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2월이 두려운 "아줌마"입니다
[2012 비정규노동 수기 공모전 수상작·⑥] 관공서 비정규직
박미림 비정규직 노동자
한국비정규노동센터는 2012년 '비정규노동 수기 공모전'을 열어 지난 12일 당선작 1편과 입선작 5편을 선정했습니다. <프레시안>은 해당 수상작 6편을 게재합니다. <편집자>
전문대를 졸업하고 전공을 살려 유치원 미술 강사 몇 년 한 것이 제대로 된 직장 생활의 전부였던 나는 전기공사 업을 하는 남편을 만나 결혼한 후 회사에서 직원관리 업무를 하며 남편 사업을 도와 일을 했다. 남편의 사업은 여러 번의 위기를 겪다가 결국 몇 차례 부도를 맞았고 모든 부채와 두 딸을 내게 남기고 가정은 해체되었다. 여자 나이 40을 넘어 할 수 있는 일은 그다지 많지 않았고 건강이 따른 것도 아니었으며 뛰어난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라서 삶에 대한 애착이나 희망을 놓아 버린 상황에서 지인께서 이렇게 살면 안 된다며 9년 전 00시 0000 센터 즉 관공서에 취직을 시켜주셨다. 그 당시에는 돈 버는 목적보다 내가 움직이며 숨을 쉬어야 했던 절실함이 더 컸던 때라 봉급이며 내 처우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었다.
차츰 심신이 안정을 찾아갈 즈음 비로소 내가 언론에서 듣던 비정규직 처지인 것을 알게 되었고 그 처우란 최저임금 수준에도 못 미치는 대우였다. 비정규직이라는 제도 자체도 생소했고 나와는 무관한 다른 세계의 사람 이야기쯤으로 여기며 살아왔던 내게 비정규직은 현실로 다가온 내 신분이 된 것이다. 아이들과 배곯지 않고 살 수 있는 쌀을 살 수 있는 최소한의 돈과 등굣길 나서는 두 딸에게 몇백 원을 쥐여 보낼 수 있었기 때문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난 바랄 수 없었고 남편이 내게 떠넘긴 빚을 해결할 능력도 처지도 되지 못한 채 난 아이들과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했다.
2004년 70만 원부터 시작된 급여는 현재 4대보험료를 빼고 평균 105만 원정도 받고 있다. 그 기간 동안 직장에서 받는 월급으로는 애들 학비는 고사하고 최소한의 생활도 영위해 나갈 수 없는 형편이었기에 퇴근 후 저녁 7시부터 12시나 새벽 1시까지 집 근처 식당에서 저녁 알바 하기가 부지기수였고 현재까지도 하루에 5시간 이상 자는 것은 내겐 호사였다.
"아줌마"호칭으로 시작된 비정규직 기간제근로…출장비 지급조차 못 받아
물론 이렇게 알바라도 할 수 있게 배려해주신 직장 상사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모든 것을 잃고 삶을 포기했을 때 직장 상사들께서 나름 배려해주신 것과 월급날이 정확해서 짜인 생계를 꾸릴 수 있는 관공서 근무는 내게 큰 위안되었기에 더 좋은 조건의 일반회사 근무는 생각조차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2004년,나의 비정규직 기간제근로는 "아줌마"라는 호칭으로 시작되었다. 지방자치단체의 부설 기관 내 실험실에서 정규직 공무원들의 업무를 보조하는 단순한 업무였다. 비정규직근로자라는 신분이 원래 그런 것인지,처음 시작부터 나의 호칭은 그냥 "아줌마"였다. 아줌마라는 호칭은 나이 든 여자를 다정하게 부르는 말이라고 어학사전에 나와 있기는 하다. 그렇지만 통상적인 뭇은 별생각 없이 가볍게 부르는 호칭이라는 것이 사회 통념이다. 일상생활에서 그저 그런 이름을 알지 못하는 여자를 아줌마라고 부르지 않던가. 정규직 시험을 치르고 공무원이 된 것은 아니지만 명색이 관공서 업무인데 호칭이라도 이름 석 자를 불러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언제 그만둘지 몰라 이름을 기억할 필요도 없다는 것인지,호칭에 대한 문제는 강력하게 말씀드려 곧 시정되었지만 정말로 속이 상했다. 밑바닥에서 일한다고 해서 함부로 불러야 할 사람은 없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불리고 싶은 이름이 있고 지켜져야 할 인격이 있을 텐데 그렇게 불리는 나도 초라했지만 나의 기간제근로자 첫 호칭이 아줌마로 시작되었던 것은 내내 잊을 수가 없다.
