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물관 비정규직은) 정규직 학예연구사로 가는 ‘경력의 사다리’ 차원의 기능을 갖고 있다. 그렇기에 (비정규직 학예원을 정규직화 하면) 전체 ‘박물관 전문직 인력 양성 생태계’가 무너진다.”
19일 국립중앙박물관 정규직전환심의위원회 A 위원이 기간제 학예원들과의 간담회에서 한 말이다. 이 위원은 유명대학교 학사·석사·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해외 유명박물관 큐레이터를 역임했다. 현재 대학에서 역사교육 교수로 재직 중이다. 박물관은 그를 외부 전문위원으로 선정해 이번 박물관 기간제 직원들의 정규직 전환 심의를 하도록 했다.
엘리트코스를 밟고 교수자리에 선 그가 “고용불안을 해소해 달라”는 후배들에게 한 말은 즉 “너희가 있는 자리는 그저 나 같은 사람이 거쳐 가는 자리일 뿐이다”, “너희들의 고용불안을 해소시켜 주면, ‘박물관 생태계’가 무너지니 무기계약직으로의 전환은 안 된다”였다. 만약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다수의 비정규직들을 희생양으로 유지되고 있는 박물관 생태계야 말로 바꿔야 할 적폐가 아닌가. 최소한의 자성조차 없이 기득권 자리에 올라선 그가 후배들의 앞날까지 심의하고 있는 상황이 씁쓸하기만 하다. 어쩌다가 A 교수와 같은 인물이 중앙박물관 무기계약 전환 심의위원 자리에 앉게 된 것일까.
구색 맞추기 정규직전환심의위원회
무책임한 정부 가이드라인
“비정규직 논의에 비정규직이 배제됐다”
A 교수는 중앙박물관이 임명한 무기계약직 전환심의위 외부 전문위원이다. A교수의 주장은 기간제 직원들의 무기계약직 전환을 반대하고 있는 박물관 측과 입장이 같다고 할 수 있다. 박물관 측은 간담회에서 “더 이상 유물이 발굴되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등의 이유를 들며 무기계약직 전환 반대 입장을 노골적으로 밝히기도 했다.
문제는 6~10명으로 구성된 심의위원 대부분이 A 교수처럼 사측이 임명한 위원이라는 점이다. 박물관은 노동계 추천인사 1명을 제외하고 나머지 위원들을 직접 선정했다. 이같이 박물관이 자신들의 입맛에만 맞는 심의위원회를 구성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책임한 정부의 가이드라인에 있다.
정부는 지난 7월20일 무기계약직 전환 가이드라인을 발표했다. 이 가이드라인에 따르면, 심의위원회는 내·외부 인사 6명~10명으로 구성하되 외부인사는 전문성을 갖춰야하고 반드시 노동계 추천 인사를 포함시켜야 한다. 공정성을 갖추라는 말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이 가이드라인은 “구색만 맞추면 된다”는 것과 다름없다. 노동계 추천 위원을 제외하면 사측의 입맛에 맞는 위원을 선정할 수 있도록 열어 뒀기 때문이다. 10명의 위원 중 노동계 위원은 1명만 있어도 가이드라인은 성립한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이런 가이드라인의 허점을 입맛에 맞게 최대한 이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큰 관심사를 불러 모았던 교육부의 학교비정규직 심의위원회 또한 다를 바 없었다. 교육부의 학교비정규직 전환심의위는 교육부교육청 관계자 4명, 외부전문가 2명, 교총 1명, 학부모 1명, 노동계 추천인사 1명으로 구성됐다. 노동계 추천과 이해관계자(교총·학부모) 측 전문가를 제외하면 모두 교육부가 정한 인사였다. 게다가 이해관계자라고 참여한 교총은 비정규직 당사자들의 인권까지 침해해가며 학교현장에서 무기계약 전환 반대 서명운동을 벌인 단체였다. 사실상 심의의견을 제시할 수 있는 9개의 창구 중 단 1개만 비정규직 당사자들에게 주어진 셈이다.
교육부의 심의 결과는 처참했다. 5만여 명의 학교비정규직 심의대상 중 2%에 해당하는 유치원 방과후과정·돌봄 강사만 전환하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이조차 이미 많은 시도교육청에서 무기계약직 전환 작업이 진행 중인 직종이었다. 교육부 심의위 노동계 추천인사였던 이남신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소장은 “비정규직 제로가 아닌 정규직 제로”라며 위원직을 사퇴했다.
교육부의 발표 이후 학교비정규직 노조는 “비정규직 당사자들의 참여가 철저히 배제된 채 심의가 진행되고 있다”며 울분을 토했다. 노조 측은 “비정규직 당사자들의 참여는 철저히 차단됐고, 교육부에 의해 일방적으로 결정된 것”이라며 “애초부터 비정규직 노동자의 요구를 외면할 수 있는 구조로 시작 됐다”고 지적했다. 이 같은 당사자들의 지적에도 불구하고 기관의 심의위원회 구성 양상은 크게 달라지고 있지 않다.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은 최근 심의위원회 구성과 관련해 논란이 되면서 심의위 일정이 중단된 상태다. 심의위 위원장이 전 진흥원 이사 출신이었던 것이다. 진흥원 실태를 가장 잘 알고 있는 이를 찾다보니 전 이사 출신을 선정했다는 게 진흥원의 설명이었지만, 심의위 위원 절반가량이 이미 진흥원 임원으로 채워진 상태에서 굳이 이사 출신을 추가적으로 선정해야만 하는 이유는 여전히 의문이다. 1명만 선정한 노동계 추천위원을 늘려도 되지 않았을까?
공공기관과 정부부처들은 교육부 심의위 문제를 답습해서는 안 된다. 심의위를 구성할 때 기울어진 운동장이 되지 않도록 각별한 신경을 써야 한다. 구색 맞추기식 심의위가 아닌 당사자들의 의견이 최대한 반영될 수 있는 구조가 만들어져야 한다. 심의위가 비정규직 당사자들의 의견을 청취하는 과정을 거치긴 하지만, 결국 비정규직들의 무기계약 전환여부를 결정하는 사람은 심의위원이다. 위원이 비정규직들을 위하는 마음이 없다면 심의 자체의 의미는 퇴색될 수밖에 없다. 위원들이 비정규직을 ‘경력의 사다리’즘으로 여기며 당사자들을 무시하는 태도로 일관한다면 당사자들에겐 상처로 남을 뿐이다. 심의위원을 선정하는 공공기관 측의 책임이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