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진보정당운동에 길을 묻다
오늘날 한국에서 진보적인 대의정치를 대표하는 것은 ‘민주노동당→통합진보당’이다. 지난 총선에서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 탈당파, 국민참여당이 통합한 통합진보당은 13%를 득표하면서 13석을 얻어냈다. 그러나 총선 이후, 통합진보당 안에서 제기된 총체적인 부정, 부실한 당내 선거와 이후 전개된 당권파 대 비당권파의 대립은 ‘통합진보당’의 파산뿐만 아니라 진보정치 전체에 대한 대중적 환멸의 확산과 함께 한국진보정당운동 자체의 공멸이라는 위기를 가져왔다. 이에 "진보평론"은 진보신당(김종철), 사회주의 노동자정당 공동실천위원회(박성인), 사회진보연대(이현대), 새로운 노동정치를 위한 제안자모임(정종권)에서 활동하는 4인과 진보적 지식인 1인(이창언)에게 작금의 현안과 관련된 12개의 질문을 주고 이를 중심으로 ‘한국의 진보정당운동에 길을 묻다’라는 특집을 구성하였다.
이번 특집 글은 지난 총선 평가와 함께 이후 대선 전망까지를 포함하여 한국진보정당과 진보정치에 대한 견해들을 담고 있다. 그러나 이 글들 속에서 한국의 진보정당 또는 진보정치운동의 현재와 그들 사이에 부재하는 소통을 볼 수 있다. 이들은 대체로 지난 총선과 현재의 국면에서 가장 큰 문제로 ‘노동정치의 실종’을 지적하면서 ‘독자적인 노동정치로서 진보정치’를 내세우고 있다. 하지만 이들이 생각하는 ‘노동정치’와 이에 따른 ‘전략의 상’은 서로 매우 다르다. 이들을 관통하는 코드는 ‘선거’, ‘의회’, ‘정당’이며 이들 사이의 관계를 갈라놓는 구획선은 오늘날의 지평에서 볼 때, 제도의 ‘안’과 ‘밖’이다.
제도 ‘안’은 지금의 선거-의회 공간 속에서 집권을 목표로 하는 제도 안의 ‘정당’을 만들고자 하며 국가를 이용하여 노동의 정치를 만들고자 한다. 민주노동당→통합진보당, 진보신당 등은 이를 대표하며 의회-선거 공간에서의 정치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면서 대중을 대의제적 정치의 주체로 만들고자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제도 ‘밖’은 1인 1표로 재현되는 대의제적인 정치가 가지고 있는 국가 안으로의 포획과 체제내화를 비판하면서 이들의 집권전략을 ‘의회주의’라고 하며 현장과 투쟁, 대중 자신의 주체화 전략을 추구한다. 따라서 이 둘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간극이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 두 개의 극이 현실 정치에서는 명료하게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만일 이 두 개의 극이 현실정치에서 작동한다면 문제는 간단할 수 있다. 그러나 좌파정치는 이 둘의 한 극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항상 이 두 개의 극 사이에 다양하게 존재한다. 이 두 개의 극 중 어느 한쪽만을 주장하는 운동은 있을 수 없다. 또한 좌파정치는 의회-제도를 완전히 부정하고 그 밖에 존재할 수도 없으며 그렇다고 의회-제도가 가지고 있는 포획과 체제내화의 경향을 완전히 부정할 수도 없다. 그러나 독자들은 이번 특집 글에서 어느 한쪽을 끊임없이 밀쳐내려고 하는 어떤 경향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서로를 부정하면서 끊임없이 상대를 향해 날카로운 비판의 칼날을 들이대는 바로 이것이다. 이렇게 서로에 대한 부정적 몸짓과 목소리로 침몰하는 배를 구할 수 없다. 배에 타고 있는 구성원들의 차이가 있지만 한 곳을 바라보며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 공통의 정치적 의지를 가진 실천적 주체를 만들어내는 정치가 필요하다. 거기에 필요한 것이 ‘공통의 프레임’을 창출하고 ‘집합적 권력의지’를 생산하면서 반자본의 대중적 열망을 새로운 미래 창출의 ‘희망’과 연결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 한국의 진보운동은 여전히 부정적 몸짓과 비판, 낡은 정치적 폭로에 머물고 있다.
