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 ‘잘 지내세요?’는 센터 회원님을 만나 어떤 일을 하는지 알아보고, 센터와의 인연, 비정규 노동 운동에 대한 생각을 듣는 꼭지다. 얼굴에 장난기가 살짝 묻은 한 신사가 격월간 《비정규노동》 회원 인터뷰를 위해 센터를 찾았다. 오랜 시간 말과 글에 둘러싸여 살아와서 그랬을까, 아니면 본인의 학창 시절을 떠올리는 게 즐거워서였을까, 인터뷰는 물 흐르듯이 진행됐다. 서른여섯 번째 주인공 조돈문 센터 대표의 말을 들어보자.
범생이와 문제아 사이
Q 어릴 때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몇몇 분들에게 이것만은 꼭 물어봐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학창시절, 어떻게 데모를 하게 되었나요?
A 아, 데모요? (웃음) 전 강릉에서 자랐습니다. 작은 도시였지요. 친구들과 같은 초·중·고등학교를 나왔어요. 제 주변에는 다양한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잘사는 놈에서부터 못사는 놈, 범생이, 문제아, 폭력조직원까지. 저는 조금 놀았습니다. 또 춤을 잘 췄지요. 무단결근을 했다가 무기정학도 받았고요. 예비고사 원서를 쓸 때가 되어 무기정학이 해제되었어요. 학교에서 급우 세 명에게 예비고사 원서를 써주지 않았다는 거예요. 성적이 나쁘다는 이유로요. 납득할 수 없었습니다. 성적이 나쁜 게 학생만의 책임입니까? 가르친 사람의 책임도 있지 않겠어요? 이런 불만으로 데모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데모를 어떻게 하는지 몰랐어요. 일단 수업을 들으면 안 될 것 같더군요. 학교 정문은 선생들이 지키니까 담을 타서 도망갔습니다.
Q 몇 명 정도 도망갔나요?
A 반 학생들 전부 다요. 우리는 학교에 여러 가지 요구를 했습니다. 원서를 다 쓰게 해라, 학급비를 투명하게 사용하고 사용 내역을 공개해라, 두발 자유화해라. 학교는 못하겠다고 버텼습니다. 그래서 다른 반 애들까지 끌어들이고, 요구조건을 키웠어요. 이제 우리는 예비고사 제도 자체를 반대한다, 이렇게요. 사태가 계속 커지니까 학교에서 양보를 하더군요. 데모에 대해 책임을 묻지 않고, 원서도 전원 써주기로 했고요. 그래서 수업에 복귀했습니다. 그런데 원서를 쓰고 나니 주동자인 저를 포함해 네 명을 무기정학 시켰어요.
장래희망 : 데모하는 중
Q 파란만장한 고등학교 시절을 보냈네요. 그러면 대학은 어떻게 간 건가요?
A 재수를 했습니다. 당시 저는 판검사 되는 걸 목표로 공부했어요. 재수생활이 지겹고 재미가 없더라고요. 반복학습이잖아요. 그래서 법 공부를 미리하자는 생각으로 헌법 책을 읽었습니다. 그런데 재수를 하던 해 10월, 유신이 터졌어요. 광화문에 있는 학원에 가는데 국회의사당(현재 서울시의회) 앞에 탱크가 깔려있더군요. 하루아침에 헌법이 뭉개지고 새롭게 만들어지는 걸 본 겁니다. 게다가 유신헌법을 만든 자들을 보니 죄다 헌법학자였습니다. 제가 열심히 공부하던 책을 쓴 저자들도 있었고요. 그래서 법대에 가지 않기로 다짐했습니다.
Q 그러면 중이 되기로 한 이유는 뭔가요? 이것도 꼭 물어봐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A 당시 연좌제가 많았어요. 외가 쪽도 좌익 운동을 하다가 일가족이 변을 당했습니다. 아버지는 절대 데모를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죠. 데모하면 호적을 파겠다고 하면서요. 가족에게 피해를 줄 수 있으니 걱정이 많으셨어요. 그런데 중이 되면 호적이 저절로 파이잖아요. 그러면 데모를 해도 가족에게 피해도 안 주고. 그래서 중이 되기로 결심했어요.
Q 하지만 실제로 중이 되지는 않으셨죠.
A 대학에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가 암 선고를 받았어요. 진도가 꽤나 나간 상태였습니다. 다행히 의사를 잘 만나서 치유가 되긴 하셨어요. 제가 대학을 졸업한 뒤에 돌아가셨죠. 어머니가 많이 아프시니 당장 중이 되는 건 미뤘지요. 아버지는 데모를 하지 말라고 계속 경고도 했습니다. 제 데모 경력 때문에 여동생이 고등학교를 입학하는데 문제가 생기기도 했거든요. 무엇보다도 데모를 한다고 해도 앞장서거나 조직을 만들지 말라는 어머니의 부탁이 있었어요. 그런 이유로 중이 되는 건 계속 미뤄졌는데, 그러다 끝난 거죠.
