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병길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상임활동가
지난 6개월 동안 자원활동가들이 한국비정규노동센터에서 활동했다. 비정규 노동자를 만나 인터뷰하고, 일자리 불평등에 대한 청년들의 인식을 알아 봤다. 인식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청년들이 생각하는 좋은 일자리란 무엇이고,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일자리 불평등에 대한 청년 인식조사’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만 19세~34세 청년들에게 무작위로 배포해 이뤄졌다. 일부를 제외하고 748부를 분석했다. SNS를 통한 조사였기에 표본에 한계가 있긴 하나, 인식조사 차원에서 경향을 파악할 수는 있었다.
청년들은 한국 사회 불평등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응답자의 44.5%는 자신이 ‘중하층’에, 16.7%는 ‘하층’에 속한다고 봤다. ‘상층’과 ‘중상층’은 합쳐도 6.1%밖에 되지 않았다. 하층에서 상층으로 갈수록 좁아지는 피라미드형 구조에 가까웠다. 그리고 청년들은 계층 상승 가능성을 낮게 바라봤다. ‘매우 낮다’와 ‘약간 낮다’를 합하면 56.5%였다. 정리하자면, 청년들은 한국 사회의 불평등이 심각한 상황에서 앞으로 내 처지가 좋아질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본 것이다.
기회 불평등에 대한 인식조사에서 청년들이 현실을 비관적으로 바라보는 이유를 엿볼 수 있었다. ‘자산 형성 기회’가 4.1점(5점에 가까울수록 불평등하다고 보는 것)으로 점수가 가장 높았고, ‘거주지에 따른 기회’(3.9점) ‘좋은 일자리를 얻을 기회’(3.7점) ‘성별에 따른 기회’(3.7점) ‘좋은 교육을 받을 기회’(3.5점)가 뒤를 이었다. 자본 소득이 노동 소득을 압도하며 부동산 가격이 폭등해 내 집 마련이 불가능에 가까워진 현실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모든 항목의 점수가 중간값인 3점을 넘은 게 눈에 띄었다.
불평등이 만연하고 희망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청년들이 생각하는 좋은 일자리란 무엇일까? 그 조건을 물어 봤다. 상위 세 가지 응답은 ‘좋은 워라밸’(22.9%) ‘높은 임금’(19.1%) ‘자신의 적성 및 흥미’(12.7%)였다. 구직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조건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높은 임금’(18.8%) ‘좋은 워라밸’(18.5%) ‘자신의 적성 및 흥미’(13.7%) 순으로 나왔다. 이에 반해 ‘높은 승진 가능성’(12항목 중 9순위)과 ‘높은 능력 향상 가능성’(10순위)은 하위권에 머물렀다. ‘높은 고용 안전성’이 상위 세 가지 조건에 들지 못한 점도 흥미로웠다.
위 결과에서 근래 대두되고 있는 ‘파이어족’의 존재를 엿볼 수 있었다. 파이어족은 젊은 나이에 큰 자산을 축적해 경제적 자유를 얻고자 하는 이들을 일컫는다. 앞서 살펴봤듯이 청년들은 사회 전반적으로 불평등이 심각하고 계층 상승 가능성이 낮다고 봤다. 그런데 코로나19로 불어난 유동성이 주식과 가상화폐 시장에 유입되면서 가치가 폭등했다. 많은 청년은 이를 천금 같은 계층 상승의 기회로 여겼다. 이들에게 노동 소득은 자산 투자를 위한 종잣돈이다. 평생직장이나 승진에는 큰 관심이 없다. 어떻게 하면 당장 많은 돈을 벌어 잘 투자할 수 있을지가 중요하다. 인식조사 결과를 보면, 청년들에게 좋은 일자리의 조건은 승진 가능성이나 능력 향상보다는 당장 투자금을 마련할 수 있는 높은 임금이었다. 그리고 워라밸을 선택한 응답이 높았는데, 여기서 라이프를 일반적인 의미로만 해석하기는 힘들 것 같다. 투자를 하거나 공부하는 자유 시간으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한다.
비관적인 현실에서 청년들이 믿은 건 스스로였다. 청년들은 개인의 능력과 노력 따른 분배를 원했다. 보수를 더 받는 상황에 대한 동의 정도를 물었는데, ‘직무성과가 좋을수록’이 4.5점(5점에 가까울수록 보수를 더 받는 상황에 대해 동의함)으로 가장 높았다. ‘근속연수가 높을수록’(4.0점) ‘직무관련 자격증 보유’(3.8점)가 뒤를 이었다. ‘같은 직장에서 똑같은 일을 하는 경우’로 질문을 전제했음에도 정규직이 비정규직보다 더 보수를 받아야 한다는 응답이 3.4점으로 나왔다. 일자리 불평등 해소 방안을 묻는 질문에는 직무의 경험과 능력에 맞는 채용이 필요하단 응답이 가장 높았다. 반칙 없는 경쟁 환경만 만들어진다면, 개인의 능력과 노력에 따른 분배가 공정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인식조사를 보면서 파편화하고 고립된 청년들이 떠올랐다. 과잉 경쟁에 내몰려 이리저리 발버둥 치거나, 거대한 불평등 앞에서 좌절하고 주저앉는…. 이들은 연대가 아닌 개인에 방점을 찍고 있었다.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보다는 각자도생해 살아남는 방법을 택한 것이다.
우리 사회는 청년들에게 어떤 희망을 줘야 할까, 어떻게 하면 각자도생을 뛰어넘는 공동체적인 대안을 마련할 수 있을까? 이번 인식조사가 남긴 질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