이로 인해 공통의 프레임을 생산하는 것을, 자기 긍정적인 내용의 생산과 희망의 창출을 가로막게 된다. 한국좌파의, 정파운동의 폐해는 이것이다. 여러 필자가 주장하듯이 ‘정파’는 있을 수 있으며 ‘정파’가 살아있을 때 정치운동은 풍성해질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정파가 자신의 정치적 전망과 내용의 생산을 통해서 형성된 것이 아니라 다른 정파들에 대한 부정적 몸짓으로 자신들을 묶는 것이 되어버릴 때, 정치운동은 ‘낡은 것’으로 퇴행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오늘날 한국의 좌파정치운동이 보여주는 ‘부정적 몸짓의 과잉과 긍정적 내용의 빈곤’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비판은 예리하면서도 단호하다. 하지만 ‘좌파진보진영이 제기해야 할 새로운 통일의 패러다임’이나 ‘좌파진보운동 전체가 바꾸어야 할 문화’, ‘새로운 프레임의 내용’, ‘진보좌파운동의 단기적·중장기적 과제’ 등, 정작 일보 전진을 위해 공통적으로 생산해야 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명료하지도 정확하지도 않다. 이는 몇몇 사람의 탓은 아닐 것이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한국의 좌파정치운동이 강령이나 정책 프로그램, 정치적 로드맵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도 아니다.
누가 어떤 정책이나 강령 내용들을 제시한다고 하더라도 서로가 그것을 비판할 뿐, 그것들을 연결해가면서 공통의 내용을 생산하는 소통으로 바꾸지 않는다. 따라서 이창언은 “새로운 진보좌파정당 건설을 위한 토론 시안”을 제출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진보의 재구성 또는 새로운 진보좌파진보정당 건설에 앞서 ‘위기론의 타자화’ 극복과 ‘위기의 복합성’에 대한 인식전환이 필요하다. 즉 진보적 성찰성에 기초한 혁신이 전제되어야 한다. 통진당의 오류, 한계를 반면교사로 삼되, 그들만의 문제로 환원시키지 말아야 하며 진보좌파의 실패에 대한 엄밀한 평가와 반성이 동시에 이뤄져야 한다. 그것은 도덕성 회복 등 내부 혁신과 통합적 리더십 구축과 같은 수준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진보좌파적 가치와 정체성을 세워나가는 과정이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한국좌파운동의 공통성을 생산할 수 있는 ‘소통’이 필요하다. 또한 ‘인식의 전환’과 ‘태도의 전환’이 있어야하고 상대에 대한 부정적 몸짓과 비판의 ‘정치’에서 벗어나야 한다. 비판의 예리한 칼날을 자신에게로 돌려야 하며 자기 자신을 대상화하고 성찰해야 한다. 이것은 현재 한국의 좌파정치운동의 난맥상이 그 누구의 책임이 아니라 좌파 전체의 책무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진보정치의 위기는 권위주의 정권하에서 전개된 운동의 내재적 위기, 즉 권위주의 시기 운동의 한 주기를 끝내고, 민주화 이후에 나타나는 새로운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특히 새로운 사회운동의 주기(포스트모더니즘의 등장과 신세대 논쟁, 소비문화의 확산, 신자유주의적 프레임이 전면적으로 수용된, 민주주의를 표방했던 민주정부에 대한 실망과 회의로 나타났으며 자연스럽게 민주주의 담론, 민주주의운동에 대한 회의와 도전이 나타나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함으로써 심화된 위기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무엇보다도 한국의 좌파정치운동은 ‘대화와 토론, 논쟁’을 가장한 ‘자기 안에서의 대화’, ‘독백’을 벗어나야 한다.
바로 이런 자기에 대한 철저한 비판과 성찰에 기초한 태도의 변환은 자기가 가진 한계에 기초하여 다른 정치집단과 함께 정치적 겜을 만들어가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정치’가 되어야 한다. 본질적으로 좌파정치는 대중의 변혁적 열망을 집단적 정치권력의 힘으로 바꾸어가면서 자본-임노동이라는 시스템 자체를 파괴하고자 한다. 따라서 그것은 끊임없이 다른 정치집단과의 관계 맺기를 통해서 미래사회의 공통성을 창출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노동의 정치’를 말하고 ‘노동자계급운동’을 말한다고 그것이 정말로 노동자계급의 정치, ‘노동의 정치’가 되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 한국좌파정치운동단체들이 이야기하는 ‘노동의 정치’는 좌파의 정치라고 할 수 없다.
