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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인들의 삶은 그들의 무대나 작품만큼 화려하지 않다. 오히려 복지 혜택에서는 소외되고 있다. 많은 문화·예술인들은 시나리오 작가 최고은씨의 죽음이 남의 일이 아니라는 위기의식을 느끼고, 원로 연극배우 박정자씨가 “20년 전 뚜렷한 직업이 없어 신용카드를 발급받지 못했다”고 최근 밝힌 것처럼 늘 벼랑 끝에 선 것 같다는 데 공감하고 있다.
4년차 연극배우 민모(30)씨는 요즘 민사소송을 진행 중이다. 예전에 출연한 연극 두 편의 출연료를 못 받아서다. 액수는 700만원쯤 된다. 민씨는 “노동부에 문의했더니 ‘정식 직원이 아니기 때문에 구제해 줄 수 없다’는 답변을 들었다”면서 “이런 일을 겪으니 돈을 떠나 무대에 서겠다는 열의가 사라진다”고 토로했다. 해마다 두 세 작품에 꾸준히 출연했지만 그에게 남은 건 ‘하고 싶은 일을 한다’는 명분뿐이다. 생계를 유지하려고 연극 외에 촬영장 스태프, 무대·조명 스태프로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다. 민씨는 “경제적 자립이나 결혼 같은 건 다 미뤘다”고 씁쓸해했다.
연극과 뮤지컬을 오가며 7년째 배우로 살고 있는 박모(32·여)씨는 신용카드가 없다. 보험도 가입 안 했고 대출은 생각도 안 해봤다. ‘직장이 없는 무직 상태’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런데 얼마 전 당황스러운 일이 생겼다. 국민연금을 내라는 통지서를 받은 것이다. 작품 출연료를 받으면서 소득신고가 됐기 때문이다. 박씨는 “출연료가 괜찮은 작품을 하나 하면 반년 정도는 버틸 수 있다. 하지만 연금을 낼 수 있는 정도는 아니다”라고 말했다. 국민연금관리공단에 전화를 걸어 상황을 설명했더니 “불편하더라도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전화를 걸어 설명을 해줘야 한다”는 답변을 들었다. 그는 배우 이외의 삶을 살지도 모를 미래에 대비해 일본어를 공부 중이다. 그렇지만 연기를 포기하고 싶지는 않다. “이 일을 하면 가슴이 뛰어요. 너무 좋아하는 일이니까요. 이걸 그만두면서까지 하고 싶은 일을 찾지 못했어요.”
◇연극인 월급은 36만원=한국연극인복지재단이 2008년 전국에 있는 연극배우 1544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연극배우의 평균 임금은 월 36만원이었다. 1년에 평균 221일을 일하고 받는 돈이 모두 합쳐 434만원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나마 제때 받으면 다행이다. 돈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연극계에서는 특별하지 않을 정도로 자주 일어난다. 보수를 받지 못한 경험이 있는 배우가 60%에 달하고 금액도 평균 527만원으로 나타났다. 상황이 이러니 배우들은 어쩔 수 없이 ‘투잡’을 강요받는다. 연극배우의 62.4%는 연극 외의 경제활동을 하고 월 평균 65만원의 수입을 얻고 있었다.
급여뿐만 아니라 사회 안전망에서도 이들은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연극인들의 국민연금 가입률은 23.9%, 고용보험 가입률은 15.3%, 산재보험 가입률은 17.4%에 불과하다. 의료보험은 76.8%가 가입돼 있다. 의료는 다른 복지에 비해 중요하기 때문에 가입률이 높은 편이다. 하지만 직장보험보다 상대적으로 비싼 지역보험에 가입된 경우가 많다.
◇문화·예술인도 사회구성원=하지만 현장에 있는 문화·예술인들은 “경제적인 어려움은 두 번째 문제”라고 입을 모은다. 그보다 문화·예술인들을 힘들게 하는 것은 사회적인 인식이다. 예술지원 정책이 논의될 때마다 “나와 상관없는 일이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건데 왜 우리 세금으로 도와줘야 하느냐”는 외부의 시선은 이들의 사기를 떨어뜨린다. 김석진 한국연극인복지재단 사무국장은 “문화·예술계에 종사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돈을 벌기 힘들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시작한다. 때문에 돈을 못 버는 것에 대한 불만은 외부에서 보는 것만큼 크지 않다”고 설명했다. 문화·예술계 종사자들이 다른 분야보다 스스로 이 일에 뛰어든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들이 4대 보험을 포함한 보편적인 사회복지 시스템에 편입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김 사무국장은 “예술인들을 지원하는 법을 만들어 달라는 것은 ‘못 살겠으니 살려 달라’는 식의 요구가 아니다. 사회적 안전망에서 소외됐으니 형평성을 맞춰 달라는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문화·예술계에서 관련 법 제정을 요구하는 것은 법이 정해지면 문화·예술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사회적인 위상이 정립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들이 카드 발급, 보험 가입 등 일반적인 경제활동에서 차별을 받는 이유는 본질적으로 사회에서 이들이 어떤 존재인지를 정의하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라는 것이다. 김 사무국장은 “흔히 좋아하는 일을 하니 복지혜택이나 다른 건 포기하라고 한다. 그런 논리라면 변호사, 의사가 되고 싶어 되는 사람도 다 포기해야 하는 것 아닌가”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개그맨 김종석은 “국민소득 2만 달러가 넘은 사회에서 문화·예술인의 생계를 보장하는 틀조차 없다는 게 부끄럽다. 어렵다고 하지 말고 문화·예술인 법을 시행한 뒤 현장 의견을 수렴해서 고쳐 나가면 된다”면서 “자꾸 법을 미루는 사이 잠재력 있는 예술인들이 다른 분야로 빠져나가게 된다”고 우려했다.
김준엽 기자 snoopy@kmib.co.kr(국민일보 2011-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