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형 노동 4.0을 위하여
이정희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정책연구위원)
최근 토론회 흥행의 공식을 새로 쓰는 주제가 ‘4차 산업혁명’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정치권, 정부, 각종 연구소, 시민사회단체는 물론 노동조합에서도 이를 주제로 토론회를 개최하고 관련 보고서를 내고 있다. 주로 기술진보에 따른 산업 생태계의 변화 양상을 전망하고 대응전략을 모색하는 내용들이다. 빠지지 않는 얘기는 ‘일자리’에 관한 것이다. 인간의 노동을 기계가 대체하기 때문에 일자리가 없어지고 줄어들 것이라는 분석들이다. 이 글을 쓰는 중에도 일본의 5대 편의점 체인이 ‘직원 없는’ 편의점 구상을 밝혔다는 기사가 뜬다. 이들 편의점에서 취급하는 모든 상품에 IC(집적회로) 태그를 부착하여 소비자가 원하는 상품을 바구니에 올려놓기만 하면 한꺼번에 계산이 되는 자동 계산대 시스템을 2025년까지 전면 도입할 계획이라고 한다. ‘편의점 알바의 종말’이라는 표현도 등장하였다.
현재 한국에서 진행 중인 ‘4차 산업혁명’ 논의는 일자리에 대한 불안감을 더 가중시킨다.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있는데 여기에 적응하지 못하면 도태될 것이라는 일종의 ‘공포마케팅’이라는 지적도 제기된다. 일련의 토론회 등에서 제기된 주된 논의 내용은 기술진보가 인간의 일자리를 대체할 것이다, 일과 생활의 경계가 무너지며 더 많은 유연성이 요구된다, 플랫폼노동의 확산 등으로 고용관계가 ‘거래’관계로 바뀔 것이다, 산업화 시대에 만들어진 근로기준법은 근로계약법으로 바꾸어야 한다, 와 같은 주장들이다. “무엇을 위한 기술진보인가”라는 핵심 질문이 생략된 채 불가피한 기술 진보에 대해 더 유연한 방식의 대응력을 키워야 한다는 데 초점이 맞춰진 듯하다. 더군다나 한국 경제가 저성장세로 접어들었고 당분간 탈출이 어려울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일자리에 대한 불확실성을 더욱 부추기는 논의들이 확산되고 있다.
‘혁명’이라는 단어의 위력도 한 몫을 하는 듯한데, 워크인조직혁신연구소의 이문호 소장에 따르면, 독일에서는 기술혁신에 따른 차이를 시대적으로 구분하긴 하지만 현재의 기술진보를 혁명(revolution)이라 부를 만큼 이전 시대와의 단절, 파괴적인 그 무엇으로 보지 않는다. 일련의 연속적인 과정(evolution)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4차 산업혁명이란 말 대신 ‘산업 4.0’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2016년 다보스포럼을 통해 확산되기 시작한 4차 산업혁명이란 말은 2011년 독일 하노버 박람회에서 제안된 이후 독일 정부가 국가 아젠다로 채택하여 시행 중인 ‘산업 4.0’에 기반한 것이다. 임운택 교수(계명대)는 최근 펴낸 책 <전환시대의 논리>에서 “독일의 산업 4.0은 생산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과 자원의 사회기술적 상호작용을 강화하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고 설명한다. 한국에서 불고 있는 4차 산업혁명 바람과는 상당히 다른 결이다. 한국에서 ‘4차 산업혁명’이 소비되는 방식이 기술주도, 자본주도적 편향을 갖고 있다는 점은 문제로 지적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남는 문제는 현재 우리가 처한 현실이다. 기술진보에 따른 산업생태계, 노동의 성격, 일자리의 양과 질에 변화가 생기고 있기 때문이다. 그 영향은 국가의 산업구조 고도화 수준, 주력 산업의 특성, 일자리의 특성 등에 따라 시차를 두고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겠지만 일시적인 헛소동만은 아닐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더욱이 혁명이라 부르든 아니든, 기술진보가 노동에 (특히 부정적으로) 영향을 미친 사례는 지난 수십 년간 축적되어 왔다. 앞서 언급했던 4차 산업혁명에 따른 노동의 변화는 이미 생산현장에서는 새로운 것들이 아니다. 기업들은 비용감축을 이유로 자동화 시스템으로 전환하면서 생산과정에서 노동을 배제해 왔다. 무분별하고도 탈법적인 외주화로 노동자들이 고용관계가 아닌 거래관계로 내몰린 지 오래고 조선산업에서 확인되듯이 구조조정기 일차적인 희생자가 되고 있다. 기술진보로 노동시간과 장소 선택권이 확대될 것이라고 하지만 이에 따라 실제 자율성이 증대되었다고 하는 노동자들은 거의 없다. 오히려 더욱 고도화된 기술시스템에 의해 평가되고 통제되고 있다. 굳이 4차 산업혁명을 언급하지 않아도 이미 진행되고 있는 변화들이다.
