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잠들지 않는 복직의 꿈'…기륭 농성장에서의 1박
뉴시스 2010년 9월 11일 손대선 기자
10일 오후 들어 서울 한강 이남에는 시간당 50mm이상의 국지성집중호우가 들이닥쳤다. 국수가락처럼 굵은 빗줄기는 금천구 가산동 옛 기륭전자 앞 천막 아래에서 오후 7시부터 시작된 기륭노조 문화제의 진행을 끊임없이 방해했다. 30여명의 참석자들은 천막 끝에서 떨어지는 낙숫물에 엉덩이를 적시며 1시간 30분 가량의 문화제를 '견뎠다'. 초청연사들의 목소리는 빗소리에 묻혀 잘 들리지 않았다. 행사 진행자들은 까치발을 서 양 손으로 천막 위에 수시로 고이는 물을 빼냈다. 초청연사의 입술이 움찔거릴 때마다 참석자들이 손나팔을 불며 호응했다. 하지만 이들이 요구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희미했다.기륭전자는 위성방송 수신기를 제작, 생산하는 업체이다. 1990년 6월에 설립된 회사는 셋톱박스, 디지털위성 라디오, 네비게이션, 지상파 DMB 등을 만들어 외국에 내다팔았다. 현재는 동작구 신대방동으로 이전했다. 사측은 가산동 농성장 뒤편의 부지에 세워졌던 공장을 철거하고, 대신 아파트형 공장을 세우려고 계획한다고 기륭전자 노조는 전했다.
파견직이 대부분인 기륭전자 노조는 2005년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과 노동조건 개선 등을 주장하며 파업을 시작했다. 물량감소를 이유로 사측이 계약직 3명을 해고한 것이 파업의 직접적인 빌미였다. 노사는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한 채 평행선을 달렸다. 해고와 진정이 엇갈렸고, 회사의 지원을 받는 용역과 노조를 지원하는 시민단체 등이 또 하나의 전선을 만들었다. 해고에 해고를 거듭하는 사측이나 비정규직의 100% 정규직 전환을 요구하는 노조 양측이나 다들 양보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런 흐름 속에서 이날로 농성은 1844일째를 맞았다. 연 매출액이 1000억원 남짓한, 그런대로 중견기업으로서 탄탄한 입지를 가졌던 기륭전자는 이 와중에 이런저런 이유로 '악덕기업'으로 낙인찍혔다. 200여명에 이르렀던 기륭노조원도 현재 8명에 불과하다. 기륭전자 노조에 따르면 2005년 정규직 기본급은 78만원, 파견직의 기본급은 64만 1840원이었단다. 당시 최저임금보다 10원이 더 많은 셈이다. 한달에 100만원도 안되는 돈벌이를 되찾기 위해 이들은 6년여 동안 농성을 벌이고 있다는 것이다. 반달만 막노동을 해도 100만원은 충분히 벌을 수 있는 세상이다. 설핏 이해가 안 되는 얘기다. 하지만 노조의 입장은 다르다.
"같은 100만원짜리 월급쟁이라도 정규직으로 안정된 기반을 갖고 미래를 설계할 수 있지만 비정규직은 미래를 꿈꾸는 것이 불가능해요."
김소연(41·여) 기륭노조 분회장은 이날 특별히 문화제 후 뒤풀이를 위해 인근 구로시장에서 산 개고기를 솥에 삶으며 이같이 말했다. 오랜 농성생활 탓에 아직 결혼도 못한 김 분회장은 한계와, 오기, 희망을 동시에 말했다.
"계속 싸워가야 하는가, 한계도 많이 느꼈어요. 고통도 여전해요. 하지만 이 싸움에서 물러난다고 해서 그 고통이 끝날까요? 우리같은 비정규직은 경력도 인정받지 못해요. 여기서 물러서도 다른 직장에서 비정규직으로 여전히 살아가야 한다는 거죠. 오기만으로는 지금까지 오지도 못하죠. 고통은 반복될 수밖에 없어요. 이 싸움은 고통을 끝내자는 희망에 관한 것이에요."
이들의 희망은 농성자들이 기거하는 컨테이너 위에 쳐진 2인용 텐트가 상징한다. 지난달 14일 사측이 포클레인을 동원해 농성장을 철거하려 하자 여성노조원 윤종희씨(41)와 오석순씨(45)는 항의의 뜻으로 곧바로 컨테이너 위의 천막인생을 자처해 아직까지 땅을 밟지 않고 있다. 철근 덩어리 위에서의 삶은 강퍅했다. 두 사람은 소형선풍기 한대로 습기와 무더위를 몰아내고 있었다. 대소변은 깡통으로, 목욕은 물수건으로 땀을 닦아내는 것으로 대신하고 있었다. 2005년 입사 동기로 위성라디오 조립라인에서 함께 일했던 이들은 특근을 마치고 돌아오는 버스에서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세요'라는 해고통지 문자를 회사로부터 받았단다.
"구로공단 지역 노동자들의 다수가 여성이고, 비정규직입니다. 내일을 알 수 없는 직장에서 고된 노동에 시달리고 있어요. 우리가 꺾이면 모두가 꺾이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에요."
남편과의 사이에 자식이 없다는 오씨는 모든 일이 잘 해결돼 컨테이너 밑으로 내려가 예쁜 아이를 낳고 싶다고 전했다. 새벽무렵까지 뒤풀이 자리에 개고기를 날랐던 노조원 이인섭씨(43)는 ?년 여동안 농성을 벌이며 부끄러운 일이 있었느냐"고 묻자 "없다"고 말했다. "그럼 자랑할 만한 일은 있었느냐"는 물음에도 같은 대답을 했다. 그는 다른 것은 필요없고 "오직 복직만을 원한다"고 말했다.
농성장 건너편 3층짜리 상가건물 옥상에 '6년간 불법점거 방치하는 금천구청은 각성하라, 가산동 주민일동'이라고 적힌 현수막이 펄럭였다. 농성자들은 '비정규직 기륭투쟁 승리'라는 글귀가 써진 천막 아래에서 개고기를 뜯었다. 거센 비바람은 새벽무렵까지 멈추지 않았다. 개고기가 바닥나자 10여명의 농성자들은 빗물을 안주삼아 소주를 마셨다. 그들은 죄다 비정규직 해고자였고, 이날 하나도 잠들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