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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도 광명시에 사는 이진한군(10·가명·광문초 3년)은 웃음을 잃은지 오래다. 매일 훌쩍거리며 우는 엄마 이금희(32·가명)씨탓일까. {엄마∼ 왜 자꾸 울어} 하고 물으면 {너희들 때문에 산다}고만 답한다.
몇달전부턴가 밥상엔 카레나 신 김치가 유일한 반찬으로 올랐다. 동생 유진(5)이는 숟가락을 내던지고 투정부리지만 진한이는 아무 말없이 한 그릇을 비운다. 밥 남기지 말라던 엄마는, 다 먹는 걸보면서 또 운다. 작년 크리스마스 때쯤 집을 나간 아빠는 가끔 전화해 {잘있냐}고 묻고는 끊어버리곤 한다.
엄마는 매일 전화만 붙잡고 있다. 5개월 전까지 다니던 시계 부품공장에 전화해 {아이들이 굶고 있다, 십만원만이라도 달라}고 애걸한다. 그러다가 생활정보지를 펼쳐놓고 {일자리를 구한다}며 또전화를 건다. 그러더니 한달 전 식당 일을 시작하면서 엄마 얼굴이좀 밝아졌다.
학교를 마치면 동생 돌보고 밥상 차리는 일은 진한이 몫이 됐다. 이젠 달걀 후라이 부치는 솜씨도 제법이다. 엄마의 월급은 30만원정도. 처음엔 {이제 우리 진한이 급식비는 문제없다}며 좋아하더니{이것 갖고는…} 하며 한숨만 짓는다.
기업 구조조정 등 IMF 칼바람을 맞으며 거리로 내몰리는 데엔 남녀 구분이 없다. 하지만 여성에게 유독 [정리해고 0순위], [해고도레이디퍼스트(lady first)]라는 말이 따라붙는 걸 보면 IMF의 감원한파는 여성들에게 좀 더 매섭게 불어닥치는지도 모른다.
노동부에 따르면 여성 실직자는 9월 현재 50만1천명. 전체 실업자 157만2천명 중 31.8%에 달한다. 하지만 이 가운데 60% 이상은 5인 미만영세 사업장에서 시간제로 일한 사람들이라, 고용보험 혜택은 물론 실업 수당도 받지못했다. 올 10월 법 개정으로 내년 봄부터고용보험 혜택 범위가 넓어졌다고 하지만, 대기업 출신의 남성 실업자들 틈을 비집고 들어가 취업하기란 하늘의 별따기다.
여성들의 해고·감원은 연령이나 직종을 가릴 것없이 무차별적으로 일어난다. 미혼 여성은 {시집갈 때가 안됐냐}, 결혼한 장기근속여성들은 {남들처럼 위로금이라도 타려면 곱게 나가라}는 말을 듣고[반강제로] 사표를 쓰기도 한다.
일용직 근무자 뿐 아니라 [준비된] 해고의 칼날 위에 서기는 대기업이나 연구소에서 일하는 고학력자 여성들도 마찬가지. 모 대기업에선 여성 220명을 한번에 해고했고, 모 제지업체는 생산직 여성근로자 3백명중 1백명을 백화점 영업직으로 전직시켜 퇴직을 유도하기도 했다.
D 보험회사에 3년 넘게 다닌 황모(28·여)씨는 지난 1월, 결혼한걸 처음 후회했다. 회사는 해고 대상자로 통보하며 {기혼 여성을 1순위로 삼았다}고 짧게 답했다. 모 광고대행사 마케팅연구소에 있다권고 사직한 김모(30·여)씨는 남자 동료 직원에게 {여자 대신 남자가 집에서 놀 순 없지 않냐}는 말을 들어야 했다.
연세대 사회교육원에서 개설한 실직자 대상 교육 과정에서 [인터넷과 경영] 수업을 받는 심모(31·여)씨.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강사로 일하다 미국텍사스 오스틴대 광고학 석사 과정을 마쳤다. 회사구조조정으로 다니던 광고기획사에서 지난 봄 나왔는데 {자꾸 나이는 먹고, 정말 더 막막해진다}고 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여자로 태어난 게 죄냐}고 반발하던 당사자들도 실업 수당을 얼마 받고는 말없이 물러선다. 한 여성단체 관계자는 {사회 분위기가 험악해지면서 그렇잖아도 [2등 시민]이던 여성들을 제물대에 올리는 걸 당연시 하고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문제는 남성에 비해 여성은 재취업이 거의 불가능해 [평생 실업자]로 남게 된다는 점. 노동부가 집계한 지난해 하반기(7∼12월) 재취업률을 봐도 남성 실직자는 17.8%인 반면 여성 실직자는 1.4%에불과하다.
때문에 경력을 인정받는 취업은 꿈도 못 꾸고 파출부·신문 배달·우유 배달 등 [돈 벌이만 된다면 뭐든 하겠다]며 달려들고 있다. 고졸 출신에게 돌아가던 영업 판매직에 대졸 출신이 대거 몰리는 [하향 취업]도 낯익은 풍경이 됐다. 지난 봄 그레스이스 백화점 주부계약사원모집엔 고학력 미혼 여성까지 몰려, 13대1이 넘는 구직 경쟁률을 보였다.
청소년보호위원회(위원장 강지원)가 지난 10월 실시한 서울 신촌역 등 유흥가 실태조사에 따르면 {생활고를 이기지 못한 30∼40대가정주부 출신의 [IMF형 접대부]까지 등장했다}고 한다.
흔히 여성 실업문제는 [성차별] 문제 정도로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남성 실업 이상으로 생존에 위협을 받고, 가정 해체로 직결되기도 한다. 남편의 사망이나 병, 가출 등으로 경제 활동을 책임져야하는 실직 여성 가장들. 이들은 집안 살림에 아이들 양육, 시부모 부양은 물론 밖에 나가 생활비를 벌어와야 한다. 3중고, 4중고에 시달리는 셈이다.
여성 실업대책 운동을 벌이는 여성단체들