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위기 삭풍, 비정규직 여성에 더 혹독하게 몰아쳤다
[공정사회, 길을 묻다] <6> 취업현장의 주홍글씨
높아진 일자리 차별의 벽… 지난해 일자리 10만개 감소
노동유연화 부담 고스란히… 사회안전망 '사각' 내몰려
한국일보 2010년 9월 28일 김청환 기자
#4년제 대학을 졸업한 A(27ㆍ여)씨는 졸업 후 2년여동안 준비해 온 공무원시험을 포기한 뒤 일자리 찾기에 나섰다. 하지만 대부분의 회사는 여성을 원하지 않았고 여성을 찾는 경우엔 경력직을 선호했다. 결국 월 80만원 남짓한 최저임금을 받는 콜센터에 비정규직으로 입사할 수밖에 없었다. A씨는 "여성은, 더구나 경력이 없는 여성은 월 100만원 이상을 받을 수 있는 정규직 직장이 없다"고 말했다.
#30대 여성 B씨는 7년 전 대기업 고객지원실에 고졸 사무직 처우로 취직했다. 원래 전문대 졸이었던 B씨는 입사 후 4년제 야간대학에 편입학해 어렵사리 졸업장을 땄다. B씨는 회사 인사과에 정규직인 대졸 사무직으로 처우를 변경할 방법이 없는지 문의했지만 "원래 대졸 사무직에는 여사원을 잘 뽑지 않는다"고 일언지하에 거절당했다. 실제로 B씨가 다니는 회사의 대졸 사무직은 대부분 남성이고 사무보조를 주로 하는 고졸 비정규직은 모두 여성이다.
#대기업 마케팅부에서 비정규직으로 근무하다 최근 중소기업 정규직으로 이직을 결정한 30대 여성 C씨는 청천병력 같은 얘기를 들어야 했다. 이직 예정인 회사로부터 "부담스러우니 출산 후에 입사하라"는 통보를 받은 것. 회사에 임신 사실을 알린 뒤 연봉 협상을 마친 B씨는 "아직 배가 많이 부르지 않아 임신 얘기를 꺼내지 않을 수도 있었는데 솔직하게 말했다가 오히려 불이익을 받게 됐다"며 "비정규직인 남편의 월급으로는 생활이 빠듯한데 걱정"이라고 했다.
이제 여성은 정규직 채용은 꿈도 못 꾼 채 사회생활을 비정규직으로 시작할 수밖에 없다. 직장 내에서 비정규직 상승도 거의 불가능하다. 출산 등 이유로 정규직으로 다른 기업에 재취업하는 것 역시 쉽지 않다. 2008년 겪은 경제 위기의 부담이 비정규직 여성에게 집중되면서 낳은 결과다.
비정규직 여성에 대한 부담 전가
일자리는 1997년 외환 위기 때는 계층별로 균등하게 감소했다. 그러나 2008년 경제 위기 이후에는 양상이 달라졌다.
통계청의 '연도별 취업자 증감 추이'에 따르면 97년 외환 위기 다음 해인 98년에는 상용직(정규직) 임시직(비정규직) 일용직(비정규직)이 각각 전년 대비 74만8,000명, 19만4,000명, 16만6,000명 감소했다. 하지만 2008년 경제 위기 이듬 해인 2009년에는 상용직이 전년보다 38만3,000명 늘어난 반면, 비정규직은 13만6,000명이 감소(일용직 15만8,000명 감소ㆍ임시직 2만2,000명 증가)했다.
특히 여성의 비정규직화가 뚜렷했다.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민간 연구원)의 김수현 연구원이 4월 발표한 연구보고서 '비정규직의 개념과 경제 위기 이후의 비정규직'에 따르면 2009년 8월 현재 비정규직 가운데 여성이 차지는 비중은 53.5%. 경제 위기 이전인 2006년(51.6%)이나 2007년(51.2%)에 비해 많이 늘었다.
여성은 정규직 비정규직을 합친 전체 일자리 수를 봐도 이번 경제 위기에서 98년 외환 위기 때보다 더 극적으로 몰락했다. 한국노동사회연구소(민간 연구원)에 따르면 98년 남성과 여성의 일자리가 각각 64만개씩 똑같이 줄었으나 2009년에는 여성 일자리만 10만개 사라지고, 남성 일자리는 오히려 3만개 늘었다.
비정규직 개념 못 잡는 정부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는데도 정부는 차별 현상을 최대한 축소해 보이고 양적 취업률을 높이는 데만 열중하고 있다.
통계청과 고용노동부 등은 매달 한시적노동자 시간제노동자 비정형노동자 등만을 비정규직으로 잡은 집계와 분석을 발표하고 있다. 하지만 이 집계는 장기임시노동자 등을 포함하고 않아 여성 비율이 갈수록 늘고 있는 비정규직 규모를 제대로 규명하지 못하고 있다.
노동사회연구소 추정치에 따르면 2009년 임금근로자 중 비정규직 비중은 51.8%로 통계청 집계(34.9%)보다 17% 포인트 높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임시직(temporary worker)개념을 한국에 그대로 적용하고 있지만 OECD는 임시직을 비정규직의 개념으로 인식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미국 일본 이탈리아 등은 각자 자신들의 기준에 맞춰 비정규직을 파악하고 그 내용을 OECD에 보고하고 있다.
질 낮은 일자리를 양산해 취업률을 양적으로만 높이려는 시도도 문제다. 2009년 본격 증가한 공공근로와 청년인턴제는 단기간에 비정규직만 양산했을 뿐 질 좋은 일자리 창출에 거의 실효성이 없었다는 지적을 여러 차례 받아 왔다.
은수미 한국노동연구원(정부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물난리에 반지하주택만 피해를 입듯 노동유연화에 다른 경제 위기의 피해가 비정규직 여성에만 쏠리고 있다"며 "정규직에만 초점을 맞춰 설계된 고용보험을 개선하고, 소규모 사업장에 주로 근무하는 비정규직 여성을 포괄하는 고용보험 재설계를 비롯한 제2의 사회안전망 구축을 고민해야 할 때"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