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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회를 전세계에 웃음거리로 만들고 50년 민주헌정사를 똥칠하는 행위다.”
지난 2009년 7월 당시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추미애 위원장은 의원총회에서 분을 삭이지 못하고 이렇게 말했다. 환경노동위 한나라당 간사를 맡고 있던 조원진 의원이 일방적으로 위원장 대행을 선언한 뒤에 비정규직법 개정안을 상정한 것을 두고 격분한 것이다. 상정된 비정규직법 개정안은 비정규직 사용기간 제한 규정의 적용을 3년 유예하는 내용이었다. 노동현장에서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을 막을 수 있는 내용이라는 점에서 노동계의 반발을 샀다. 그런데 추미애 위원장의 일갈에 오히려 반발 여론이 일었다. 비정규직법안을 참여정부가 만들고 2년 후엔 정규직으로 전환될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는데 무슨 자격으로 분노할 수 있느냐는 목소리였다.
역대 노동 관련법은 보수와 진보 정권을 가리지 않고 노동자를 배반했다. 달콤한 언어로 노동자를 보호하겠다고 관련 법을 내놓지만 보호는커녕 항상 칼끝은 노동자를 향하면서 희생을 요구했다.
김대중 정부에도 노동자는 없었다. 김 대통령은 2001년 내외신 연두기자회견에서 “지금은 과거 어느 때보다 노동자의 권익이 확대됐다”면서 “노동 3권이 완전 보장되고 있다”고 호언장담했다. 하지만 신자유주의를 도입했던 김대중 정부에서 노동 분야는 철저히 노동자를 배제시키는 쪽으로 정책이 수립됐다. 경제위기 극복이란 허울 좋은 미명 아래 구조조정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1998년부터 2000년까지 13만1000명의 공공부문 인원을 감축시켰다.
김영삼 정부 시절이던 1996년에는 정리해고 법안이 날치기 통과돼 노동자의 고용안정을 급격히 떨어뜨렸다. 근로기준법상 경영상 긴박한 이유가 있고 해고회피 노력을 다해야 하는 등 정리해고 원칙이 있지만 이 법은 추상적 문구로 정리해고를 정당화한 악법 중의 악법이었다.
비정규직 노동자도 급격히 불어났다. 1995년 대비 2000년 비정규직 노동자는 10% 이상 늘어나 52.4%를 차지했다. 유연화 정책의 일환으로 연봉제와 성과급제가 도입되고 확대됐는데 결국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임금격차를 벌렸고 임금체계가 개편되면서 노동강도가 강화됐다.
김대중 정부의 노사정위원회는 민주노총이 구조조정에 반대한다며 불참하자 ‘들어와서 대화하자’는 제스처를 취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복수노조 허용 5년 유예, 전임자 임금 지급금지 등 노동계가 수용할 수 없는 일방적인 내용을 합의문으로 내놨다.
▲ 사진=류재운 전국애니메이션노조 위원장 제공 | ||
구속 노동자 수를 비교해보더라도 김대중 정부에서 노동자는 법의 보호가 아닌 처벌 대상이 됐다. 1988년 이후 노태우 정권 5년 동안 구속된 사람만 1973명이고 김영삼 정권 5년 동안 507명이 구속됐다. 김대중 정권 5년 동안 구속된 사람은 800여명이었다.
살아온 삶과 스타일 등 전혀 비슷한 구석이라고는 없는 박근혜 대통령과 김대중 전 대통령이었지만 노동 정책만큼만 거리가 가까웠다. 2015년 기획재정부가 도입 시기에 따라 인건비 인상률을 적용해 임금피크제 도입을 강요하는 것처럼 2001년 기획예산처는 경영혁신과제 이행이라는 이름으로 퇴직금 누진제 폐지, 연월차 휴가 보상 폐지, 대학생 자녀 학자금 지원 중단, 연봉제 확대 등을 하지 않는 기관에 대해서는 국회가 의결한 예산 배정을 유보시켰다.
국민의 정부에 이어 참여정부에서도 노동자 배반의 역사는 계속됐다. 특히 2006년 11월30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가 경호권까지 발동시켜 가며 ‘날치기’ 통과시킨 뒤 본회의를 최종 통과한 비정규직 관련 법안은 한국의 노동시장을 바닥부터 뒤흔들었다.