그렇게 반복된 나의 비정규직 직장생활은 단순 보조업무라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업무가 조금씩 늘어갔다. 업무를 터득할수록 조직에서는 점점 더 많은 영역을 맡길 원했고 순환보직으로 계속해서 바뀌는 공무원들보다 오히려 업무영역이 더 넓어진 부분도 있었다. 그런데 대우는 9년 전이나 지금이나 조금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급여의 개선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매해 진행되는 타 도시에서의 업무교육조차 정규직 공무원이 아니라는 이유로 출장비 지급이 되지 않는다. 출장비라도 정규직과 차등을 두지 말아 줄 것을 강력하게 요구했지만 기간제근로자에게는 출장비 예산이 세워져 있지 않다는 것이다. 업무상 필요에 의한 교육은 받아야 한다면서 출장비 지급은 되지 않는다니,무슨 규정이란 말인가. 지방정부의 비정규직에 대한 차별이 이 정도나 사기업은 어떨 것인지 한숨이 절로 나왔다.
사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라야 한다. 업무에 필요한 교육이나 현실이 그렇다고 교육을 거부할 수는 없는 일이다. 게다가 나는 연말에 재계약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이니 고양이 앞의 쥐나 다름없는 신세가 아닌가. 점심값이며 소소한 비용을 자비로 들여가며 교육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비정규직이라는 이유만으로 이처럼 차별을 계속 감수해야만 하는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열심히 공부해서 공무원 공개채용에 합격한 사람들과 같은 권리와 혜택을 기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같은 일을 하고 적어도 주어진 업무에서는 오히려 공무원 이상의 업무를 수행하면서도 비정규직이라는 이유로 출장비의 지급 같은 기본적인 복지까지 무시되어야 하는 현실에 마음이 늘 무겁다. 그렇다고 장기근속이 보장되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재계약이란 약점 때문에 열악한 현실을 감수해야만 하는 신세가 갈수록 비참하기만 하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 한다는 속담을 안다. 그렇지만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는 말도 있다. 개선될 처우를 기대하며 막연하게 희망 아닌 희망고문으로 살다 보니 세월을 보내게 된 것이다. 그간 겪었던 차별을 벗 삼아 나를 더 강하게 만들고자 버티고 있지만얼마만큼 더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제대로 살아야겠기에 때로 지방 의회 의장님께 비정규직 근로자들의 처우 개선과 차별에 대해 강력하게 호소한 적도 있었고 업무 특성상 상시 지속적인 업무와 전문성을 띈 업무를 잘 수행하려면 고용의 보장이 간절하다고 외쳐도 보았지만 돌아오는 메아리는 늘 개선이 아니라 절망이었다.
▲ 7일 오전 창원시 의창구 경남도의회 정문 앞에서 민주노총 경남본부와 마산창원여성노동자회 소속 12명이 기자회견을 열고 "경남비정규직근로자지원센터 예산을 원상회복하고 확대 편성하라"고 촉구하고 있다.(위 사진은 본기사의 특정내용과 관련이 없습니다.) ⓒ연합뉴스 |
궂은일 다 맡아가며 9년 일해도 계약 연장철에는 조마조마
정규직 공무원인 부서 내 담당 상사는 짧게는 1 년 길면 3년 사이에 인사이동으로 늘 바뀐다. 일에 대한 연속성올 갖고 오롯이 실험실에서 이뤄지는 분석 및 시약 조제 장비 다루는 일은 대부분 기간제근로자의 몫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우 개선은커녕 그저 하루하루 일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직장 생활을 하면서 계약 연장철만 다가오면 조마조마한 기간제근로자의 신세…. 종일 유해가스가 가득한 실험실에서 근무하면서도 비정규직이라는 이유로 불만의 목소리조차 숨죽여야 하는 비굴한 처지…..혹시라도 눈 밖에 나서 재계약을 해주지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에 위험수당도 없는 곳에서 창문을 여닫는 청도의 환기에만 매달려 9년 세월을 보내고 있는 아줌마의 처지가 처량하기만 하다.
