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구미 소재 반도체 생산업체 KEC 노동자 75명이 14일부로 정리해고 된다. 같은날 부산 해운대구 소재 반도체 리드프레임 제조업체 (주)PSMC(옛 풍산마이크로텍) 노동자 58명은 정리해고 100일째를 맞는다. 하루 뒤인 15일은 쌍용자동차 정리해고 사태가 1천일에 접어든다. 끝나지 않는 악몽처럼 정리해고가 꼬리를 물고 있다.
◇'먹튀' 보조 수단된 정리해고=정리해고 반대 파업을 벌이고 있는 PSMC 노동자들이 13일 무기한 노숙투쟁에 돌입했다. 금속노조 풍산마이크로텍지회 조합원 등 100여명은 이날 오전 10시 부산시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풍산그룹과 PSMC 경영진은 구조조정과 정리해고를 철회하라”고 촉구했다.
PSMC의 사례는 정리해고 제도가 일종의 ‘먹튀’를 보조하는 수단으로 악용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모기업인 풍산그룹은 지난 2010년 12월 풍산마이크로텍을 (주)하이디스에 돌연 매각했고, 자금난을 겪어온 하이디스는 지난해 3월 경영권을 유한회사 FNT에 넘겼다. 그 뒤 FNT측은 회사명을 (주)PSMC로 바꾼 뒤 적자 누적을 이유로 임금삭감을 요구하고, 노조가 이를 거부하자 희망퇴직과 정리해고를 추진했다. 결국 지난해 11월 노조 간부 17명을 포함해 총 58명이 정리해고 됐다.
풍산그룹이 20여년간 부산의 반도체 제조업을 지탱해온 풍산마이크로텍을 부실 업체에 기획 매각하는 방식으로 폐업을 유도하고, 그 뒤 공장 부지를 팔아 부동산 개발 차익을 챙기려는 ‘꼼수’가 깔려 있다는 의혹이 제기되는 배경이다. 문영섭 금속노조 풍산마이크로텍지회 지회장은 “PSMC 부지가 포함된 반여동 일대 땅에 돔구장과 아파트가 들어서면 풍산측은 시세 차익만 최대 1조5천억원을 챙기게 된다”며 “풍산이 땅 장사를 노리고 부실업체에 매각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PSMC 해고노동자들은 이달 29일 지회가 낸 부당해고구제신청에 대한 부산지방노동위원회의 심의결과가 나올 때까지 노숙농성을 이어갈 계획이다. 해고노동자들의 이같은 분투는 구미 KEC 노동자들에게로 이어질 전망이다.
◇'노조 통제' 수단된 정리해고=KEC는 지난 10일 75명의 노동자에게 정리해고를 확정 통보했다. 해고일은 14일이다. KEC의 사례는 회사측의 ‘노조 길들이기’ 수단으로 정리해고가 활용된 경우다. 노동강도를 높이는 방식으로 생산성을 높이고자 했던 회사는 교대제 변경(현행 3조3교대에서 2조2교대로)을 추진해 왔고, 이에 걸림돌이 되는 노조와 갈등적 관계를 이어왔다.
2010년 근로시간면제(타임오프)를 둘러싸고 시작된 KEC 노사갈등은 지난해 복수노조 시행에 따른 노조의 분화를 거쳐 올해 정리해고로 이어졌다. 표면적으로는 노동관계법의 변화에 따른 갈등양상으로 보이지만, 회사는 줄곧 교대제 개편을 강조해 왔다. 실제로 회사는 지난 10일 열린 노사 협상에서 연간 1천만원에 달하는 급여 삭감과 교대제 변경, 무급순환휴직 도입을 제안했다. 이를 거부한 금속노조 KEC지회 조합원들이 해고 대상이 됐다.
KEC지회는 “대폭적인 임금 삭감으로 겨우 3년간 고용을 보장하겠다는 방안”이라며 “교대제 전환에 따른 무급휴직까지 실시할 경우 노동자들의 피해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고 반발했다. 쌍용자동차 정리해고 사례처럼 무급순환휴직 대상자의 업무 복귀를 기약할 수 없다는 우려도 반영됐다.
이는 기우가 아니다. 쌍용차 정리해고 사태가 오는 15일로 1천일을 맞지만, 2009년 노사합의사항인 무급휴직자의 복직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 해고자들은 일용직을 전전하며 생계의 나락을 경험하고 있다. 이 기간 동안 쌍용차 노동자와 가족 20명이 잇따라 사망하면서 정리해고가 남긴 깊고 어두운 트라우마가 사회 병리현상으로 인식됐다.
신인수 변호사(민주노총 법률원)는 “근로기준법은 경영 정상화를 위한 마지막 수단으로 정리해고를 명시하고 있지만, 현실에서는 경영악화의 조짐만 보이면 정리해고가 남발된다”며 “정리해고에 대한 폭넓은 해석을 가능하게 한 현행 법의 틈을 메우고, 정리해고의 요건을 한층 강화하는 방향으로 법 개정이 이뤄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