1980년대 좌파운동보다 오늘날 좌파운동이 가지고 있는 퇴행성은, 과거의 운동이 오히려 노동자와 노동자계급을 구분하고 ‘사회민주주의적 정치’를 고수하고자 했다는 점에 있다. 노동자는 자기 모순적이며 정신분열증자이다. 한편으로 자본에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해야 하는 임노동자이면서도 자본이 임노동을 상품으로 구매할 때 배제하는 노동력이라는 상품을 가진 자라는 점에 있다. 여기서 노동은 자본이 임노동이라는 상품으로 포획할 때 배제할 수밖에 없는, 자본의 외부이자 자본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모순 속에 ‘좌파의 정치’의 고유성이 있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의 좌파정치운동은 노동의 정치를 말하면서 실상은 ‘노동조합의 정치’라는 임노동자의 정치를 수행하고 있다.
이번 특집 글에서 보듯이 필자들은 ‘민주노총’을 질책하고 있다. 그러나 ‘민주노총’은 본래가 임노동자의 생존권과 이익을 위해 싸우는 ‘조합’일 뿐이다. 따라서 그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특정한 정당을 지지하고 조합원의 이익을 위해 정당정치를 이용하는 것은 필연적이다. 민주노총은 정치조직이 아니다. 그것은 자본주의 안에서 자본-임노동의 교환시스템이 만들어낸 조직일 뿐이다. 따라서 문제는 민주노총이 아니라 바로 좌파정치를 수행하고 있는 좌파정치운동, 좌파정당운동에 있다. 그렇다면 좌파정당운동이 스스로 자신에게 물어야 할 것은 민주노총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임노동자를 ‘노동자’로 바꾸면서 변혁의 정치적 주체로 만들어내야 하는 자신들의 정치행위에 대한 것이어야 한다.
게다가 오늘날 세계자본주의 체제의 지배 시스템은 산업자본주의 시절의 노동과 자본처럼 명료한 적대의 선을 가지고 있지 않다. 물론 지금의 세계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이 보여주고 있는, ‘불안정성’과 ‘위기’는 자본의 주기적 위기를 넘어서 자본주의 시스템 자체의 한계를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자본은 그것을 어떤 식으로든 방어하기 위해 다양한 형태의 책략들을 구사하고 있다. 자본의 책략들은 점점 다가오는 임박한 파국의 징조들이 유발하는 공포로부터 벗어나려는 ‘자기이해’와 총자본의 ‘공통이해’ 사이를 반복하며 필사적으로 살아있는 노동 전체에 대항하는 전쟁을 수행하고 있다.
지젝이 말하지 않았던가?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역설이 진짜 우리가 처한 곤란이라는 것을. 그러나 한국에서의 노동정치, 진보정치는 이 ‘곤란’을 사유하지 않으며 적에 대한 ‘폭로’와 ‘분노’를 노동 자신의 ‘자기 연민’으로, 투쟁에 대한 헌신성을 정치적 올바름으로 바꾸어 놓고 있다. 그러나 100년 전에 이미 레닌은 소위 ‘노동자의 정치’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고도 단호하게 선언했다. 오늘날 사람들이 떠올리기를 두려워하는 명제, ‘외부로부터의 도입’이라는 테제에서 ‘외부’는 지식인도, 엘리트도 아니다. 거기에서 그가 가장 힘주어 말했던 것은 노동조합으로부터 ‘사회민주주의 정치’는 ‘자생적’으로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노동조합의 이름으로 표상하는 정치는 ‘임노동의 정치’이다. 그것은 임노동이 자본에 자신을 팔면서 겪을 수밖에 없는 힘의 불균형과 생존권의 위협, 그리고 자본에 대항하여 자신의 몸값을 올리는 정치이다. 노동법과 복지를 둘러싼 정치가 비록 국가권력이나 법제정과 같은 부르주아 정치의 차원으로 확장된다고 하더라도 근본적으로 노동의 정치는 아니다. 이는 자본과의 이해관계에 갇혀 있는 ‘노동조합의 정치’일 뿐이다. 반면 ‘사회민주주의 정치’는 임노동을 표상하는 정치가 아니라 임노동 그 자체를 파괴함으로써 자본을 파괴하고자 하는 정치이다. 따라서 그것이 표상하는 노동자는 자본에 의해 고통 받는 자로서의 노동자가 아니라 자기를 벗어나 ‘노동’이라는 인류 전체를 표상하면서, 자본에 묶여 있는 임노동자인 자신을 부정하고 ‘해방의 정치’를 수행하는 노동자이다.
물론 이것은 노동조합이 아무런 존재 가치나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노동조합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근본적인 의미와 가치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런 가치와 의미는 노동조합이 가지고 있는 자기 한계를 명확히 함으로써만 그것이 생산하는 오류를 피할 수 있다. 따라서 노동조합이 수행하는 정치와 좌파정치운동이 수행하는 정치는 질적으로 다르며 각자의 고유한 역할이 있다는 것을 명백히 할 때에만 ‘노동조합의 정치’가 마치 ‘해방의 정치’인 것처럼 자신을 속이는 것을 피할 수 있다.