몸으로 배운 계급의식
Q 어쩔 수 없이 대학시절을 조용히 보내셨네요. 그러면 어떻게 대학원에 진학해 사회학을 공부하고 노동운동에 뛰어들게 되었나요?
A 앞서 말했듯이 저는 강릉이라는 소도시에 살았습니다. 그래서 계급불평등을 몸으로 느낄 기회가 많았어요. 몇 가지 예를 들어볼게요. 먼저 가정형편에 따라 선생이 학생을 차별하더라고요. 잘사는 친구 집에는 가정방문을 자주 가고, 그렇지 않은 친구 집에는 가지도 않고. 성실하고 착한 친구였는데 말이에요. 법도 공평하지 않았습니다. 한 친구가 흉기를 써서 사람을 크게 다치게 한 적이 있어요. 그런데 집행유예를 받았습니다. 아무 짓도 하지 않고 단지 그 친구와 함께 어울렸던 친구는 감옥에 갔고요. 흉기를 휘두른 친구는 집에 돈이 있어서 비싼 변호사를 썼고, 감옥에 간 친구는 가난했거든요. 그리고 친구들과 닭서리를 한 뒤 주인집에 꼬리가 잡혔는데, 친구네 집안이 그 지역 유지였어요. 덕분에 고발이나 징계 같은 것 없이 그냥 무사히 넘어가게 되더라고요.
Q 불합리한 일들이 정말 많았네요.
A 맞아요. 여러 친구들의 생애사, 가족사를 다 압니다. 이게 다 연구 자료에요. 선생이 학생을 불공정하게 대하고, 세상이 불평등하다는 것을 몸으로 깨쳤죠. 세상이 맘에 참 안 들더라고요. 사고를 치면서도 세상이 더 크게 잘못됐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어요. 그 결과 공부를 하면서 노동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게 되었습니다.
Q 일반적인 경우와는 많이 다르네요.
A 그렇죠. 보통 사회과학 서적, 마르크스 책을 읽고 감명 받은 뒤 계급론자가 되는데, 전 그렇지 않았어요. 계급 사회, 불평등이 세습되는 사회를 두 눈으로 똑똑히 보면서 자랐으니까요.
학자 VS 노동운동가
Q 몸으로 배운 계급의식을 바탕으로 사회학을 공부하고 노동운동에도 참여하셨습니다. 혹시 학자와 노동운동가라는 정체성이 서로 충돌하지는 않았나요?
A 노동계급에 대해 연구하다 보니, 노동계급을 위해 실천을 하지 않으면 창녀촌 포주와 뭐가 다르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노동자들의 고통에 공감하고 연대하지 않은 채 그저 연구만 한다면 그들의 고통을 팔아서 사는 것과 다를 바 없잖아요. 노동 연구를 위해 노동운동에 참여하다보면 다음에는 운동적 실천이 연구를 끌고 가게 됩니다. 상호보완적인 거죠. 하지만 연구와 운동을 함께하다보면 상충되는 점이 있어요. 비정규 운동, 민주노총, 전체 민주운동에 대해 발언할 때 강하게 제 의견을 말하고 비판하기 힘들었습니다. 최근 경사노위 문제도 할 말이 많았는데 삼켰어요. 아무래도 센터 대표로 있다 보니까. 그리고 노동운동에도 여러 역할이 있는데 그 역할들끼리 상충될 때가 있어요. 대우자동차 투쟁할 때 자문단을 조직하고 단장 역을 수행하게 됐어요. 동시에 민주노총 발전전략위원회 이념·전략팀 팀장도 맡고 있었습니다. 그 팀에서 민주노동운동 발전 전략을 쓰면서 사회주의를 지향한 소유권 개입을 제시했어요. 그때 대우자동차 해외 매각을 지지하는 자들이 우리 팀의 논의 내용을 악용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졌고요. 해외 매각을 지지하는 쪽에서 조돈문이 사회주의 전환을 위해 대우자동차를 국유화시키려고 한다, 라고 주장한 겁니다. 이렇게 노동운동을 하다보면 상충되는 지점이 생겨요.
Q 아무래도 운동을 하다보면 학자로서 자유롭게 비판하기 힘들겠네요.
A 그렇다고 볼 수 있죠.
