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노동뉴스 칼럼]
게으를 수 있는 권리
이남신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상임활동가 (2018. 9. 6)
▲ 이남신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상임활동가 |
8월부터 안식월 휴가를 즐기고 있습니다. 아직은 사무실을 오가기도 하지만 쉼의 가치를 온몸으로 느끼고 있습니다. 건강이 좋지 않았던 터라 단식과 생·채식으로 홀대해 온 몸도 간만에 보살피고 보고 싶은 동지들도 일 없이 여유 있게 만나며 관계의 질이 높아지는 알찬 경험도 쌓아 가는 중이지요. 쉬면서 평소 바쁜 일상 속에서 지나쳐 왔던 문제들을 깊이 생각해 보게 됩니다. 노동시간단축, 저녁이 있는 삶, 워라밸. 노동운동은 무엇보다 노동시간단축의 역사라고들 하는데 현재 노동운동과 노동자들의 처지는 더욱 불안하고 전망도 어둡습니다. 2018년 한국, 지금 여기 노동자들을 속박하고 있는 강력한 주문에 대해 돌아보게 됩니다. 뱃사람들을 유혹해 난파시켰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마녀인 세이렌의 아름다운 노랫소리처럼 노동자들을 홀리는 강력한 ‘일하라!’ 주문 말입니다.
< 게으를 수 있는 권리>. 마르크스의 사위인 폴 라파르그가 쓴 책 제목입니다. 노동중독증이 알콜중독이나 마약중독보다 더 심각하다는 예리한 통찰을 읽으며 깜짝 놀란 기억이 새롭습니다.
노동자들이 일자리에 매여서는 대안사회를 제대로 일궈 가기 어렵다는 따끔한 일침을 주기도 하지요. “무노동 무임금을 자본가의 아가리에!” 노동가요의 한 구절로 한때 참 많이 외쳤던 투쟁 구호입니다. 노동하느냐와 상관없이 적정 생존을 보장하는 기본소득이 논의되는 새로운 자본주의 국면이 열리면서 낡은 구호가 됐습니다. 근본적인 문제의식을 화두로 쥐고 우리 일상의 도처에서 암약하고 있는 자본의 포섭과 강압을 벗어나지 않고선 다른 사회, 노동이 존중받는 공동체는 불가능합니다.
예전 민주노조운동의 목표가 노동해방이었는데, 비정규직 정규직화와 일자리 차지하기에 매몰되고 있는 노동운동의 현주소를 돌아보면 착잡한 심정입니다. 평생 한 사람의 사용자에게 전속돼 전일제로 일하는 정규직 개념은 따지고 보면 전형적인 임금노예죠. 비정규직 정규직화는 투쟁 요구로서야 당연하고 쟁취해야 하지만 노동자가 주인 되는 사회라는 목표 기준으로 보면 노동해방 문제의식 수준으로 올라서야 바람직합니다. 비정규직운동도 정규직 되기에서 한 차원 높은 운동 목표를 재정립해야 하겠지요. 운동 주체가 참신하고 선진적으로 바뀌지 않고선 세상은 늘 제자리걸음이기 일쑤니까요. 물론 ‘모 아니면 도’ 식 근본주의는 극복해야 하지만 현안 해결에만 치우친 노동운동도 대안을 제시하긴 어렵지요. 노동자와 노동운동이 자본주의 이후 대안사회를 만들어 가는 주역이 되려면 깊이 성찰하며 멀리 내다보는 시야와 내공이 절실한 때입니다.
세이렌이 활동하는 지역에 이르면 밀랍으로 선원들의 귀를 틀어막아 그 위험을 벗어나도록 했다고 하는데요. 노동운동이 우선 그 밀랍이 돼야 하지 않을까요. 들어도 홀리지 않는 노랫소리로 바꿀 수 있다면 더욱 좋겠지요. 최대이윤에만 혈안이 된 자본의 위세가 초법적으로 관철되고 있는 재벌 중심 사회경제구조를 근본적으로 뒤바꾸지 않고선 어렵겠지요. 현안에만 매여서도 어렵겠지요. 세상사에서 한발 떨어져 멀리 내다보며 깊이 숙고해야겠지요. 다중지성의 힘도 필요하겠지요. 그러려면 여유가 있어야 하고 짬을 낼 수 있어야 합니다, 쉴 땐 쉬어야 하죠. 그래야 자기계발과 건강 단련도 가능합니다. 술 한 잔도 좋지만 책도 읽고 자신의 삶을 반추하며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는 자세가 필요하겠지요. 삶은 고단하지만 조급하지 않게 찬찬히 자신과 세상을 조망하며 미래를 선취하는 노동운동이 되려면 노동의 일상에서부터 변화가 일어나야 하겠지요.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을 응징한 촛불들처럼요. 어디서나 누구나 혁명의 시대니까요.
쉰다는 것. 운동 가치의 올바른 정립을 위해서도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게을러도 되는 사회. 게을러서 더 창의적인 사상과 아이디어가 샘솟는 사회. 노동자들을 노동 감옥에 가둬 놓고 두 발에 족쇄를 채우고 옥좨 온 자본주의의 ‘일하라!’ 주문을 뒤집을 수 있는 ‘쉬어라!’ 노래가 흘러넘치는 사회는 언제나 가능할까요. 노동자들의 해방구로 한국 사회가 거듭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바람을 이루기 위해서라도 일단은 잘 쉬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