‘당’은 사회민주주의 정치를 생산하는 주체 생산의 형식일 뿐이다. 노동조합은 조합원의 이익과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서 투쟁하는 내용을 생산하는 조직 형식이다. 반면 ‘당’은 조합원의 이익이 아니라 그것을 벗어나 때로는 자신에게 당장 손해가 되는 것이라 할지라도 인민 전체의 이익을 위해 싸우며 모든 피억압 인민의 투쟁을 연결시키고 집합적인 권력의 힘을 만들어내기 위한 투쟁의 내용을 생산하는 조직 형식이다. 따라서 레닌의 의미에서 ‘당’은 거기에서 수행하는 일상적인 활동 전체를 ‘해방의 정치’로, ‘사회민주주의 정치’로 바꾸어 놓는, 정치적 주체형성의 조직형식이다.
그렇다면 왜 그는 이런 강제적인 조직형식을 사유했던 것일까? 그것은 우리가 자본주의(자본-임노동의 교환체계와 상품물신성이라는 재현형식)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신체 안에는 이미 대의제라는 자본주의적 재현체제와 상품형식이 체화되어 있다. 따라서 그것을 벗어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그것은 ‘목숨을 건 도약’처럼 ‘자신과의 단절’이라는 폭력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이런 단절은 자본주의적인 아비투스가 일상적으로 체현되듯이 ‘단절’ 또한 이 일상 속에서 끊임없이, 지속적이고 반복적으로 이뤄져야 한다. 따라서 레닌이 당을 통해 제출한 ‘사회민주주의 정치’의 고유성은 바로 이와 같은 단절을 만들어내면서 임노동자로서의 노동자를 부정하는 형식 속에 있다.
그렇다고 오늘날 레닌이 만들었던 볼세비키당을 여기서 만들어야 한다는 의미로 이해해서는 곤란하다. 다만 핵심은 ‘외부’가 가지고 있는 의미와 그것을 통해서 제기하고 있는 좌파정치운동의 고유성이 무엇인가에 있다. 하지만 오늘날 ‘노동의 정치’는 이러한 고유성을 만들어 내는 자신과의 단절을 수행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단절 대신에 ‘노동’이라는 애매한 기표에 얽혀, 오히려 노동을 ‘임노동’으로, ‘주체가 져야 할 고독한 결단’을 인민에 대한 자기 연민으로 바꾸어 놓고 있다. 오히려 ‘노동자’를 유아(乳兒)로 바꾸어 놓고 자신을 ‘어머니’라는 욕망의 재현적 대체물로 바꾸어 놓을 뿐이다. 진정한 노동의 정치는 노동자 자신의 정치이다. 그렇게 하려면 노동자 자신이 임노동자로서 자신의 존재를 벗어나야 한다. 그것은 고통스런 자기 단련과 혹독한 자기비판, 자기에 대한 철저한 대상화를 필요로 한다.
하지만 한국의 좌파정치운동은 ‘노동의 정치’를 말하면서 이것을 사유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것이 생산할 수 있는 것은 임박한 파국, 자본의 폭력, 국가의 패악과 실정에 대한 폭로와 분노로, 진정한 노동의 정치를 대체하는, 사이비정치의 가장된 몸짓일 뿐이다. 제도와 반제도 사이에서 서로를 향해 쏟아지는 비판은 결코 자신을 향해 있지 않으며 자신의 한계를 사유하는 것으로 발전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만일 좌파정치운동의 고유한 자리가 바로 임노동자(정규직 노동자와 대의제)이면서 자본이 포획하기 위해 배제한 노동(실업-불안정노동자와 주권자)이라는 이 모순 속에 있다면 좌파정치는 제도와 반제도 둘 다의 차원에서 진행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제도와 반제도 각각의 한계를 먼저 인식해야 한다. 제도 안에서 이뤄지는 의회정치는 제도권 안에서 이뤄지는 정치의 한계를 인식해야 하며 반제도가 수행하는 정치와 어떻게 관계할 것인가를 사유해야 한다. 제도 밖에서 전복적 변혁주체의 형성을 모색하는 정치는 그것이 현실적인 국가 정책에 무력하다는 점을 인식하고 의회정치와 어떻게 관계할 것인가를 사유해야 한다. 그런데 현재 진행되고 있는 좌파정치는 의회정치를 논의하면서 ‘반제도’라는 칼날을 들이대고 반제도를 논하면서 ‘제도’라는 칼날을 들이대고 있다. 그것은 그 각각이 수행되고 있는 정치공간의 장점과 필요성을 버리는 결과를 낳을 뿐이다.