위기 속에서 맡은 센터 대표
Q 센터, 노동운동 이야기가 마침 나왔으니 묻겠습니다. 센터와는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되었나요?
A 2006년 대표 이사를 해보겠냐는 제안을 처음 받았어요. 당시 김성희 소장이 있을 때였습니다. 그런데 이견이 조금 있어서 수락하지 않았어요. 2008년에 또 제안을 하더라고요. 계속해서 거절하기 힘들었습니다. 제가 노동계급과 비정규직 문제를 연구하는 학자잖아요. 그리고 김성희 소장과는 개인적인 인연도 있었고요. 오랫동안 산업노동학회에서 함께 활동했고, 민주노동운동을 지원하거나 책을 만들 때 부탁도 많이 했어요. 민주노동당 조직 진단할 때도 함께 했고요. 김성희 소장은 진보적인 시각, 노동운동에 대한 관심, 활동성, 연구역량 등을 포괄적으로 고려해서 저에게 대표직을 제안했을 거예요.
Q 센터에서 기억에 남는 일은 어떤 게 있을까요?
A 아무래도 어렵고 힘들 때가 기억에 남겠죠? 2008년에 민주노동당이 분당됐습니다. 분당 이후 이사회 총회를 거쳐 내가 이사장이 되었어요. 보통 총회를 하면 1시간 정도면 끝납니다. 그런데 그때는 7시간 정도 했습니다. 민주노동당이 분당하면서 정파들 간 불신과 갈등이 극대화된 탓이었지요. 그 내홍을 극복하는 게 첫 과제였죠. 또 다른 과제는 센터 정상화였습니다. 2009년에 센터 빚이 1억 원이 넘었어요. 구조조정 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김성희 소장은 구조조정을 완료하고 물러나겠다고 말했어요. 저는 후임으로 현재 소장인 이남신을 추천했습니다. 그런데 이사진의 반대가 엄청났어요. 하지만 끝까지 이남신 소장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이사회 당일 단단히 각오하고 갔는데, 막상 이사회가 열리니 별 반대가 없더라고요. 그래서 무사히 끝났어요. 의지가 분명한 저를 뚫기 어렵다고 판단했는지도 모르지요. 이때 내가 민주적인 리더인지 의문이 들긴 했어요. 다들 반대하는데 혼자 밀어붙였으니까요. 하지만 결과적으로 봤을 때 제 판단이 옳았다고 생각합니다. 힘들었던 시기를 극복하고 센터를 정상화했거든요.
센터의 미래 그리고 상근자
Q 센터 대표로 있으면서 큰 고비를 넘겼네요. 앞으로 센터는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까요?
A 센터는 비정규 운동의 한 부분입니다. 또 비정규 운동은 민주노동운동의 한 부분이고요. 그렇기 때문에 센터만 따로 떼어놓고 나아갈 방향을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노동계급의 계급 형성 관점에서 바라봐야 해요. 비정규 운동은 단기적인 성과에 연연해하지 말고 중장기적인 목표와 전략에 충실할 필요가 있어요. 저는 그걸 성공 과제와 생존 과제로 나누어서 봅니다. 일시적인 성과인 성공 과제에 집착하지 말고, 조직을 존속시키며 강화하는 길, 즉 생존 과제를 우선시해야지요. 조직이 살아야 운동도 삽니다. 운동이 강화되면 지난번에 하지 못한 성과를 다음에 낼 수도 있는 것이지요. 즉, 비정규센터는 두 운동 내에서 중장기적인 목표와 전략을 고민해야 합니다.
Q 마지막으로 센터 상근자들에게 한마디 해주세요.
A 예전과 비교하면 지금 센터는 재정적으로도 안정화되었고, 《비정규노동》 발간도 정상화되었어요. 그리고 센터의 사회적 역할과 위상은 상근자 수에 비하면 훨씬 크고 중요해요. 물론 센터가 100퍼센트 완벽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분명 잘 해나가고 있어요. 이런 결과는 센터 상근자들, 촘촘한 인간관계의 승리라고 생각합니다. 이남신 소장을 중심으로 의기투합해 훌륭한 팀워크를 이뤄준 것에 대해 고맙게 생각합니다. 일을 하다보면 어느 시점에 일이 몰릴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최근에 최저임금위원회와 경사노위 문제가 동시에 터졌지요. 그럴 때 육체적으로도 바쁘지만 정신적으로도 스트레스를 크게 받아요. 다들 건강을 잘 챙기기 바랍니다. 특히 소장부터요. 마지막으로 센터가 안정화되어 나아가고 있는 것에 대해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을 전합니다.
_ 인터뷰 진행·정리 배병길 센터 상임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