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책] 59명의 비정규 노동자로 만나는 우리 시대의 ‘얼굴들’
권종술 기자 (민중의소리 / 2017. 9. 25)
‘얼굴들’에 나오는 비정규 노동자들의 사진은 꾸밈이 없다. 그들은 모두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 초상 사진을 찍듯이 정면을 응시하고 있지만, 그들의 모습은 꾸밈이 없다. 이상엽 사진가는 이런 사진 작업을 독일 사진가 아우구스트 잔더(1876~1964)의 작업에서 가져왔다고 했다. 잔더는 평생동안 ‘20세기의 사람들’이라는 제목의 거대한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농민, 장인, 여성, 전문 사회직종, 예술가, 대도시, 장애인·실업자 등 1만명 넘게 사진으로 담았다. 사회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맡아 일하는 농부와 군인, 전문직 등등의 개인들의 모습을 꾸밈없이 있는 그대로 담아 이를 통해 독일 민중을 분류하고 기록하려 했다. 하지만 이런 잔더의 작업은 독일 나치 정권에 의해 불태워졌다. 나치는 잔더가 독일 민족을 순구하게 묘사하지 못했다며 그의 작업을 지우려 했다. 하지만 잔더는 그,것이 아름답던 아름답지 않던 있는 그대로 기록하려 했다. 그는 자신의 사진집을 발간하면서 “사진은 놀라운 아름다움으로, 그리고 냉혹한 진실성으로 사물들을 표현한다. 또한 사진은 사물들을 엄청나게 왜곡할 수 있다. 우리는 진실의 모습을 간직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는 그것을 우리의 동료와 후세에 물려주어야 한다. 이 진실이 우리에게 유리하건 그렇지 않건 관계없이 말이다”라고 강조했다.
2부로 구성된 ‘얼굴들’도 이런 잔더의 작업과 맞물려 있다. 1부 ‘우리가 아는 얼굴들’에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초상 사진을 실었다. 촬영은 노동자들의 생활공간에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진행됐고, 스트로보(플래시)를 활용해 배경을 죽이고 ‘얼굴’을 훤히 드러내는 원칙을 유지함으로써 시공의 일관성을 확보했다. 2부 ‘나와 당신의 이야기’에는 비정규직 노동의 현주소를 밝히는 이남신 소장의 글과 함께, 노동자의 삶과 싸움, 죽음의 현장을 화보로 구성했다. ‘아카이브’에는 인터뷰에 참여한 노동자들의 전체 구술을 담았다. 채록 일자를 표기했고, 이후 다시 만났거나 소식을 접한 이들의 후일담은 아래에 따로 추가했다.
책장을 넘기다 보면, 저마다의 얼굴과 이름 옆에 ‘콜센터 노동자’에서 ‘아파트 경비 노동자’까지 30종에 이르는 다종다양한 ‘일’들이 꼬리표처럼 붙어 있다. 어떤 일을 하는지가 한 사람의 이름이나 얼굴과 다름없는 위계의 ‘정체성’이 된 사회에 대한 노골적이고도 필연적인 반영이다. 흑백필름에 찍힌 피사체들의 나이 차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생애주기마다 어떤 불가피한 선택으로 비정규직 노동을 감내했고, 왜 싸움을 시작하거나 멈추게 되었는지를 알게 된다. 그렇게 59개의 ‘다른’ 이야기가 얽히고설키며 수시로 겹치다가 ‘하나’의 줄기로 모이며, 우리의 가족·친구·이웃 등 도처에 허다한 존재들을 아프게 상기시킨다. 이는 모든 일하는 사람(또는 혜택이나 부양을 받는/받아야 하는 자)의 일체감과 동질성을 공공연하게 드러내는 과정이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이미 전체 노동자의 반수를 넘긴 1100만여 명에 이른다. 그들이 그들이 아닌 우리인 이유다. 그들의 얼굴이 바로 우리 시대의 얼굴인 이유다. 이 책 에필로그를 통해 송경동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언제든 우리의 안부나 의견이 궁금하면 물어봐 주길 바란다. 우리는 ‘인간의 역사’ 속에 살아 숨 쉬며 끝없이 당신에게 말 걸 것이고, 어떤 사회적 존재의 잊히지 않는 이름으로, 모른 척 지나칠 수 없는 얼굴로, 언제나 당신 곁에 머무를 것이다. 나는 최고운이며, ‘9-4’이며, 최종범이며, 이제 막 인천공항에 도착한 네팔에서 온 이주 노동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