이런 점에서 독일 사례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독일의 산업 4.0 프로젝트는 전통적인 경제기반이었던 제조업에 ICT 기술을 접목하여 경쟁력을 높이겠다는 것이다. 다양한 소비자의 요구, 시장의 트렌드에 더 유연하게, 더 빠르게 대응하기 위해 생산시설과 물류시스템, 시장과 고객 요구 등이 네트워크를 통해 연결되고 자율적으로 조정하고 제어하는 기술체계인 가상물리시스템(Cyber Physical System)을 기반으로 한 스마트공장을 구축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노동 4.0이 상호보완하고 있다. 노동 4.0은 엔지니어 중심의 기술발전에만 의존해서는 안 되며 새로운 디지털 시대에 ‘좋은 일자리(Gute Arbeit)’를 만들어야 한다는 목표 아래 노사정과 학계, 시민이 참여하는 사회적 대화체다. 2016년 말에 출간된 ‘노동 4.0 백서’에는 기술진보가 노동세계에 미칠 영향에 관한 논의에서부터 디지털 시대에 양질의 노동을 위해 고용능력, 근로시간, 산업안전, 정보보호, 공동결정과 참여, 사회적 파트너십 등에 관한 방향성이 제시되어 있다. 지난 4월6-7일 한국노동연구원과 에버트재단이 공동 주최한 ‘노동 4.0과 4차 산업혁명’ 토론회에서 독일쪽 발표자들이 하나같이 강조한 얘기도 ‘노동의 인간화’ 관점을 견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디지털 시대에 미래 노동의 존폐 문제가 아니라 노동의 방식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가 핵심 이슈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이러한 논의는 현재 한국에서 진행되고 있는 4차 산업혁명 논의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대목들이다.
기술진보 논의는 비단 그 기술 자체만이 아니라 경제적, 사회적, 노동정책적 요인이 함께 상호작용하는 가운데 이루어져야 한다. 기술과 노동, 그리고 사회는 독립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형 노동 4.0 논의가 시급하다. 이를 위해 선행되어야 하는 것은 단결할 권리와 교섭할 권리의 보장이다. 초기 산업화 시대에 확보되었어야 할 기본권이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지난 대통령 탄핵 과정에서 확인된 것처럼 여전히 국가권력과 재벌과의 동맹이 유지되고 있고, 이 체제는 조직노동이 기업이나 산업, 국가 수준에서 행위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무엇보다 시급하게 ILO 협약 결사의 자유 및 단결권 보호에 관한 협약(87호), 단결권 및 단체교섭권에 관한 협약(98호)을 비준하여야 한다. 단결권을 저해하는 블랙리스트, 조합원 선별 징계, 용역계약 해지 등과 같은 사용자의 각종 부당한 행위들에 대한 엄벌을 통해 노동조합은 “없으면 좋은 것”이 아니라 “당연히 존재하는 조직”이라는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교섭의 측면에서는 기업별 노조를 전제로 한 법제도 개선을 통해 다양한 조직형태의 노동조합이 다양한 방식으로 교섭을 할 권리를 보장하여야 한다. 이를 통해 조직노동이 노동현장에서, 또한 산업‧업종 단위에서, 국가 단위에서 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공간을 열어야 한다.
기술진보에 따른 노동세계의 변화에 관한 논의에서 핵심은 ‘좋은 일자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국제노동기구(ILO)가 제시한 좋은 일자리의 4가지 전략적 목표는 고용기회, 일터에서의 권리(결사의 자유, 단체교섭 권리, 차별금지, 강제노동‧아동노동 금지), 사회적 보호(안전한 일터, 사회보장, 소득안정), 사회적 대화(참여, 생산‧경영 정책에의 개입)이다. 우리나라 헌법 정신과도 유사하다. 헌법 제32조에서는 “국가는 사회적·경제적 방법으로 근로자의 고용의 증진과 적정임금의 보장에 노력하여야 한다고 의무를 부여하고 있고, 근로조건의 기준은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하도록 법률로 정하도록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