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남신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소장 |
지난 2일 노인의 날, 서울지방고용노동청 앞에서 노년유니온과 청년유니온이 세대를 넘어 만났다. 무한경쟁·약육강식·유전무죄·승자독식이 판치는 정글자본주의 한국사회의 밑바닥에서 비인간적이고 비정상적인 생존피라미드를 떠받쳐 오면서 홀대받고 착취받아 온 우리 시대의 억울한 아틀라스들이 목소리를 합쳤다. 그간 유령처럼 무시당하면서 희생을 감내해 온 이들이 “여기 사람이 있다”, “노인과 청년에게 좋은 일자리를 달라”, “노조를 만들어 합법적으로 활동할 기본적 권리를 달라”고 우이독경인 고용노동부에게 촉구하고 호소했다. 청년유니온은 무려 다섯 번째로 노조설립신고서를 내는 진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가장 중요한 노동기본권마저 묵살한 채 직무유기를 일삼고 있는 노동부의 행태를 규탄하면서 근본적인 물음 하나를 던지게 된다. 왜 노조가 아니고 유니온인가.
유니온(Union)은 조합·협회·연합 등의 다양한 뜻으로 번역된다. 통상 노조로도 병기되지만 그 뜻이 더 다양하고 넓다. 청년유니온과 노년유니온은 노조 명칭 대신 해석의 여지가 큰 유니온 이름을 활용하고 있다. 사실 그 미묘한 어감 사이에 현재 한국사회 노조운동이 직면한 위기가 투영돼 있다. 양대 노총으로 대표되는 조직노동은 97년 외환위기를 결정적 분기점으로 정규직 중심의 경제적 이해와 요구를 지키는 데 발목이 잡혀 더 열악한 노동자계층을 제대로 대변하지 못했다. 전체 노동계급을 포괄하고 대표하는 대중조직이라면 일상적이고 구조적인 차별과 고용불안, 실업의 고통에 시달리는 900만명을 넘는 비정규 노동자와 수많은 중소·영세사업장 노동자, 그리고 이주노동자들의 복잡다단한 문제해결을 전면에 내걸고 모든 힘을 쏟아부어야 마땅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지금도 정부가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는 정규직 이기주의란 비아냥 섞인 이데올로기 공격은 부당하지만, 조직노동이 단순히 책망받는 수준을 넘어 존립의 정당성에 의구심이 일어날 정도로 상당 기간 허송세월로 보내면서 빌미를 제공한 건 부정할 수 없다. 지금은 아예 운동의 전망은 고사하고 역사적 책임을 도외시한 채 내부 정파·집단 간 갈등이 낳은 폐해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고 있다. 거기에다 과도한 제도정치 의탁 끝에 진보정당마저 분열과 퇴행으로 치달아 끝 모를 막장을 경험하고 있다. 거꾸로 보면 어디서든 새로운 방식과 내용의 운동을 추동하는 주체가 출현할 조건이 무르익어 왔다. 희망버스와 함께 유니온운동을 주목하게 되는 이유다.
기존노조 울타리 바깥의 새로운 주체들이 유니온이란 이름 아래 나타난 건 노동운동사에서 의미심장한 사건이다. 한국사회에서 기존노조의 핵심 주체인 대공장-정규직-남성노동자 중심의 활동을 어떻게 혁신하고 극복할 것인지는 묵은 과제였다. 여러 뜻 있는 시도가 있었지만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갈수록 심화되는 빈부격차로 빈곤이 극단적인 생활고와 정신적 피폐로 이어져 끝내 자살로 마감되기도 하는 악순환의 고리에 얽매여 있는 계급계층의 문제를 기존 노조운동의 논리와 활동방식으로는 개선하거나 해결할 수 없음이 분명해졌다. 피해당사자가 중심에 서는 노동자운동의 의미가 각별해졌다. 이제 한국자본주의의 근본모순으로서 역사발전의 엔진 역할을 해 온 노동-자본 간 계급투쟁의 한 당사자가 무력해져 희화화된 21세기 노동운동의 부활을 위해선 새로운 주체가 필요하게 됐다. 유니언운동은 바로 이런 시대 배경과 맞닿아 있다.
2010년 3월13일 창립된 청년유니온, 2012년 9월24일 창립된 노년유니온, 10월17일 준비위원회 발족을 앞둔 예술인소셜유니온에 이르기까지 비정규직 문제의 핵심당사자이기도 한 청년과 노년층, 그리고 인권의 사각지대에 놓인 문화예술인들이 유니온을 자신의 무기로 들고 사회적투쟁을 시작했다. 신자유주의의 최대 희생양인 당사자들이 침체에 빠진 노동운동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유니온운동이 구세주는 아니지만 사회적연대의 새로운 지평을 연 희망버스처럼 사회적 노조운동과 노동자 조직화의 새로운 출발점이 될 것이다. 새로운 노동자계급운동 주체를 낳는 산파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