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병길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상임활동가
파리바게뜨 투쟁이 한창이다. 2017년 SPC그룹은 파리바게뜨 제빵사 5천300여명을 불법파견으로 사용한 사실이 적발됐다. 노동부는 직접고용하라고 시정지시했다. 이후 여러 파고를 거쳐, 노사·시민사회단체·정당(더불어민주당·정의당)이 참여한 사회적 합의가 맺어졌다. SPC그룹이 자회사를 설립해 제빵기사 전원을 직접고용하고, 3년 안에 본사 직원과 같은 수준의 급여를 적용하는 게 주된 내용이었다.
그렇게 문제가 일단락되는 듯했다. 그러나 SPC그룹은 사회적 합의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다. 적반하장으로 노조탄압과 인권침해를 일삼았다. 이에 임종린 화학섬유식품노조 파리바게뜨지회장은 53일간 단식투쟁을 하며 맞섰다. 그 뜻을 이어받은 시민사회와 노동계가 연대·투쟁 중이다.
이달 서울 양재역 인근 SPC그룹 본사 앞에서 ‘파리바게뜨 문제해결을 위한 2차 시민 촛불 문화제’가 있었다. 많은 이가 함께했다. 무대에 오른 한 발언자의 이야기가 와닿았다. 그는 파리바게뜨 투쟁이 노사만의 문제가 아닌 ‘우리의 문제’라는 식의 발언을 펼쳤다(정확한 표현은 기억나지 않는다). 노동자로서, 소비자로서, 그리고 시민으로서 파리바게뜨 투쟁에 함께하겠다는 외침이었다. 십분 공감한다. 시민사회가 SPC그룹을 단순히 반노동 기업이 아닌 ‘반사회적인 기업’으로 고발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우리는 노동자다. 많은 시간을 일터에서 보낸다. 노동과 노동으로 맺어진 관계는 나란 존재의 큰 부분을 차지한다. 불로소득만으로 삶을 이어갈 수 있는 이는 극소수다. 그런데 노동을 하다 보면 크고 작은 부조리를 겪기 마련이다. 어느 날, 파리바게뜨 사태에서 드러난 것과 유사한 문제가 내 일이 될지도 모른다. 실제로 삼성에버랜드와 한화테크윈(현 한화에어로스페이스)은 SPC그룹의 부당노동행위·노조파괴 공작과 꼭 닮은 짓을 일삼은 바 있다. 어떻게든 파리바게뜨 사태를 잘 해결해야 한다. 노동자의 권리를 침해해선 안 된다는 메시지를 우리 사회에 분명하게 전해야 한다. 그것은 파리바게뜨 제빵사들의 노동뿐만 아니라 나의 노동을 지키는 일이기도 하다.
우리는 소비자다. 속세와 완전히 연을 끊고 자연을 벗 삼아 살지 않는 이상 그렇다. 소비자로서 우리가 가장 빈번하게 구매하는 상품은 먹거리다. 그런데 먹거리는 단순히 상품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우리의 입으로 들어간다. 그래서 우리를 살게 한다. 먹거리를 만드는 회사에 고도의 윤리 의식이 요구되는 이유다. SPC그룹은 어떤 곳인가? 국내 굴지의 식품 대기업이다. 파리바게뜨·던킨도너츠·배스킨라빈스·파스쿠찌·삼립식품 등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브랜드를 여러 개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에 살면서 SPC그룹이 만든 음식을 먹어 보지 않은 이는 드물다. 그렇기에 우리는 소비자로서 SPC그룹의 반사회적 행태에 제동을 걸어야 한다. 살기 위해 먹는 빵이 누군가의 피와 눈물로 얼룩져서는 안 된다.
우리는 시민이다. 민주사회의 시민은 공동체가 보장하는 권리를 평등하게 향유해야 한다. 인간으로서 자존감을 지키고, 최소한의 생활을 보장받으며, 공동체의 의사결정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파리바게뜨 제빵사들은 이러한 기본적인 권리조차 누리지 못했다. 밤낮·휴일 없이 일해야 했다. 화장실 갈 시간도, 밥 먹을 시간도 없었다. 임신해 몸이 아픈 와중에도 마음 편히 쉬지 못했다. 임신을 이유로 휴직을 강요받은 사례도 있었다. 2018년 전국 파리바게뜨 노동자 대상 설문조사에 따르면, 여성노동자의 연간 유산율이 무려 50%에 달했다. 파리바게뜨 사태에 분노해야 한다. 우리와 같은 공동체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권리가 침해당했다. 다른 시민의 권리가 무너지는 걸 지켜만 보다가는 어느 순간 나의 권리 역시 무너질지도 모른다.
게다가 SPC그룹은 시민과의 약속을 저버렸다. 2018년에 맺은 사회적 합의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다. 지난 16일 학계·법조계·노동인권 및 건강권 단체 등 전문가 20여명으로 구성된 ‘파리바게뜨 사회적 합의 이행 검증위원회’가 1차 검증 결과를 발표했다. 검증위가 판단한 10개 항목(임금 관련 2개 항목은 검증 중인 관계로 제외) 중 불이행은 5개로 절반에 달했다. 이행은 2개에 불과했고, 부분 이행은 3개였다. 상황이 이러함에도 SPC그룹은 사회적 합의를 제대로 이행했다는 입장이다. 이행 검증을 위한 시민사회의 자료제출 요구는 나 몰라라 하면서. 떳떳하다면 검증을 피할 이유가 없다.
우리는 하나의 실체로서 홀로 존재할 수 없다. 이런저런 관계로 얽혀 있다. 공동체라는 울타리 안에서, 누군가의 노동으로 만든 빵을 사 먹는 것처럼 말이다. 스스로를 정의하여 타인과 경계 짓고 구별하는 건 근대성의 한계다. 많은 이가 파리바게뜨 문제에 분노하고 있다. 그들은 파리바게뜨 사태가 단순히 너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문제이기도 하다는 걸 잘 안다. 내가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준다면 다음에는 네가 내게 그리해 줄 거라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는 지극히 이성적이고 상식적인 판단이다. 연대의 물결은 갈수록 더 커질 것이다. SPC그룹은 노동자·소비자·시민의 목소리를 더는 외면하지 말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