이번 특집 글들 모두가 동의하고 있듯이 현재의 국면은 진보정당운동의 한 순환이 끝나가고 있는, 새로운 순환을 시작해야 하는 시기이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우리는 이 새로운 순환을 어디에서 시작해야 할지에 대해서 동의하는 지점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에 우리는 먼저 부정적 몸짓 대신에 자신의 한계에 대한 성찰과 상호 ‘관계 맺기’라는 관점에서 이뤄지는 소통을 제안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것이 ‘제도 대 반제도’의 부정적 몸짓을 통한 이분법에 갇혀 있었던 기존의 진보정치운동을 끝내고 새로운 순환, 즉 제도 대 반제도의 이분법을 가로지르면서 사회 전체 차원에서 해방의 정치를 생산하는 ‘공통의 정치’로 나아가는 첫걸음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물론 이것이 결코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런 태도와 인식의 전환 없이 한국의 진보정치운동이 앞으로 나아가기는 어려울 것이다.
“진보좌파의 이념과 노선의 재구성은 진보적 성찰성에 기초하여 ‘운동의 급진적 상상력’과 ‘대중적 역동성의 접합’을 통한 민주적 경합공간의 창출로 이어져야 한다.”, “포스트민주화시대의 반제통일전선론 또는 그 아류인 반(反)박근혜 민주대연합이 아닌 적·녹·보 동맹을 기본으로 하되 급진적 노동-민생정치, 지역 풀뿌리 정치, 생활정치로의 급진적 변화와 대중적 역동성의 접합”의 시도이다. "진보평론"은 이번 기획을 통해서 이와 같은 토론이 공론화되기를 기대하면서 토론의 장을 열어 놓고자 한다.
이번 호 특집은 진보정당의 평가와 이후의 전망을 담아보고자 했다. 좋은 의미이든 아니든 진보정치운동과 진보정당운동의 현재 상태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글들이라고 생각한다. 발언대, 정세 등에서는 현재의 이슈에 대해 현장의 목소리를 담아냈으며, 일반논문들에서는 현재를 벗어나지 않는 이론적 쟁점을 담고 있다. 모두 필자들의 고민과 실천이 절절이 묻어나는 글들이지만 그 평가는 어디까지나 독자의 몫이다. 필자들과 독자들에게 다시 한번 감사드리며, 이번 호도 꼼꼼하게 따져 읽고 서슴없는 비판과 조언을 부탁드린다.
*목차*
특집 : 위기의 진보정당 운동, 진단과 향후 과제
- 4.11총선 이후 진보정치의 위기와 진보좌파의 과제/ 이창언
- 대안적 운동의 재건을 위한 ‘새로운 노동자 정치세력화 운동’/이현대
- 4.11총선 이후 진보정치의 위기와 진보좌파의 과제/ 김종철
- 노동 중심의 새 진보당, 독립적이고 대중적인 새 진보당을 만들자/ 정종권
- 노동자계급정당을 목표로 반자본 투쟁전선으로 결집하자/ 박성인
* 발언대
최저임금 인상이 아닌 생활임금 쟁취로 나아가야(임복남)
* 정 세
- 진보적 대학개혁을 위한 10대 정책적 과제(김세균)
- 낙태, 피임, 그 넌덜머리나는 전장의 이름으로 쓰는 편지(박이은실)
* 국제
미국 금융시장의 회복과 연준의 비관행적 통화정책(장시복)
*일반논문
- 기로에 선 한국의 시민사회운동: 환경운동연합을 중심으로(서영표)
- 아나키즘 철학의 운명과 정치 철학의 과제(박종성)
- 공산주의는 어디에?: 자크 비데의 Court traité des idéologies(2008)에 대한 연구노트(김덕민)
- 한국 비속어에 드러난 타자화와 권력 담론의 재생산(윤수연)
* 청년이론마당
국가와 폭력(김승환
* 서평
- 포스트맑스주의 고전 읽기(“헤게니와 사회주의 전략: 급진민주주의 정치를 향하여”)김정한
- 석유(“사람 냄새”, “먼지 없는 방”)김성일
*가격 : 15,000원/ 1년구독료 5만7원/ 2년11만/ 3년 16만원
매월 4,700원(계좌이체나 CMS 신청 가능)
*문의: 02) 2277-7950/ jbreview@hanmail.net/ FAX:02) 6008-5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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