에서의 조직 확대를 통해 2030년까지 현재 8만여 명인 조합원을 20만으로 늘리고, 다양한 방식의 초기업별 단체교섭을 추진하여 단체협약 적용 범위를 30만 명으로까지 확대한다는 등의 구체적인 목표로 제시되었다. 행사장 주변에는 산별노조로서 보건의료노조 24년의 역사를 24개의 장면으로 정리한 사진전과 산별운동 미래전략 5개 주제의 세부 목표에 관한 스티커설문 부스 등이 설치되어 참석자들이 회의장 밖에서도 산별노조운동의 역사를 훑어보고 미래전략에 관한 의견을 제시하도록 하였다.
씨줄과 날줄의 결합
이번 정책대회에서 더욱 특기할 만한 것은 국내와 국제, 노동조합과 노동연구진영, 노조 중앙과 현장이 씨줄과 날줄로 촘촘하게 연결되고 질서 있게 엮였다는 점이다.
첫째, 노조는 그동안 축적해 왔던 국제연대 활동 경험에 기반을 둔 국제 네트워크의 힘을 십분 발휘하였다. 코로나19 위기로 더욱 필요성이 커진 보건의료서비스의 공공성 강화와 간호 인력 기준 강화 등과 같은 공통 의제에 관한 국제기구와 각국의 경험을 공유하고 서로의 활동에서 시사점을 찾고자 하였다.
둘째, 노동조합은 산별운동 미래전략을 5개 주제로 세분화하고 해당 분야 노동연구자들에게 맡겨 연구과제로 수행하게 하였다. 노조 외부자의 객관적인 시선과 국내외 타 노조 경험의 비판적 검토, 노조 전략 모색의 객관적 근거 마련 등을 목적으로 하였다. 이 연구는 연구자들만으로 진행되지는 않았다. 60여 명의 현장 간부들로 구성된 산별 기획단은 해당 주제별 면접조사와 연구 초안에 대한 검토작업을 연구자들과 함께 수행하였고, 정책대회 때에는 보조발제자로 참석하여 연구 결과물에 자신의 현장 경험을 담아내었다.
셋째, 노조는 중앙에서 정책대회를 올해 핵심사업으로 추진하려고 결정한 뒤 노조 노동연구원과 정책실을 비롯한 상집, 지역 사무처가 주도하여 대회를 준비하였고 현장의 참여를 독려하였다. 보건의료노조 산별 24년의 역사만큼이나 현장엔 기업별 노조 시절을 경험하지도 못한 20, 30대 조합원과 간부들이 많고, 그 경험치의 차이만큼이나 노조를 이해하는 방식, 노조에 대한 기대가 다른 경우도 많다. 이 다양성을 최대한 묶어내기 위한 노력이 함께 경주되었다.
정책 노동조합의 한걸음
이 정책대회는 중앙 및 현장 간부들이 노조의 ‘꿈(비전)’을 공유하고 미래전략을 함께 설계하는 과정이었다. 또한 노조 스스로 정책 역량을 키우는 장이었다. 노조의 정책 역량은 크게 세 가지 요소로 구성된다고 할 수 있다.
첫째, 정책 생산을 위한 노조의 자원resource이다. 정책 생산을 위해 노조가 보유하고 있는 인력의 규모, 이들에게 노조가 투자하는 시간과 재원, 이들의 역량 배가를위한 각종 교육훈련 프로그램과 참여 기회, 조직 내 정책 부서의 존재 유무 및위상 등을 말한다.
둘째, 정책 생산과정과 생산된 정책을 현실화시키기 위한과정으로서 노조 내부 민주주의 수준과 조직 동원력이다. 해당 정책을 노조의핵심 요구로 만들어내기 위한 노조 내부 소통의 정도와 그 정책을 실현하기 위해 노조가 동원할 수 있는 힘의 크기를 말한다.
셋째, 정책을 현실화하기 위한노조의 정치력이다. 바로 앞에서 언급한 조직 동원력이 노조 내부 정치력이라고 하면, 여기서 말하는 노조의 정치력은 노조 외부에 있는 다양한 집단(타 노조, 시민사회단체, 정부와 정당도 포함된다)과의 정치 과정에서 해당 네트워크힘을 정책 현실화에 활용할 수 있는 역량을 말한다.
이 세 가지 요인을 결정짓는 가장 큰 요인은 무엇보다 노조의 정체성이라 할 수 있다. 노조가 자신의 존재 이유와 목적을 좁은 의미의 (우리 회사) 조합원만을 대표하여 임금과 고용보장과 같은 물질적 이해를 우선하는 경우와 해당 산업·업종 내 모든 노동자의 보편적 이해와 나아가 노동시장 불평등 해소, 사회 공공성 강화, 나아가 모든인간 소외와 결별하는 사회적 해방을 추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경우, 이들 노조의 정체성이 같다고 볼 수 없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보건의료노조의 정책대회는 정책 생산을 위한 노조의 자원, 노조 민주주의와 조직 동원력, 그리고 정치력 측면에서 충분히 한 걸음을 내딛는 과정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성과는 보건의료노조가 ‘사회운동적 노동조합’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지속해서 유지·발전시켜왔기 때문에 실현 가능했다고 본다.노조는 이제 정책대회 평가 작업과 후속 작업을 진행하면서 불평등 양극화 시대, 노동의 위기를 돌파할 수 있는 ‘한국 산별노조운동의 미래전략’을 더욱 구체화할 예정이다. 보건의료노조의 그다음 걸음이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