그 숱한 세월 동안 차곡차곡 쌓인 실망과 배신감 때문에 비정규직 철폐 집회에도 동참하여 울분을 토한 적도 있었고, 부산 한진중공업 85호 크레인에서 일방적 정리해고 철회를 요구하며 농성하는 분을 지지하는 희망버스에 몸을 실은 적도 있었다. 누구의 문제가 아닌 바로 내 문제였고 내 아이들이 살아가야 하는 대한민국의 미래에 희망을 부여하고 싶었던 몸부림이었다. 그럴 때마다 들려오는 이야기는 기간제근로자는 책임감도 없고 시간만 때우다 퇴근한다는 이야기, 복지포인트, 명절휴가비, 사대보험…. 노력한 것보다 시대와 시기를 잘 만나 혜택을 누린다는 이야기,공무원이 되기 위해 누군 열심히 공부해서 시험에 합격했는데 비정규직 너희는 뭔데 혜택이나 대우를 똑같이 받으려 한다는 비아냥이었다.
그간 억울하게 들은 이야기가 10여 년이니 나의 직장생활이 아마 15년이 되고 20년이 되더라도 여전히 고용불안에 떨고 있는 어떤 아줌마일 것이다. 9년을 같은 업무를 해왔지만 엊그제 갓 입사한 직원과 같은 대우와 보수를 받으며 언제든 정리 대상이 될 수 있다는 힘없는 약자로 살아갈 것이다. 관계 기관이나 지자체에 비정규직 기간제근로자 무기 계약직 전환에 대해 또 항의해 보겠지만 돌아오는 답변은 9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총액인건비제도라는 구실일 것이다. 우리도 노력하고 있지만 그 제도에 갇혀 기간제근로자 무기계약 전환은 어렵다는 답변을 앵무새처럼 되풀이할 것이다.
제로섬 게임에 약자를 밀어 넣는 핑곗거리가 총액인건비제이다. 내가 더 받는 만큼 남이 덜 받는데 거기에 무슨 상생의 정신이 있고 양보의 미덕이 있겠는가? 어떻게 관문을 뚫고 입사한 공무원과 똑같은 혜택을 받고자 하겠는가? 솔직히 말해서 어려운 관문을 뚫은 공무원이 되신 분들이 하기에는 자존심 상한 일 대신 해주는 것이 우리네 비정규직 기간제근로자가 아니던가? 필요에 의해 기간제근로자를 채용했으면 낮은 임금과 열악한 근무조건, 고용불안과 심각한 차별에 대해서 외면할 것이 아니라 함께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함께 살아가는 사회란 사람 간의 균형을 찾는 일이다. 내 것을 덜어 나누지는 못할망정 누리지 못하는 사람의 형편에 관심이라도 가져야 세상의 균형을 이루는 일이 아닐까.
찰칵, 찰칵, 악몽 같은 계약 만료기일인 12월이 쉬지 않고 다가온다. 상시 지속적인 업무를 맡고 있는 기간제근로자는 퇴직금을 받을 수 있게 23개월 근무할 수 있게 한다는 올 초 시 관계자의 지역 신문 기사 내용에 그나마 위안을 삼고 있었지만 막상 그 시점에 다가오니 또다시 심장병을 앓는 사람처럼 울렁증이 인다. 배운 일이 도둑질이라는 속담처럼 실험실에 근무한 한 아줌마의 9년 경력으로 새로운 일을 찾는다는 것이 쉬울 것 같지도 않다. 남들처럼 노후대책은커녕 통장 잔고는 월급날 하루만 배부르고 나머지 29일은 꼬르륵 소리를 낸다. 학교 대신 갓 사회인이 된 두 딸에게 짐이 되기 싫어 이제부터라도 몇 만 원짜리 노후보험이라도 들어보려고 야간에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지만 재계약 생각 때문에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갈수록 나이는 들어가고 불어날 줄 모르는 빈껍데기 통장을 들척이다보면 나 같은 사람만 있으면 은행도 굶어 죽겠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곧 대통령 선거일이다. 그들은 또 비정규직 근로자들의 정규직 전환을 약속하기만 하고 힘 없는 약자들의 표만 받아갈 것 같다.
올 초 재계약 과정에서 있었던 서럽고 비참한 채용과정에 대해 차마 글로 옮길 수 없는 힘없는 약자 비정규직 근로자이다. 계약 기간이 끝나는 12월 이후 재채용이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난 비겁한 근로자이다.
*이 글의 원제는 <아줌마로 시작한 비정규직 9년 세월>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