법에 따르면 기간제의 사용사유 제한 없이 모든 부문에 기간제 노동자의 사용을 전면 자유화했고 고용기간이 종료되면 자유로운 해고가 가능해졌다. 파견근로의 경우도 ‘업무의 성질 등을 고려해 적합하다고 판단되는 업무’를 추가해 파견대상업무를 확대시켰다. 2년 경과시 정규직으로 전환된다는 조항은 2년 이하 근무자를 해고해도 통제를 받지 않기 때문에 대량해고가 나올 수 있다는 우려가 쏟아졌다. 당시 민주노총은 “노동시간 단축과 해고의 자유를 제한해온 200년 노동운동을 노동 유연성이란 미명으로 노동의 역사를 뒤로 돌리려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참여정부는 비정규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비정규직을 정상적인 고용형태로 만들어버리면서 신규로 노동시장에 진입하는 노동자들의 비정규직 채용이 늘어났고 임금격차를 가져왔다. 지난 2005년 8월까지 비정규 노동자의 월평균임금은 112만원이었다. 정규직 노동자(220만원)의 절반 수준이었다. 2001년 이후 임금격차는 계속 확대됐는데, 차별시정제도가 시행됐지만 2007년부터 2008년까지 차별시정 신청 현황은 814건에 불과했다. 시정명령은 64건(7.6%)에 그쳤다. 사실상 비정규직 양산 시스템을 참여정부가 완성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비정규직 차별을 해소시킬 수 있는 기회도 있었다. 2005년 인권위는 정부의 비정규직 법안에 대해 비정규직 차별을 해소하기 부족하다며 기간제 근로자 사용시 사유제한 규정을 두고 동일노동 동일임금 규정을 명문화해야 한다는 의견을 밝혔다. 하지만 노동부는 이를 거부했다.
이남신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소장은 “김대중 정부를 거쳐 경제가 회복되는 과정에 노동자들이 고통을 분담해서 외환위기에서 벗어났으면 노무현 정부가 원상회복을 했어야 했는데 재벌에 가장 많은 세금감면과 융자 혜택을 주고 노동자들에게는 전혀 혜택을 주지 않았다. 복수노조의 교섭 창구 단일화 같은 경우 어용 노조가 장악하는 여지를 줘버렸다”고 비판했다.
박근혜 정부의 노동정책은 이명박 정부와 궤를 같이 한다. 박근혜 정부는 고령노동자의 임금을 깎아 절감한 임금을 청년 고용 비용으로 쓰겠다며 임금피크제를 도입했지만 기업의 인건비 줄이기 수단으로 전락할 뿐 효용성이 없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는데 이명박 정부의 ‘청년인턴제’도 생색내기 정책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2009년 청년인턴제 예산은 1590억원이었지만 늘어난 일자리 수(6.3만명)로 보면 청년 실업자수와 대비해 턱없이 부족했다.
이명박 정부가 일자리 창출 계획으로 발표한 녹색뉴딜 정책도 겉만 번지르르하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4대강 살리기 등 9개 핵심사업과 27개 연계사업에 2012년까지 50조 492억원을 투입해 95만개의 일자리를 만들겠다는 것이 정부 계획이었지만 토목 건설 사업이 78%에 달해 예산이 건설업에 집중 투입될 것이라는 지적이 나왔다. 민주노총은 95만개 일자리 중 97%인 91만 6156개가 비정규 단순 노무직이라며 “대규모 토목사업의 경우 중장비 중심의 공사가 진행돼 실제 대규모 고용창출로 이어지기 어렵다”고 밝혔다.
박근혜 정부가 밀어붙이고 있는 일반해고 도입과 취업규칙 불이익 변경 조건 완화, 비정규직 기간 연장 등이 과거 정권에서 내놓은 노동정책을 든든한 배경으로 삼아 ‘정규직 노동조합 공격용’으로 쓰일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일반해고와 취업규칙 변경은 현재 미조직 비정규직들에겐 이미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오히려 정규직 노조를 상대로 저성과자 해고 등이 이뤄지면서 사용자의 이익을 극대화시킬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박근혜 정부는 비정규직 이해관계가 걸려 있는 파견확대와 사용기간 연장을 투트랙으로 추진하면서 정규직 노조를 압박하는 모양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가 비정규직 양산과 자유로운 해고 시스템을 완성시켰다면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정규직 노조를 제거하기 위한 마지막 퍼즐 맞추기를 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정부의 프레임이 10% 정규직 노조 사업장을 제거하고 90% 비정규직을 살리자는 쪽으로 맞춰진 이상 정규직 노조가 희생을 하더라도 비정규직의 이해관계를 확대하는 방향으로 반격을 준비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이남신 소장은 “비정규직 청년과 여성을 조직하도록 양대 노총이 조직 자원을 대폭 이동시켜야 한다. 그런 전략이 없는 이상 비정규직 문제는 물론 노동의 하향 평준화를 막을 수 없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