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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얼마나 더 죽어야만 하는지, 민생을 외면하는 정부여당은 각성하라 ! -- 고(故) 김춘봉 님의 죽음을 애도하며 -
센터 성명 조회 수 6057 추천 수 0 2003.11.03 03:00:00얼마나 더 죽어야만 하는지, 민생을 외면하는 정부여당은 각성하라 !
- 고(故) 김춘봉 님의 죽음을 애도하며 -
“다시는 이러한 비정규직이 없어야 한다. 나 한 사람 죽음으로써 다른 사람이 잘 되면...비정규직이란 직업이 정말로 무섭다.”
2004년 한해가 가기 전, 24년간의 청춘을 생산현장에 다 바쳤던 한 노동자가 또 다시 비정규직의 절망 속에서 삶을 접었다. 한진중공업은 한 노동자를 20여년을 부려먹다 몸이 망가지자 온갖 회유와 협박으로 비정규직을 만들었고, 고용보장 약속마저 헌신짝처럼 내 던져버렸다. 이러한 자본의 횡포 앞에 한 가정을 책임져 나가야 하는 비정규 노동자에게는 절망뿐이었고 그 절망의 현실을 알리고자 죽음을 택하였다. 고(故) 이용석 열사와 박일수 열사의 분신에도 불구하고 권리보장 없는 비정규직의 확산을 불러올 파견 및 계약기간의 확대를 추진하였던 정부와 여당은 또 다시 고인의 죽음을 묵도하면서도 비정규 관련 법안의 개악을 계속 추진할 것인가 ?
죽음으로 이르는 길, 비정규 노동자의 현실
생산현장에서 목숨을 담보로 가장 위험한 작업을 도맡아 하는 비정규 노동자들의 삶, 정규직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임금으로 언제 끊길지 모르는 일자리에 삶을 의탁하여야 하는 그 가족들, 절망을 넘기 위한 단결권조차도 탄압받는 비정규 노동자의 현실, 이러한 것 자체가 죽음으로 이르는 길이지는 않은가? 세상의 무관심 속에 채 피어나지도 못하고 아사(餓死)라는 비극으로 우리 사회와의 인연을 다하였던 대구의 네 살 박이 어린아이의 아버지도 건설 일용공인 비정규 노동자였다.
과연 누굴 살리려 노동자들을 죽음으로 내 몰고 있는가 ?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만들기 위해 노동자의 양보가 얼마나 더 필요한 것인가 ? 이미 넘쳐버린 노동의 유연화, 이미 죽음의 문턱에선 비정규 노동자의 삶, 무엇을 더 양보할 수 있을까 ? 힘들더라도 일단 빵의 크기를 키워야 한다고 하는데, 그 빵의 크기를 키우기 위하여 20여년을 묵묵히 현장에서 피땀흘려온 노동자는 결국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더 이상의 양보는 바로 죽음이다. 누구를 위하여 노동자는
- 고(故) 김춘봉 님의 죽음을 애도하며 -
“다시는 이러한 비정규직이 없어야 한다. 나 한 사람 죽음으로써 다른 사람이 잘 되면...비정규직이란 직업이 정말로 무섭다.”
2004년 한해가 가기 전, 24년간의 청춘을 생산현장에 다 바쳤던 한 노동자가 또 다시 비정규직의 절망 속에서 삶을 접었다. 한진중공업은 한 노동자를 20여년을 부려먹다 몸이 망가지자 온갖 회유와 협박으로 비정규직을 만들었고, 고용보장 약속마저 헌신짝처럼 내 던져버렸다. 이러한 자본의 횡포 앞에 한 가정을 책임져 나가야 하는 비정규 노동자에게는 절망뿐이었고 그 절망의 현실을 알리고자 죽음을 택하였다. 고(故) 이용석 열사와 박일수 열사의 분신에도 불구하고 권리보장 없는 비정규직의 확산을 불러올 파견 및 계약기간의 확대를 추진하였던 정부와 여당은 또 다시 고인의 죽음을 묵도하면서도 비정규 관련 법안의 개악을 계속 추진할 것인가 ?
죽음으로 이르는 길, 비정규 노동자의 현실
생산현장에서 목숨을 담보로 가장 위험한 작업을 도맡아 하는 비정규 노동자들의 삶, 정규직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임금으로 언제 끊길지 모르는 일자리에 삶을 의탁하여야 하는 그 가족들, 절망을 넘기 위한 단결권조차도 탄압받는 비정규 노동자의 현실, 이러한 것 자체가 죽음으로 이르는 길이지는 않은가? 세상의 무관심 속에 채 피어나지도 못하고 아사(餓死)라는 비극으로 우리 사회와의 인연을 다하였던 대구의 네 살 박이 어린아이의 아버지도 건설 일용공인 비정규 노동자였다.
과연 누굴 살리려 노동자들을 죽음으로 내 몰고 있는가 ?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만들기 위해 노동자의 양보가 얼마나 더 필요한 것인가 ? 이미 넘쳐버린 노동의 유연화, 이미 죽음의 문턱에선 비정규 노동자의 삶, 무엇을 더 양보할 수 있을까 ? 힘들더라도 일단 빵의 크기를 키워야 한다고 하는데, 그 빵의 크기를 키우기 위하여 20여년을 묵묵히 현장에서 피땀흘려온 노동자는 결국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더 이상의 양보는 바로 죽음이다. 누구를 위하여 노동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